한여름의 자선냄비

김환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11/25 [12:52]
연말연시는 자선냄비와 함께 온다.  자선냄비와 관련된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다. 매년 익명으로 자선냄비 통에 1억을 넣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제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비밀이다.  스님이 자선냄비 옆에서 시주하다, 돌아갈 때 시주 받은 돈을 모두 자선냄비 통에 넣은 일도 있다.

어느 해인가 자선냄비와 관련된 이런 기사가 있었다. 차림새가 남루해 보이는 중년 신사가 안주머니에서 꺼낸 두툼한 돈뭉치를 한꺼번에 넣지 못하고 반으로 나누어 넣고, 나머지 반을 넣으려고 할 때, 자선냄비 봉사원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라고 말렸다. 하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나머지 돈 뭉치를 넣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1891년 샌프란시스코

1891년 성탄이 가까워 오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선냄비는 그 첫 종소리를 울리게 되었다. 도시 빈민들과 갑작스런 재난을 당하여 슬픈 성탄을 맞이하게 된 천여 명의 사람들을 먹여야 했던 한 구세군 조셉 맥피 사관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옛날 영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누군가가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그는 오클랜드 부두로 나아가 주방에서 사용하던 큰 쇠솥을 다리를 놓아 거리에 내걸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렇게 써 붙였다.

"이 국솥을 끊게 합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성탄절에 불우한 이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할 만큼의 충분한 기금을 마련하게 되었다.
 
1928년 서울 

조선에서 자선냄비가 시작된 1928년은 일본의 식민지 수탈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이다. 1918년 일본 곳곳에서 쌀을 요구하는 일제의 폭동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일제는 전쟁 물자를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겼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농촌을 떠나게 되어 일시적인 식량 부족 사태를 맞게 된다. 일제는 부족한 쌀을 조선에서 확보할 목적으로 산미증식 계획을 세웠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흉년과 가뭄, 뒤늦게 쏟아 부은 홍수피해로 양곡추수가 실패한 해였을 뿐 아니라, 1929년에 불어 닥칠 세계적인 경제공항과 그로 인한 일제의 대륙 침략의 조짐이 있었던 해였기에 더욱 추웠다. 이후 자선냄비는 연말연시에 불우이웃을 돕는 상징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2013년 한국구세군은 ‘자선냄비 본부’를 독립시켜 범국민적 모금운동으로 더욱 확대하게 되었다. 더 효과적이고 독립적이며 실질적으로 지역사회를 도울 수 있는 길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2013년 시드니

이렇게 시작한 ‘자선냄비’는 어느덧 122년이 지나고, 지역도 샌프란시스코가 아닌 시드니이며, 주방의 ‘국솥’ 대신 붉은방패가 새겨진 ‘빨간통’으로 바뀌었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사랑의 종소리’는 동일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구세군시드니한인교회는 12월 16일부터 24일까지 ‘츄롤라 쇼핑센터’에 자선냄비를 설치한다. ‘버닝스 웨어하우스’도 구세군 자선냄비 활동에 동참하기로 했다. 시드니는 지금 겨울도 아니고, 가난한 나라도 아니다. 하지만 성탄이 되면 더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 그들에게 가서 따뜻한 한 끼의 음식을 나누며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유태인 랍비 아카바에게 어떤 철학자가 물었다.

“만일 그대의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어째서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돌보시지 않는가?” 아카바는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할 기회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가난한 자들을 항상 우리 곁에 있게 하였다네”라고 대답했다.〠

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 한인사역(Korean Ministry) 및 수용소 담당관(Chaplain, Detention Cen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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