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주의와 이단(끝)

정동섭/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5/08/25 [11:14]
정동섭 교수(가족관계연수소장, 전 침신대 교수, 사이비종교피해대책연맹 총재)는 한국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성교회 안에 깊이 뿌리 내린 ‘세대주의’를 보다 건강한 성경적 종말론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세 번에 이은 기고를 정리한다. (편집자 주)

지난 호까지 우리는 ‘율법’의 기능, 특히 그리스도를 통해 폐기된 제사관계 규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 적용되는 규범적 기능이 있음을 지적했다. 이것을 우리 한국교회에 강조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은혜를 공짜로’ 오해하는 현실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조건 없는 은혜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호의는 철저한 청산을 요구하며,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보듯이(마 13:1-7) 베풀어진 은혜에 대한 합당한 반응을 강조한다.
 
그럼 왜 구원을 은혜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자격이라곤 전혀 없는 대상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한국 상황에서 더 잘 설명된다. 우리 같은 관계중심적인 체면사회에서는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는 공짜 개념의 은혜는 없다. 선물(은혜)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고마움과 부채의식을 갖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도 은혜를 ‘거저’ 주신 이유가의 먼저 우리가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엡 2:9),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v10). 신약성경은 구원이 은혜의 선물이니까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충성스런 삶을 요구한다.
 
충성스런 삶은 지속적으로 죄와 싸우며 선한 삶을 추구하는 삶이기도 하다. 구원받은 신자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더 이상 죄를 싫어하고 저항하는 성향을 가지는 사람이다. 현 생애에서는 어떤 위대한 그리스도인도 완전하게 자신의 죄를 정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전처럼 죄를 즐기고, 무방비로 끌려가지도 않는다.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며 역사하기 때문이다(요 16:8).
 
진정으로 구원받은 신자는 삶 가운데 선한 행위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 우리의 선행은 우리를 의롭게 해 주지는 못하지만, 이미 우리를 새롭게 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써 당연히 요구되는 행위다. 선한 일에는 거창한 일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 중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가 ‘내 것!’이라고 선포하시지 않은 영역은 단 하나도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세속적인 일’과 ‘신성한 일’(거룩한 일)이 따로 있지 않다. 마틴 루터도, 교회일만이 아니라 설거지, 빨래, 낙엽치우기, 기저귀 갈기도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세대주의가 구원론이 미치는 영향
 
사도 요한이 본 천년왕국 비전에 대한 정확한 해석문제는(계 20:1-10) 2세기 이래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일으켜왔다. 그 과정에서 세 가지 입장이 인정 받아왔는데, 재림 이후에 천년왕국이 온다는 ‘전천년설’ 천년왕국 후에 재림이 있다는 ‘후천년설,’, 재림 이전이나 이후나 천년왕국이 없다는 ‘무천년설’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는 전천년설이 대세였지만, 최근들어 ‘천년’을 교회 전체역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무천년설’이 더 주목을 받고 있다. 세대주의는 전천년설 중에 ‘분파’에 속하지만, 모든 전천년설주의자가 세대주의자는 아니다.
 
세대주의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전쟁과 기근, 지진과 같은 징조가 있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면, 배도와 함께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고 7년 대환란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들은 대환란과 천년왕국을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는 시간으로 이해한다.
 
지금 우리가 속한 교회 시대의 정점은 휴거다. 이 휴를 통해 그리스도는 신실한 제자들을 ‘공중으로’ 끌어올려 천국으로 데리고 가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여실 것이다. 이렇게 참된 교회가 지상에서 사라지면, 적그리스도가 7년 동안 악마적 통치를 시작하며,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땅 위에 쏟아진다.
 
이러한 대환란 기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이 와중에 그리스도가 천국의 군대와 함께 재림하셔서 모든 원수를 처부순다. 그때 이스라엘은 비로소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것이며,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질 것이라고 믿는다.
 
첫 번째 문제는 세대주의는 신자들에게 미래의 어떤 시점(예수의 재림시점)에만 집착하도록 유도함으로써, 현실의 삶을 등한시하게 만든다.
 
1992년 10월 휴거설을 주창했던 다미선교회나 현재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은혜로교회가 좋은 예인데, 교인들이 현실을 무시하게 만들고 곧 올 재림을 강조하며 회개를 강요한다. 두 번째 문제는 역사관이다. 연대기적으로 역사를 보는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시키고, 율법과 은혜를 대립으로 본다. 율법은 모세와 행위에만 연관되어 있으며, 은혜는 이와 별도로 그리스도와 믿음에 관련되었다는 것이다.

스코필드는 “율법은 죄인을 칭의하지도 않고 신자를 성화시키지도 않는다”고 강조했다. 세 번째 문제는 세대주의 문화는 영적인 것과 실제적인 삶을 분리시킨다. 이런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현실을 등한시하고 극단적인 집단생활 등에 몰두하도록 만든다. 신천지, 안상홍증인회, 인터콥, 구원파뿐만 아니라 20세가 한국의 많은 부흥사들이 가르침은 이런 종말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공통적으로 7년 대환난, 휴거, 천년왕국, 144,000, 666이라는 단어들을 애용한다
 
이에 반해, 성경적으로 더 합당한 입장인 무천년설에서는 천년을 완전수인 10을 세 번 곱한 충만수로 본다. 천년왕국의 천 년을 교회역사에 대한 상징, 지금 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영적 승리’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칼빈과 어거스틴도 이 입장을 취했다. 천 년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시는 ‘충만’한 역사를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종말에 대해 강박적 관심을 갖고 있는 구원파와 같은 집단의 행태를 지적하면서 균형 있는 신앙생활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관심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현재의 세계정세에서는 특히 그렇다. 사람들은 여기에 마음을 빼앗겨 있는 것 같다. 이들은 특별한 종말론적 예언 이외에는 관심도 없고, 평범한 설교는 무시한다. 그러나 이런류의 예언에 대한 지나친 몰두 이상으로 영적 건강에 위협하는 것은 없다.
 
어떤 이들은 소련, 이집트, 이스라엘 같은 나라들의 동향이나, 에스겔서 37, 38장이나 다니엘서 7-12장에 나오는 ‘시대’를 추정하는데 모든 정열을 쏟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영적 의미에서는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점점 무관심해지기 쉽다.
 
물론 예언은 성경의 중요한 일부이며, 관심을 마땅히 가져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장래에 일어날 사건에 너무 관심을 가지다가, 지금 살아야 하는 생애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다는 점을 잊지 말자.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의 가장 큰 위험은 균형이나 조화의 감각을 상실하는 것이다.
 
결론-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나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14:36).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 13). “때와 기한은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 7).
 
베드로도 교회에는 거짓 선생들이 계속 등장해 조용히 그러나 파괴적인 이단을 끌어들일 것이라고 경고한다.(벧후 2).
 
우리는 복된 소망을 갖고 현실에 더욱 더 충실하고 주어진 사명을 더 충실히 감당하며 충성하고 봉사할 때 약속된 하나님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날과 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도로서의 거룩한 삶이다(마 24:36, 벧후 3:11-12).
 
현대는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절정에 이르기 ‘직전’의 시기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얼마나 될지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선견자 요한처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
 
우리는 재림이 가까워진다는 핑계로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살전 4:11). 성도들은 재림하시는 주를 맞아 영접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종말에 대한 불안이나 걱정은 성도들이 할 거리가 아니다. 매일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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