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씨앗 뿌리를 찾고 싶다

사랑과 기적의 씨앗, 그 채무자입니다

글|민영란, 사진|권순형 | 입력 : 2015/09/30 [10:57]
▲ 호주 선교부에서 장학금을 받고 신학교에 진학하여 목사가 된 민영란 목사.     © 크리스찬리뷰

기적의 씨앗

나는 경남 산청 생초, 오부 ‘깡촌’에서  출생한 소위  지리산 ‘인디언 산족’(애보리진) 출신이다. 어린 시절, 아마 초등학교 1~2학년경, 버스도 다니지 않는 마을에 선교사가 지프차를 타고 들어왔다. 그러면 동네사람들은 “양놈 코쟁이 왔다”며 구경하러 몰려나올 정도였다.
 
선교사들이 나누어주는 과자, 우유덩어리 구호물자들을 받는 재미에 어린 우리는 선교사 뒤를 따라다니며 애절한 눈빛으로 손을 내밀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밤이면 호롱불 밑에서 선교사는 동네회관 앞에서 전도설교를 시작했다.
 
“이 씨는 가시밭에 떨어졌던 것이었습니다.”
 
‘가시밭에 떨어진 씨앗!’ 선교사가 들려준 많은 호기심을 일으킨 설교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기억이 동영상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선교사가 했던 서툰 한국말을 재미삼아 흉내내고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드디어 우리 동네에 예배당을 세워졌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웃 마을 생초교회가 오부면 우리 마을에 교회 건축을 했다. 시멘트 기둥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15평 정도 되는 예배 공간을 약 55년 전에 건축했다. 이렇게 세워진 부곡교회는 주일마다 선교사들이 순례자처럼 와서 예배인도를 하곤 했다.
 
초창기, 전도 받은 교인들이 아이들을 합해 약 10명 정도가 초기에 참석했던 것 같다. 나 역시 단짝 친구 박성진과 함께 어른들 틈에 끼어 예배당에서 뛰어놀며 신나게 교회를 다녔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신앙생활은 은혜를 받고, 새벽기도 종지기를 맡아 새벽종을 치는 감격을 갖기도 하였다.
 
대처인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주노회와 호주 선교부를 찾아가서 신학교 지원하였다. 호주 선교부 추천으로 호남신학대에 입학했다. 호주 선교부에서 등록금 지원을 받기도 했다. 나의 어릴 적 ‘추억의 반 토막’을 차지할 정도로 단짝친구 박성진은 후에 나란히 목사가 되었다.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현재 LA 한인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는 내 고향 부곡교회는 아직도 농촌 미자립 교회에 불과하지만 그동안 목사가 5명이나 배출되기도 하였다.

▲ 지난해 부산진교회에서 열린 한•호 선교 125주년 기념예배에서 기도하는 민영란 목사.     © 부산진교회
 
기적의 교회, 생초교회
 
부곡교회를 세운 생초교회 역사는 80년 전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최판규(당시 아이)를 살리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한 부모의 간절함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 아이를 담요로 감아 소달구지에 싣고 진주까지 백리 길을 갔다. 당시 호주선교사가 진주에 세운 배돈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치료를 했지만 살릴 수가 없었다.
 
이때 선교사가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주며 “이 아이는 의술로는 살릴 수가 없으니 이 책을 읽어보시오. 하나님께 기도해 보시오,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면 살 수 있고,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으니 성경을 읽고 기도해보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돌아온 지 며칠도 되지 않아 그 아이는 죽고 말았다. 죽은 아들을 담요에 싸고 한 구석에 밀어놓고 동네 사람들이 함께 슬픔에 젖어 있는데, 놀랍게도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특히 살아난 아이의 부모는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데도 눈이 열려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기적의 연속이었다. 당시 글도 읽을 줄 모르는 또 다른 청년들 5~6명이 예배에 참석했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던 이들 역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바싹 마른 가지에 싹이 나는 기적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었다.
 
이것이 부곡교회의 뿌리인 생초교회의 80년 전 첫 출발이 된다. 죽은 줄 알고 담요에 둘둘 말려 버려졌다가 살아난 아이, 최판규는 은혜를 받고 후에 장로가 되었다. 그는 생초교회 개척 기둥이 되고, 후에 호주선교사와 우리 고향 부곡교회를 세우는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나는 고향 부곡교회에서 구원받고, 은혜 받은 이후, 성장하면서 고향을 떠나 살고 있지만, 고향교회를 돌보는 일이라면 할 수 있는 최선의 힘을 쏟고 있다. 오늘의 부곡교회는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집과 텃밭을 교회에 드리면서 새롭게 건축했다. 현재 교회당 건물은 내가 섬기는 금곡성문교회가 기도하며 건축을 도와 완공했다.

▲ 멜본 3개 노회 초청으로 호주를 방문한 부산 3개 노회 임원들이 시드니를 경유, 동산교회 수요예배에 참석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 크리스찬리뷰
 
또 하나의 기적
 
돌이켜 보면 우리 집안은 특히 불도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보살이었고, 큰집에는 스님이 있어 가족 일가친척 모두가 불교 가르침에 절대적인 지배를 받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는 것은 집안의 내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이런 가정에서 목사가 나온 것 역시 ‘또 하나의 기적’으로 기록될 수 있다. 이 기적은 그저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지리산 깊은 골짝까지 복음의 씨앗을 뿌리며, 교회를 세워 그 씨앗들이 잘 자라도록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은 호주 선교사들의 사랑의 결실이다. 나는 그 사랑의 수고, 복음에 빚 진자로서 그 은혜를 기리고 선교의 사명을 다 하고자 한다.
 
나의 신앙의 모태와 같은 호주 선교부 추천으로 처음 호남신학대학교를 1974년에 입학을 했지만, 졸업은 부산장신대학교로 옮겨서 마쳤다, 곧 이어 서울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85년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부목사 사역을 마친 후, 88년 부산의 대표적인 빈민지역인 부암동 산동네에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빈민선교 사역 을 8년 했다. 맞벌이 부부를 위한 종일 탁아원, 청소년 야간공부방, 독거노인 및 소년가장 돕기 결연, 노인대학, 산동네 가건물 철거 반대운동, 작은 교회 등을 만들어 부산에 사회선교 운동을 펼쳐 시민운동, 환경운동, 사회복지운동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95년도에는 빈민선교의 경험을 토대로 부산의 최대 빈민 이주촌이라 불리는 부산 북구 금곡동에 성문교회를 개척하여 올해로 20년을 맞이했다. 교회개척 때 교회당 부지를 약 3억 5천만 원을 헌금하고 시작했다. 개척 때부터 주민을 섬기는 ‘머슴목사론’으로 동네를 섬기고 주민을 섬겼다. 나의 목회현장은 ‘섬김과 나눔의 실천 현장’으로써 삼으며 여기까지 왔다.
 
사회복지법인 노인복지재단을 만들어 노인요양생활시설과 재가복지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경로대학, 무료급식소, 지역아동센터 등 복지선교를 모델교회로서 주민과 함께하는 교회로 미력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은 무료급식소와 경로대학은 300명이 넘는 노인들이 북적대는 노인축제 한마당행사로 열리고 있다.


▲ 빅토리아-타스마니아 주총회를 방문한 민영란 목사(왼쪽 2번째).     © 크리스찬리뷰
 
만약 내가 날마다 그분의 은혜 가운데 살면서 간혹 “만약 내가 목사가 되지 않고 살아왔다면 나는 과연 어떤 인생이 되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어린 시절 꿈은, 그 시골 동네 간혹 자동차가 들어올 때, 운전하는 기사가 너무 멋있게 보여서 택시기사를 하는 것이 꿈이었다. 택시기사는 자신의 차가 없어도 신나게 운전하고 돈도 버니, 소위 ‘꿩 먹고 알 먹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 소박한 꿈은 과수원을 만드는 일이었다. 만약 내가 예수님을 안 믿고 지금까지 살아왔다면 고향에서 과수원을 하면서 마을 이장 정도 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주님의 은혜가 지리산 깊은 골짝까지 임하여, 그 은혜의 복음이 나에게까지 흡수되어 구원을 받은 것만도 큰 영광이다. 더 큰 감당할 수 없는 은혜는 ‘산족 출신’ 목사가 되어 부산장신대학교 이사장으로서 선지학교를 섬기는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부산남노회장으로 영남지역 17개노회 협의회회장으로서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는 것 또한 더할 수 없는 은혜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탱크’ ‘불도저’ 등의 별명을 붙여줄 만큼, 반드시 해야할 일을 좌고우면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편이다. 그것을 이제 선지학교인 부산장신대학교 도서관 건축에 쏟아보고자 한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의 말처럼 도서관은 “문헌과 데이터를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은 하나의 건물이라는 개념을 넘어서서 더 큰 세상을 향해 열려진 창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신학교는 항상 도서관이라는 공간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을 갈고 닦으며, 신학도들의 영성과 지성을 성장시키는 위대한 사상과 통찰력 있는 신앙의 선진들의 흔적을 쌓아놓는 곳이기 때문에 나의 여력을 쏟아 부을 예정이다. 
 
▲ 지난해 11월 부산진교회에서 열린 한•호 선교 125주년 기념예배 참석한 민영란 목사(왼쪽).     © 부산진교회
 
출세한 촌놈, 그 사랑의 빚
 
“촌놈이 출세했다”는 시골스런 말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게 해당하는 말같다. 하나님은 지리산 끝자락의 촌놈에게 목회의 복, 명예의 복, 자녀의 복, 건강의 복, 재물의 복까지 감당 못할 정도로 부어주셨다.
 
이 은혜를 생각하며, 늘 넘어질까 조심하려 한다. 특히 지금부터는 나에게 어린 시절 복음의 씨앗을 뿌려준, 호주 선교사들의 뿌리를 찾고 싶다. 이 문명의 나라에서 그 열악한 시골까지 복음의 씨앗을 한 광주리 가져와 아낌없이 나눠준 그들의 사랑의 빚에 채무자된 심정으로 찾으려 한다.
 
그때 그 호주 선교사들이 부산,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125년 전부터 부어주신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귀중한지, 이번에 호주를 방문해 보고야 그 흔적을 미약하지만 조금 느끼는 것 같다.
 
나환자를 위한 상애원을 세우고, 부산일신병원을 세우고, 부산의 동래학교, 금성학교, 마산의 창신학교 등 학원선교와 지리산 농촌순회전도, 구호활동 등 나열할 수 없는 수많은 선교활동들이 126년 동안 126여 명의 호주선교사들의 주님 사랑 실천은 오늘의 부산, 경남의 교회들이 바로 그 결실이다.
 
부산남노회장의 신분으로 호주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조선 땅에 쏟은 훌륭한 선교사들의 선교정신과 뜨거운 가슴을 간직하여 나의 남은 목회여생을 주님 사랑의 빛으로 소외된 사회적 약자를 돕고 나누고 베풀고 싶다.
 
무엇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산청교회, 생초교회의 호주선교사 협력선교 활동을 수집하여 지역교회사를 복원하고 싶다. 〠 

글/민영란|금곡성문교회 담임목사, 부산남노회장, 17개 영남지역 노회협의회장, 
              장신대학교 이사장, 총회 공천위원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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