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리뷰’는 나의 고향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22/08/28 [22:54]
▲ 크리스찬리뷰는 1990년 1월 호를 창간호로 발행됐다. 사진은 창간호 표지.                       © 크리스찬리뷰


이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만나게 된다. 성경의 ‘욥기’에 등장하는 욥도 자신에게 갑자기 닥쳐온 고난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질문을 하다가 결국 폭풍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태풍과 천둥 가운데서, 또는 재난과 지진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즉 크리스찬리뷰에 실려 있는 모든 기사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담겨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사람이 그 음성을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 그 소리를 천하에 펼치시며 번갯불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고”(욥 37:2-3)

 

크리스찬리뷰의 탄생은 실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호주 유일의 기독교 월간잡지로 모든 기사에 하나님의 음성이 담겨 독자들의 손에 배달되기 시작한 것이다. 절망으로 고통 받던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씨앗을 뿌려 믿음의 새순을 움트게 하는 못자리가 되었고, 희망과 용기는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문서선교지 역할을 했다.

 

나와 크리스찬리뷰

 

▲ 크리스찬리뷰 편집인 김명동 목사     © 크리스찬리뷰

 

나는 1990년 1월 크리스찬리뷰가 창간되면서부터 32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흔한 말로 원도 한도 없이 글을 썼다. 비록 부족한 글이었지만. 그 무렵, 글은 무엇보다도 진실되어야 하며 그 진실을 통한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순전히 크리스찬리뷰의 말없는 가르침 때문이었다.

 

생활에서 우러나온 크리스찬리뷰 독자들의 감동어린 글을 매월 읽으면서 글의 근본정신을 깨달을 수 있게 된데 대해 나는 지금도 독자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글쟁이로서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큰 축복은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나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만난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게 되었다. 우선 크리스찬리뷰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권순형 발행인과의 만남이다. 나는 가끔 크리스찬리뷰가 고향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내가 크리스찬리뷰를 고향과 같이 느끼는 것은 따지고 보면 크리스찬리뷰에는 언제나 권순형 발행인이 늘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 크리스찬리뷰 권순형 발행인은 캄보디아 프놈펜에 있는 헤브론의료원 3층에 스튜디오를 설치하고 환자들에게 무료로 사진을 촬영해 주고 있다. 사진 선교의 일환으로 사진 밑에 사도행전 16:31을 넣고 인화해 준다.    © 크리스찬리뷰

 

▲ 헤브론의료원 김우정 원장(왼쪽)과  크리스찬리뷰 권순형 발행인     © 크리스찬리뷰


그는 언론의 정도를 지키기 위해 오해도 받고 모함도 받지만 사실 그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아름다운 사람이다. 정도 많고 참 부지런하다. 그는 여기에 있는가 하면 벌써 저기에 가 있다.

 

멜번에 있는가 하면 타스마니아에서 나타난다. 일러 질풍이라 한다. 아니 부산 어느 모퉁이에 파묻혀 있는가 했더니 벌써 그는 캄보디아에서 껄껄 웃어대고 있다. 그는 바람의 사나이다.

 

하지만 그는 독자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사라지는 것이다. 아니 그의 종잡을 수 없는 탐구와 모험, 개척의 행보야말로 이 시대 꾀죄죄해가는 사람들에 대한 천둥소리가 아니겠는가. 이 다음의 행선지는 어느 곳인가. 벌써 그곳이 궁금해진다. ‘가평 다큐멘터리’제작으로 바쁜 그가 아마도 가평과 마량산 일대를 배회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가 캄보디아로 날아갔다

-사진작가 권순형

 

권순형 작가는 진국이다.

그에게는 사람을 감싸주는 사랑이 있고

열정이 있고, 작가의 낭만이 있다

30대 후반에 호주로 건너와

1990년 1월

신앙 월간지 ‘크리스찬리뷰’를 창간했다

상처 난 마음 싸매주고

멍든 가슴 위로해주며

사막의 생수처럼

생명의 샘 퍼 올려

갈한 목 추겨주는 손길 뻗쳤다

이 시대 어느 곳에서

이런 외고집 만나보기 드물지

이제 칠순의 노인이 된 그가

촬영 장비를 들고 캄보디아로 날아갔다

*사진선교의 씨앗이 되기로 했단다

깜짝 놀라 사람들은 물었다

그 나이에 열악한 캄보디아까지 가느냐고

“내가 그곳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데려 갔습니다“

한국으로 파송되어 헌신했던

호주인 선교사 야사를 총정리한 그는

역사의식이 또렷한 가슴 장한 한국인

그러므로 오늘의 역사적 진국이다.

 

*사진선교: 캄보디아 헤브론병원에 스튜디오를 설치했다. 환자들과 직원들에게 무료로 사진을 촬영해주고 사진촬영기술도 가르치면서 사진선교의 새로운 장을 펼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는 32년의 세월동안 392권을 한 달도 거르지 않았다. 이를 권순형 발행인은 “선교를 어떻게 쉴 수 있는가”라며 “허허” 한다. 그러나 그 웃는 눈가에는 소명의식이 엿보인다. 나는 이 천국의 풍경에 감동하여 어쩌지 못했다.

 

캄보디아 헤브론병원

 

▲ 헤브론의료원 회의실에서 김우정 원장과 인터뷰 중인 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김명동 목사.(오른쪽)                       © 크리스찬리뷰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건도 많고 닮고 싶은 사람도 많지만, 김우정 선교사와의 만남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의 일대기를 쓰려고 캄보디아를 몇 차례 찾아갔고, 그를 여섯 차례 만나면서 그의 수고와 아픔이 내일처럼 다가와서 많이 울기도 했다.

 

김우정 선교사는 위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강권적으로 붙들린 사람이다.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강하게 느꼈고 정말로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인 김 선교사는 한국에서 소아과의원을 운영했다. 그러다 2004년 설 연휴를 맞아 떠난 캄보디아 단기 의료봉사에서 인생이 바뀌었다.

 

▲ 헤브론의료원장 김우정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김 선교사는 1년 4개월 동안 캄보디아 환자들을 돌보며 익힌 현지 상황을 토대로 2007년 9월 소아과 2명, 마취과 1명, 치과 1명의 한국인 의료선교사 4명, 캄보디아 직원 5명과 함께 수도 프놈펜 외곽지역의 작은 가정집을 리모델링해 헤브론병원(이하 헤브론의료원)을 열었다. 캄보디아 환자들을 위한 무료병원이었다.

 

헤브론의료원은 현재 의사 28명, 간호사 35명, 임상병리사 5명 등을 포함해 100여 명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내과, 일반외과, 정형외과 등 11개의 진료과와 심장센터, 안과센터 등 특화된 전문센터를 통해 연간 6만여 명을 진료하고 연간 1천여 건의 수술을 하는 의료기관으로 발전했다.

 

2007년 개원 이후 44만 명이 넘는 환자가 이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고 2만여 명의 환자가 입원 치료로 건강을 회복했다. 1천200여 건의 안과 수술, 1천100여 건의 암수술, 77여 건의 일반 수술이 이뤄졌다.

 

그동안의 삶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나는 아주 중요한 것을 배웠다. 말과 행동의 일치다. 우리 사회의 신뢰와 권위가 무너진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데 세상에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다. 나는 김우정 선교사에게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배웠다.

 

▲ 한국 최초의 신경정신과 의사로 진주 배돈병원 원장으로 사역한 맥라렌 선교사(뒷줄 왼쪽 2번째)가 한호 의료진들과 함께했다.(1911-1938)     © 크리스찬리뷰

 

▲ 크릿스찬리뷰 독자들의 성금으로 구입한 약품과 기증받은 약품을 김명동 편집국장이 헤브론의료원 약국에 전달했다.(2015. 4)     © 크리스찬리뷰


“대한민국이 그냥 이뤄진 게 아니고 130여 년 전 조선 땅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의 피와 땀이 쏟아진 것이란 걸 되새기게 됐습니다. 그런데 조선에 온 선교사들 중 1/4이 의료선교사였다는 것을 알고 많이 놀랐으며 그들이 한국 아이들을 건강하게 길러줬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됐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분들이 하는 일을 따르는 것이지요. 사랑의 빚을 졌으니 살만할 때 그 빚을 갚으면서 살겠다고 결심하게 된 거죠.”

 

김 선교사의 한마디 한마디가 지금도 절절하게 들린다.

 

김우정 선교사가 남긴 흔적은 크고 참 깊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을 끝없이 사랑한 크리스천이고, 의사이며 선교사이다. 그리스도가 보여준 사랑을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실천하려 노력하고 또 노력하였기에 그의 숭고한 사랑과 헌신 앞에 고개를 숙이는 이가 많다. 사랑이 메말라가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병원 로비에서 진료받고 있는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이에게 책을 읽어 주는 김우정 원장.     © 크리스찬리뷰

 

김우정 선교사

 

김우정 선교사를 만나면

그냥 가만히 눈을 감고 싶어진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그 사람이 걸어온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그 발길에 스민 언약의 무지개

그 걸음에 새긴 땀과 눈물

상처와 다짐들

문득 키 작은 민들레꽃

한 송이

진구렁 자갈밭에 내려와

부지런히 꽃을 피우고 씨를 퍼뜨리지만

뽐내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혼자 수줍게

겸손으로 살아간다

안락하고 화려한 토양이 아니라

힘차고 매몰찬 짓밟힘 속에서도

환하고 아름답게 피어 있다

그를 만나면

그냥 가만히 눈을 감고 싶어진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그와 함께 희망의 길로 걷고 있다.

 

▲ 헤브론의료원에서 심장 수술받은 어린이들이 정기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을 방문, 김우정 원장과 자리를 함께했다.     © 크리스찬리뷰


김우정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기도하게 하시는지 모른다.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일하신다. 현지에 있다 보면 130여 년 전 한국에 들어온 외국 선교사들이 한 사람을 살리려고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을지 짐작이 간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씀이 미치도록 좋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만져지는 전율이었다.

 

한 독자의 편지

 

그동안 많은 독자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격려를 받고 전화도 받았다. 내가 쓴 글을 읽고 힘과 용기를 얻었다는 말이 놀랍고 감동적이었고 기뻤다. 그러나 나는 정말 부끄러웠다. 써놓고 나면 보이는 것은 흠집투성이이고, 때로는 차라리 안 썼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자괴감마저 드는 글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작가의 내 몫이 아니다. 그것은 독자인 몫이 아니던가. 어찌하든 행복했다.

 

언젠가 한 독자가 이메일로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평소 내 글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보낸다고 했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저는 시드니 교민이자 교민 자녀인 C(90년생)라고 합니다. 모르는 연락처로부터 오는 연락은 반갑지 않은 경우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이메일 드려봅니다. 이로 인해 받아 읽는 시인 분의 마음이 불편해지지 않으시길 기도하면서 써나가겠습니다.

 

저희 가정(부모님 슬하 1녀)은 이곳 시드니로 2009년에 왔습니다. 이미 11년 전 그때, 저 혼자 유학을 올 수 있는 나이였고,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저희가 당시 이민 14년차였던 뉴질랜드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계신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두 분의 크신 사랑으로 자취, 유학생이 아닌 ‘교민자녀’라는 그림 속에서 대학생활을 시드니에서 시작하는 특권을 누리게 됐습니다. 그걸 실현하기 위해 부모님께서는 너무 불쌍하고 힘든 대가들을 치루셔야 했고, 두 분의 그러한 희생으로 저는 끝까지 ‘어디서 온 누구’라는 정체보다 ’누구네 딸‘이라는 보호막 안에서 살아오며 시드니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두 번째(뉴질랜드에서 호주로 온)이민 초기에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어머니께서 크리스찬리뷰 잡지를 알게 되고, 거기에 게재된 목사님의 글들을 보며 큰 힘을 얻으셨다고 합니다.

 

따뜻하게 보듬는 힘이 느껴지는 시인들의 글들을 꼭 챙겨 읽으시고, 스크랩 한 적도 수차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영향을 받았는데 왜 이제 와서 이렇게 연락처까지 수소문해서 연락해오나, 싶으시죠?

 

저희가 이민 초기에 대한 얘기는 요즘 들어서 처음 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때에 대한 얘기도 아무렇지 않게 얘기 나눌 수 있도록, 제가 부모님께 일찍이 그렇게 해드렸어야 하는 건데, 부끄럽지만 정말 오래 걸렸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어머니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올 생신 때 어떻게 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고민을 말씀드리고 함께 이런저런 생각을 나누던 차, 어머니께서 이민 초기 때의 시인 분의 글이 당신께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말씀하시더라고요. ‘만약에 그 글들의 주인인 목사님을 뵐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참 좋겠다’라면서요.

 

뜬금없이 연락해서는, 안면도 없는 와중에 다짜고짜 만나 뵙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제 입장에서도 어렵습니다만 혹시 귀하께서 가능하시다면 이에 대해 생각해보시고 답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버지와 제가 힘을 합쳐서 어머니께 의미있는 깊은 생일선물을 드릴 수 있는 기회를, 목사님의 도움으로 얻을 수 있다면 참 행복하겠습니다.

 

요즘 기후를 비롯해 여러 상황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아무쪼록 따뜻하고 포근하게 계시고, 답장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C 드림]

 

“안녕하세요?

 

C님의 깨끗한 마음이 담아있는 메시지를 받아보고정말 반가웠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때이어서 더더욱 힘찬 용기를 주었고 고마웠습니다. 그렇지만 때맞추어 감사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실은 2년 전 암수술을 받고 회복 중에 있었는데 재발되어 또 다시 수술을 받게 되었지요. 이번에는 좀 힘들었습니다. 이제야 정신과 몸이 안정이 되어 차분한 마음으로 돌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어머님의 생신은 잘 보내셨는지요?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네요.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 되는 날, 뵈올 날을 기대할게요. 뵙게 된다면 저로서는 더 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 예기치 않던 일들이 불쑥불쑥 기쁨으로 안겨오니까요.

 

▲ 병원 직원들이시골마을로 어린이 사역을 떠나기에 앞서 식사를 하고 있다. 김우정 원장과 김명동 편집인이 함께했다.    © 크리스찬리뷰

 

주님 주신 축복 아래 온 가정이 평안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블루마운틴 산자락에서 김명동 드림]

 

이후 서로의 사정에 의해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빠른 시일 내에 한 번 꼭 만나 뵐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나는 내 자신이 작가라는 것이 행복했으며 크리스찬리뷰와 함께한 세월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크리스찬리뷰에서 만난 사람들을 잊지 못한다. 내가 그들을 찾아 위로해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찾아와 위로해 주었으므로.

 

독자 여러분, 크리스찬리뷰를 더욱 아껴주십시오.

사랑합니다. 〠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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