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최초로 드려진 가톨릭 미사

정지수/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3/02/27 [16:26]

 

▲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 필립 기들리 킹. 그는 가톨릭 신자들이 자유롭게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1803년 4월 12일부터 19일까지 일련의 법안을 발표했다.     

 

호주를 식민지로 삼은 영국 정부는 많은 죄수들과 그들을 다스릴 정부 관리들, 그리고 치안을 담당할 군인들을 이주시켜 정착시켰다. 호주로 이주해 온 사람들 중에는 영국국교회 신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가톨릭 신자들도 적지 않았다.

 

호주에 정착한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미사가 처음으로 드려진 날은 1803년 5월 15일이다. 이날부터 가톨릭 신자들은 자유롭게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가톨릭 미사가 드려지기 시작했을 때 호주에는 약 1천7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이주해 살고 있었다.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인 필립 기들리 킹(Philip Gidley King)은 가톨릭 신자들이 자유롭게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1803년 4월 12일부터 19일까지 일련의 법안을 발표했다. 그 결과 호주 최초의 공식 가톨릭 미사가 1803년 5월 15일 제임스 딕슨(James Dixon) 신부에 의해 시드니에서 거행되었다.

 

가톨릭 미사가 호주 정착 초기부터 드려지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영국 정부의 종교 정책 때문이었다. 1787년 5월 12일 아서 필립(Arthur Phillip) 대위가 지휘하는 제1함대가 뉴사우스웨일스의 보타니 만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영국 플리머스(Plymouth)에서 출항했을 때, 식민지에 승인된 유일한 종교는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 뿐이었다.

 

영국 가톨릭교회의 토마스 월시(Thomas Walsh) 신부는 1787년 2월 영국의 내무장관에게 자신과 다른 한 신부를 호주로 떠나는 배에 탑승하게 해 달라고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는 이주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지불할 것이며, 호주로 이송되는 약 3백 명의 가톨릭 신자인 죄수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 탄원서는 영국 내무장관 앞으로 보내졌지만 토마스 월시 신부는 그 어떤 답장도 받지 못했다. 영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답장을 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영국 성공회가 영국 가톨릭교회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영국 정부에 행사하고 있었다.

 

한편, 영국 정부의 허락을 받지 못한 토마스 월시 신부는 호주로 떠나지 못했다. 그와 영국 가톨릭교회는 크게 실망했다. 이러한 영국 정부의 무대응으로 말미암아 1800년대 초까지 호주에서는 가톨릭 미사가 드려지지 못했다.

 

▲ 딕슨 신부가 집전한 초기 미사 장면. 시드니에 있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    

 

토마스 월시 신부의 탄원서에 무대응했던 영국 정부는 대조적으로 영국 성공회의 리차드 존슨(Richard Johnson) 목사를 호주 식민지의 군목으로 임명했다.

 

영국 정부는 호주 식민지에 거주하게 될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다는 법적 조항을 삭제하고 새로운 식민지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영국에서 파송된 총독이 공식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고 명시했다.

 

다시 말해 총독은 리차드 존슨 군목이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모든 호주 식민지 거주민들에게 내릴 수 있었다.

 

영국에서 이주해온 죄수들이나 군인들 모두 총독의 명령에 따라 리차드 존슨 군목이 인도하는 영국성공회 예배에 참석해야만 했다. 만약 예배에 참석하지 않을 경우 배급에서 밀가루 3파운드가 제해졌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톨릭 죄수들도 영국성공회 목사인 존슨 목사가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했다.

 

저명한 영국 가톨릭 평신도인 윌리암 퍼모어(William Fermor)는 가톨릭 신부들을 호주로 보내려고 노력했다. 그도 영국정부에 가톨릭 신부를 호주로 보내줄 것을 탄원했지만, 영국정부는 무응답으로 대응했다.

 

▲ 딕슨 신부는 1798년 아일랜드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시드니로 왔으며, 형기를 마친 후 가톨릭 신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고 1803년 5월 15일 호주 최초로 시드니에서 미사를 인도했다.     

 

한편, 파라마타(Parramatta)에서 식민지 생활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게 된 5명의 가톨릭 신자들은 시드니 총독 관저를 찾아가 필립(Phillip) 총독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들은 호주 식민지에서 가톨릭 신부가 인도하는 가톨릭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탄원했다.

 

필립 총독은 그들의 탄원서를 영국 런던에 위치한 식민지 사무소에 제출했다. 하지만 필립 총독은 탄원서에 대한 어떤 응답도 받지 못했다. 단지 식민지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종교 예식에 대한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는 명령만 받았다.

 

1795년부터 1800년까지 총독을 지낸 존 헌터(John Hunter) 총독은 식민지의 모든 거주민들에게 성공회 목사인 리차드 존슨 (Richard Johnson)과 사무엘 마스덴(Samuel Marsden)이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하라고 세 번 명령을 내렸다 (1798년 8월 27일, 1799년 11월 29일, 1800년 8월 25).

 

한편, 1800년 1월부터 1801년 2월 사이에 3명의 아일랜드 신부들(제임스 해럴드 James Harold, 피터 오닐 Peter O’Neil, 제임스 딕슨 James Dixon)이 죄수 신분으로 시드니에 도착했다. 이들은 1798년 아일랜드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시드니에 도착한 직후 제임스 해럴드 신부는 카슬힐과 파라마타에서 일어난 아일랜드 이주민들의 반란 계획에 연루되어 1800년 10월 18일 노포크 섬(Norfolk Island)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형기를 마치고 1809년 시드니로 돌아올 수 있었고, 1810년 8월 10일 시드니를 떠나 미국으로 떠났다. 피터 오닐 신부도 형기를 다 마치고 1803년 2월 아일랜드로 돌아갔다.

 

제임스 딕슨 신부는 시드니에서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래서 총독들은 딕슨 신부를 신뢰할 수 있는 사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에 호바트(Hobart) 영국 내무장관의 편지가 1803년 3월에 시드니에 도착했다. 그 편지에는 죄수 신분으로 시드니에 온 신부들의 말과 행동을 잘 살펴보고 필요에 따라 그들에게 학교 교장의 직무나 가톨릭 사제의 직무를 허락해도 된다고 쓰여 있었다.

 

당시 총독이었던 필립 킹 (Philip King, 1800-1806) 총독은 명령을 내려 호주 식민지에 거주하는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1803년 4월 20일 수요일 오전 10시에 파라마타에 있는 총독관저에 와서 가톨릭 교인으로 등록할 것.”

 

그리고 킹 총독은 딕슨 신부가 호주 식민지에서 조건부로 가톨릭 신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이러한 총독의 명령이 알려지자 호주 식민지에 거주하고 있던 가톨릭 신자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총독의 명령에 따라 딕슨 신부는 1803년 5월 15일 호주 최초로 시드니에서 가톨릭 미사를 인도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참석해 엄숙하게 미사를 드렸다. 딕슨 신부는 한 주 후에 파라마타(Parramatta)에서 미사를 인도했고, 그 다음 주에는 혹스베리(Hawkesbury)에서 미사를 인도했다.

 

역사가들은 호주에서 최초로 드려진 가톨릭 미사가 제임스 미한(James Meehan)의 집에서 드려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그의 집은 시드니 조지 스트리트와 아길리 스트리스 코너(the corner of Argyle and George Street)에 있었다고 한다. 〠

 

정지수|본지 영문편집위원, 캄보디아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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