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정체성과 자녀교육

한길수/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3/28 [12:09]

이 글은 ‘멜번의 우리 아이들’ 모임과 Deepdene Uniting Church에서 나눈

강연을 정리한 내용이며, 지면 관계상 2~3회로 나누어 연재한다. <편집자>

▲ 한길수 교수     ©크리스찬리뷰

1. 서론

어린아이가 세발자전거를 타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뿐더러 주위 사람들을 흐뭇하게 해준다. 때가 되면 양쪽의 보조바퀴를 떼어 내고 좀 더 자유자재로, 그리고 좀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두발자전거를 타는 것은 당연히 기대되는 일이다.

훗날 성인이 되어서는 그때에 적절한 자전거를 타는 것 역시 당연히 기대되는 일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성인용 두발자전거를 탈 수 없거나, 세발자전거를 고집한다면 주위 사람들의 염려를 자아낼 것이다. 자전거를 배우는 이 과정에서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가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체력을 보강해주고, 보조바퀴를 달았을 때 뒤에서 밀어주고, 왜 헬멧을 써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안전한 곳에서 자전거를 탈 것을 권유하고, 때로 자전거가 고장나면 수리를 돕는 일 등이다.

자전거를 배우다 보면, 때로 넘어져서 피를 흘릴 수도 있다. 이러한 배움의 과정이 안타까워서, 내가 타는 자전거의 뒤에 내 아이를 태우고 다닌다면,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일을 고집하여 계속한다면, 아이는 영영 자전거를 타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듯 자녀교육이란 내 자녀의 성장을 도와서 결국은 자신의 능력과 재주를 발휘하여 독립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다.

 ‘어떻게 하면 가장 바람직한, 그리고 성공적인 자녀교육을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우리는 부모가 되어 자식을 얻게 된 이후에는 우리의 부모가 왜 그리 극성스런 교육열로 우리를 ‘괴롭혔는지’ 알게 된다. 금 숟가락을 손에 들고 태어난 아이의 부모, 또는 하루 세끼를 50센트로 해결하는 제3세계의 가난한 부모도 자기 자식만큼은 가장 좋은 것을 먹이고, 가장 좋은 것을 입히고 존경받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그래서 ‘강남엄마 따라잡기’와 같은 교육열이 우리 가운데 낯뜨거운 줄 모르고 버젓이 존재한다. 근래에는 그리도 극성스러운 강남엄마를 따라잡은, 현 세대의 무기를 들지 않은 폭군들이 있다 하는데, 이른바 ‘목동 엄마들’이라고 한다. 그들을 진정 21세기 지구화를 이끌어 가는 역군들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단지 나와 내 자녀 그리고 역사를 좀먹는 박테리아와도 같은 존재 이상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사회학자로서, 유아교육이나 교육사회학 전문가는 아니다. 자식을 둔 부모로서, 우리가 태어난 고향을 떠나서 자녀교육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 자녀교육을 위해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현 세대는 소위 ‘자격증 시대’라고 불리고 있다. 나 역시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뛰었다. “청춘을 돌려달라”는 나훈아의 노래가 무색하리만큼 나의 청춘을 잃어버린 것처럼, 공부하면서 젊은 시절이 지나갔다.

그런데 내가 결혼을 해서 정상적인 남편과 아빠로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자격증을 취득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경제적 부양능력이 없는 나의 프러포즈에 결혼을 승낙하고, 낯선 객지까지 따라온 나의 아내도, 결혼 이전에 자격증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나와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두 사람이 서로 적응하고 가르쳐주고 성장하기에도 벅찬데, 호주에 도착한 지 16개월 만에 우리 딸아이가 태어났다.

지금 돌아보면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 한 아이의 미래를 책임지고 지도해야 할 부모가 면허증도 없이 그 아이를 조종하고 운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은 대부분 부모의 모습일 뿐더러, 유아교육학 박사도 자신의 자녀교육을 하는데 자주 난관에 부딪힐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부모는 매우 성공적인 자녀 교육을 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전혀 그러지 못한다. 왜 그럴까? 대부분의 부모, 특히 한국의 부모들이 범하는 실수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째로, 우리의 자녀교육이 자녀위주의 교육이냐, 아니면 부모위주의 교육이냐 하는 질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특히 한국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자녀는 부모의 체면유지를 위한 부속물로 전락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예를 들면, ‘강남엄마 따라잡기’에 보니까, 과학고에 다니는 아이가 있다. 아빠는 돈 벌어 오는 기계이고 엄마는 자녀의 성공을 조종하는 로봇이다. 공부를 잘해서, 그리고 엄마가 등 떠밀어서 과학고에 입학했는데, 이 아이는 과학고가 적성에도 맞지 않고 성적이 좋지 않다. 아이는 기회가 될 때마다 예술고등학교로 전학을 원한다. 간절하게 계속된 ‘구걸’과 부탁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아이는 아파트의 옥상에서 투신한다. 부모가 성공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갖기 전까지 아이들은 결코 성공적인 삶을 살 수는 없다.

나 자신도 한때는 생각하기를, 부모가 자녀의 미래를 결정하고 영향을 미치고, 특정방향으로 안내하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아이를 조종하는 것을 아이가 알아차리지 않는 한 문제는 없다’라고 말이다. 이를 정당화시키는 이유는 많이 있다. ‘아이들은 인생에 대하여 잘 모르니까’, ‘부모만큼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는 없으니까’ 등이 있다. 물론 자녀가 부모와 함께 생활하면서 부모의 직업이나 직업에 대한 관념 등이 자녀교육과 그들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이리하여 자녀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부모가 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야 하며,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까지 생각된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적어도 아이가 7학년쯤 되면, 부모의 일방적인 안내보다는 자녀가 원하는 것, 삶의 방향, 직업관 등에 대해서 물어보고 서로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7학년 정도만 되면, 감수성이 예민하다. 부모가 가르쳐주고 타이르면 순종하는 것 같지만, ‘진정 받아들일 것이냐’라는 것은 부모의 영역이 아니고 자녀의 영역이다. 그들이 미숙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인격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잊는다.

두 번째로는, 성공과 보람있는 삶 또는 만족스러운 삶에 대한 개념의 혼동이다. 여러분에게 성공의 개념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한국의 70-80년대에 성공한 전형적인 사람들은 당시에 대기업에 취직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대개 40대 중반이나 50세 이전에, 원하지 않는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이 된다고 한다.

성공이란 한 사람이 얼마나 돈을 많이 벌고 권력과 명예를 누리느냐를 판단기준으로 하는데, 이는 사전적인 의미와 그리 멀지는 않다. 하지만, 한 사람이 얼마나 만족스럽고 보람있는 삶을 사느냐 하는 문제는 비교적 다른 문제다. 형이상학적인 인생의 목표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나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측면에서 성공적이고 만족한 삶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

 (1) 먼저, 독립된 개체로 살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갖추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여자아이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인생은 지극히도 짧고, 내가 살아가기에도 바쁜 인생이지만, 부모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만족스럽게 살 수 있도록, 약간의 참견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것을 좋은 말로 일컬어 자녀교육이라고 한다. 문제는 부모가 참견하지 말아야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녀의 삶을 계획하고, 시집장가를 간 이후에도 계속해서 원격조종을 통해서 참견하고 민폐를 끼치는 것은, 이제는 고쳐야 할 인류의 악습이 아닌가 한다.

 (2) 둘째로, 한 사람이 경제적 능력을 갖추려면 어떤 전문직업을 추구해야만 부모가 만족할 수 있다고 대부분의 사람은 생각한다. 나도 우리 집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근래에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즉, 보편적으로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일에 참여하는 직업이라면 괜찮다는 것이다.

어떤 직업이 이 카테고리에 들어가겠는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직업이 그렇다. 이 말은, 자녀가 흥미있어하고 적합한 재능이 있는 직업을 찾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10학년 때 하는 work experience와 같은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변호사 사무실이나 슈퍼마켓에 가서 일을 해보면 꼭 그 방향으로 직업을 구하지 않는다 해도, 직업이란 게 뭔지, 직장에서 인간관계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이해를 하는 식견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한, 그런 계기를 통해서 부모와 대화거리를 만들게 된다.

앞으로 20년 후에 존재할 직업의 75%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앞으로는 한 사람이 한 직장에서 평생을 일하기보다는 직장을 옮기는 추세가 올 것으로 기대한다. 이런 미래에 준비하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서 무슨 분야를 전공하더라도,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이해를 넓혀서 자신만이 갖는 독창적인 길을 갈 필요가 있다. 불필요한 경쟁을 하지 않으면서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것은 대부분의 학생이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그저 대학이나 졸업해서 어떻게 살 길이 열리겠지’하는 막연한 태도를 갖고 생활하고 있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공부를 잘해서 85점 내지 99점을 받아서 대학에 입학했으면, 나름대로 삶의 목표를 세우고 자신은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현대를 살아가려면 꼭 필요한 것이 창의력인데 이런 태도로 창의성이 계발되겠는가? 왜 목표의식이 없나? 이민자이냐 토박이냐를 떠나서 넓은 의미에서의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이민자의 정체성

지금도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 있는 나의 경험이 있다. 어느 날 금요일 오후 대학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이다. 4시 40분경이었으니까 복사기의 전원을 끊기 5분 전 도서관 문을 닫기 20분 전이었다.

내게중요한논문이있어서, 학술지를들고복사실로달려갔다. 복사기를이용하려는순간 20대초반의여성도서관직원이내손에들려진학술지를독살스럽게낚아채어가는것이었다. 나는충격을금할수없었고어안이벙벙했다. 그주말내내나는피가끓는고민을했다 – 어떻게배움의전당대학교의개가식도서관에서이런일이있을수있으며, 이일을어떻게처리해야할것인가주말내내고민했다.

나는월요일아침도서관에찾아갔다. 그도서직원을만나서말했다 – ‘당신이지난금요일내게행한행위는도저히용납될수없다’. 그녀는내게아무조건없이사과하였다. 이사건이왜나에게그리도큰충격으로다가왔던것일까? 한마디로기대치않았던일로나자신의정체성이무차별적인공격을받은결과, 나의정체성이처절하게재구성되어야하는위기를맞았기때문이었다.

첫째로, 정체성이란 결국,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흔히 우리가 하는 질문으로 나는 <한국사람인가, 호주사람인가, 호주에 사는 한국사람인가?>하는 문제 제기를 한다. 호주연합 교단에서 일하는 양명득 목사는 네 가지 타입의 교포들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호주 속에 사는 한국인’ (Koreans in Australia); ‘호주화된 교포들’(Australian Full Stop); ‘호주에 살지만 소속 없는 교포들’(Austr Alien); 그리고 ‘한국계 호주인’ (Korean-Australians). 필자는 이 네 가지 타입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는 것이며, 각 타입의 교민들이 가질 수 있는 삶의 태도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호주 속에 사는 한국인

호주 속에 사는 한국인은 거주지를 한국에서 호주로 옮겼지만, 마치 한국에서 사는 것처럼 호주에 살고 있는 교포를 의미한다. 이들은 한국의 정치적 시민권뿐만 아니라 문화적 시민권을 유지하고 호주의 그것을 회피하는 경향을 보일 수 있다. 이들이 한국국적을 포기한다는 것은 조국을 등지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호주사회는 그들에게 비교적 양질의 삶을 제공할뿐더러, 그들의 자녀는 교육 혜택을 받음으로써 지구화되어가는 추세에 적절한 고용기회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사회, 경제적 행위는 주로 한인 커뮤니티 안에서 이루어지고, 인간관계는 주로 교포들과 이루어지고, 전화벨이 울릴 때 응답하는 첫 인사는 ‘여보세요’일 것이다.

 ‘호주 속에 사는 한국인’들은 이질 문화를 수용하고자 하는 태도가 부족하고, 본인들의 정체성을 수정, 보완하려는 태도를 좀처럼 갖기 어렵다. 이들 중에는 ‘호주 사람들’과 직장생활을 할 수도 있지만 ‘호주 속에 사는 한국인’의 주요관심은 자신들의 비즈니스를 확장하고 자녀들의 교육을 지원하는 것이 전부다.

이들은 호주사회에 동화, 통합되는 것에는 무관심할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호주사회에 살고 있지만 호주사회를 이해하려 하지도 않을뿐더러 호주사회의 구성원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80년대 또는 90년대의 한국의 타임캡슐에 같혀 있을 뿐 진정 오늘의 한국인은 아니다.

 
 (2) 호주화 된 교포들

호주화 된 교포들(Australian Full Stop)은 생각하기를, 한국인의 정체성과 호주인의 정체성은 서로 간에 배타적이기 때문에 공존할 수 없으며, 또한 호주사회에 통합되어 사는 이민자들은 한국인의 정체성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이 그룹에 속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1.5세대와 2세대 일 것이다.

이들은 한국의 법적, 문화적 시민권을 포기하고 호주의 그것을 쉽게 받아들인다. 호주의 메인스트림에 통합되기 위해서 노력할뿐더러,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이민국에 와서 새로운 사회구성원으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방법으로 간주한다.

194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실행되었던 호주정부의 공식적인 이민정책이었던 동화, 통합정책이 추구했던 태도가 바로 이 같은 접근이었다. 하지만, 의문점으로 제기된 것은, 특히 비영어권 출신의 이민자들이 얼마만큼 ‘호주화 된 교민들’로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경험으로 이것이 가능한가?

 ‘호주화 된 교포들’로 살아갈 것을 주장하는 이들은 말할 것이다: ‘호주사회에 이민 온 사람이라면 호주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민을 왔는가? 주인 된 나라에 충성심을 보여야 이민자 개인뿐 아니라 호주사회 전체가 번영, 발전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이다.

이 같은 태도가 유용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럽계 호주인이 득세하는 호주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타입은 한국인이 갖는 문화적 유산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국가는 이민자들이 깊숙이 동화되기 이전에 이민자들이 필요로 하는 정치, 경제적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이민자들을 포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3) 호주에 살지만 소속 없는 교포들

이런 타입의 교포들은 호주나 한국에 소속감을 갖고 있지 않을뿐더러, 소속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한 나라의 법적, 제도적 지원이나 정부가 개인의 열망을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무관심하다.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구화되어가는 지구촌에서 국가와 국가 간의 경계는 거의 무너져 가고 있고, 어느 제도나 국가에 소속되지 않고, 단지 세계의 시민으로 존재하길 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극히 개인주의적이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들을 도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같은 정체성이 한 개인의 입장에서나 정부의 입장에서나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그들은 단지 목적 없는 무정부상태와 혼돈을 옹호할 뿐이다. 지구화되어가는 오늘날이지만 국가 간의 경계는 그리 쉽게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 아니다.

 
 (4) 한국계 호주인

한국계 호주인의 정체성을 갖는 이들은 호주문화와 한국문화를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양국의 문화를 높이 평가한다. 그들은 유럽계 호주사람들만큼 지배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할 수도 있고, 호주사회에 항상 강한 소속감을 갖지 않을 수도 있으며,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과 같은 정체성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계 호주인’이 한국을 최근에 떠났든 오래전에 떠났든 무관하게 말이다. 또한 호주태생의 ‘한국계 호주인’이라도 호주사회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의 일부분만을 높이 평가하고 수용할 수 있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부족한 호주인’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한국계 호주인의 정체성을 옹호하는 이들은 ‘해방적 국경초월주의’(liberating transnationa- lism)를 환영할 터인데, 이는 법적시민권과 문화적 시민권이 반드시 경쟁 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는 한국의 시민권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도 있고, 한국사회보다는 호주사회에서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한국계 호주인의 정체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아마도 다수의 호주교포와 그들 후손이 가진 정체성으로 대표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정체성이나 각 개인의 ‘민족성’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일뿐더러, 적어도 위의 네 가지 타입을 끊임없이 오가는 것임을 지적해 두고 싶다. 한 개인의 정체성이 형성되었을지라도, 그 정체성은 끊임없이 수정되고, 변화되고 또 재변형됨으로써 그 정체성에 포함된 독특한 한국적인 민족성도 계속해서 변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경험을 보더라도, 내가 추구하고 싶은 정체성도 지난 20여 년간 끊임없이 변화하였음을 깨닫게 된다. 한국사회의 어떤 문화적 특징은 나의 정체성에 깊이 반영되기를 원하는가 하면, 어떤 측면은 깊이 반영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호주 문화의 특성에 관해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예를 들면, 호주에서의 처음 몇 년 동안은 한국에 대한 나의 관념을 대폭 수정했어야만 했다. 사회학도로서 나는 한국사회가 가진 문제들을 비교적 깊이 있게 파악한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고, 한국사회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 관점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같은 과정은 내가 과거에 가졌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나의 정체성을 ‘호주사람’으로서의 정체성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주사회는 흠잡을 만한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간주되는 것은 당연하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호주사회가 지상천국으로 이해되기도 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의 주제는 아이들의 정체성인데, 아이들의 정체성은 부모의 정체성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임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부모님이 한국말도 잘 안 하고 한국사람들을 피하고, 김치 안 먹고 서양문화와 서양사람들만 존중하고, 한국사회에 대해서 늘 비판적인 경우를 보았다면 그아이들을 보자. 그 아이들도 그 부모를 거의 닮아있다.

반면에, 호주에 살지만 ‘호주놈들이 이렇고 저렇고’ 늘 불평하고 회의적이고 한국사회가 최고이고, 우리가 언제나 한국에 가서 살 것인지 자식들과 고민하는 가정을 보았는가? 그 아이들을 보면 그들 부모와 많이 닮아있음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아이들은 부모를 모방한다.

한국사회와 호주사회의 실상은 어떤가? 두 사회 모두가 사회경제적으로 잘사는 풍요로운 사회이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호주사회가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것이 많다고 판단해서 호주에 살고 있다. 그렇다고 호주는 천국인가? 한국사회는 어떤가? 한국이 선진국대열에 들어가긴 했는데, 좀 더 격식을 갖추려다 보니 ‘부작용’이 그치질 않고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도 20여 년 전의 한국이 아니다. 호주보다 앞서 가는 면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두 사회가 가지는 긍정적인 면에 대하여 먼저 강조점을 두고, 더불어 두 나라의 문화가 가지는 취약점에 대하여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적어도 내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두 나라의 문화가 가진 강점들이 전수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모 된 우리가 취해야 할 접근은 아이들을 100% 호주사람이면서 100% 한국사람으로 키우도록 애쓰면, 궁극적으로 아이들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 것인지는 아이들의 몫이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성장하는데 여행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왜 그럴까? 예를 들어 한국 사람이 유럽여행을 가면 한국인으로서의 정서와 지식에 알파를 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를 1차원이나 2차원이 아닌, 3차원 또는 형이상학적인 방향으로 정체성을 키워줄수록 너그러운 인격 또는 정체성을 갖게될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계속>

 

한길수|사회학 박사, 모나쉬 대학교 언론 정보학과 교수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