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남기고 간 재산은 담요 반장·쌀 두 홉

77주기 서서평 선교사…호신대 선교사 묘역서 추모예배

정윤석/교회와신앙 | 입력 : 2011/06/29 [09:13]
   
그녀가 죽을 때 남기고 간 전 재산은 담요 반장, 쌀 두 홉과 7전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광주 사람들은 물론 일본인들마저 성녀로 부를 정도로 경외의 대상이었다. 32살 처녀의 몸으로 대한민국에 선교사로 입국했다가 54살의 나이로 별세한 고 서서평 선교사(독일계 미국인, 본명 엘리자베스 쉐핑)의 77주기 추모예배가 호남신학교에 위치한 선교사 묘역에서 6월 26일 주일 오후 3시에 진행됐다.

호남신학대학교 차종순 총장은 “쉐핑이 미국 남장로교 간호선교사로 파송되어 광주에 왔으며, 한국 어린이 14명을 양자로 키웠다”며 “그녀는 고아들의 어머니였고, 간호사 사역의 주춧돌이었으며, 전도사로서 교육자로서 신실한 신앙인으로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갔다”고 서 선교사의 약력을 보고했다.

설교를 맡은 백경홍 목사(광주제일교회)는 “한국교회에 서 선교사님과 같이 예수님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야 한다”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예수 닮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를 준비한 양국주 선교사는 “올해는 서 선교사가 우리 곁을 떠난 지 77년이 되는 해”라며 “요즈음처럼 먹고 살기가 넉넉한 시대에 살면서 서서평을 그리워하고 그녀를 기리는 것은 예수처럼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의 올곧은 모습을 그녀에게서 발견하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양 선교사는 “아름다운 선교사 서서평을 그리워하고 그녀가 남기고 간 족적을 되새기자”며 “그녀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예수 닮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서평 선교사는 군산과 서울 세브란스에서 간호선교사로 수년간 일했지만 그녀의 생애 마지막 17년간을 광주에 머물며 사역했다. 서 선교사는 광주와 제주 추자도 등지에 교회를 개척하고 1922년에 조선 최초의 여자 신학교 ‘이일학교’를 세웠다.

같은 해 서 선교사는 ‘부인조력회’를 시작했는데 이는 오늘날 여전도회의 근간이 됐다. 이듬해 조선에서 간호부를 조직하여 1926년에 설립한 조선간호부회가 오늘날의 대한간호협회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십일년간을 섬기면서 국제간호협회에 나라 잃은 조선의 국제적인 관심과 협력을 이끌어 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역 이외에도 그녀의 관심은 늘 버림받은 고아와 가난한 과부에게 쏠려 있었다. 특히 당시 전국에 3만 명에 이르던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헌신은 아직도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500명의 한센병 환자를 이끌고 서울 총독부까지 대행진을 통해 병들고 소외 받던 이들의 인권을 위한 헌신으로 그녀는 오방 최흥종 목사와 더불어 ‘한센환자의 어머니’로 불린다.

그녀 스스로 한센병 환자 어린이를 자녀로 입양했고 싱글로 와 있던 선교사들에게 한센병 어린이들을 입양하도록 주선했다. 매일 먹는 밥상에서 가난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모아 주변의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로 시작한 성미제도는 조선예수교장로회의 공식사업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끊임없는 서서평의 관심은 결국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 탓에 영양실조로 죽게 되는 가슴 아픈 종말을 보게 된다. 광주 시민들과 일본인들은 광주 최초의 10일간의 시민사회장으로 그녀를 떠나보낸다. 그녀의 장례가 10일장이었던 이유는 장기마저 세브란스에 기증했던 탓이다. 자신의 오장육부를 드러내고 그 빈자리에 짚을 채우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출처ㅣ정윤석/교회와신앙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