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맛보아 아는 예배자

“누구인줄 알았더라면”(요한복음 4:7~12)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10/31 [17:38]
야곱의 우물 곁에 앉아계신 예수님은 때마침 물을 긷기 위해 우물을 찾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며 부탁의 말씀을 건네셨다. 그것은 전혀 일어날 수 없는 파격적인 언행이셨다. 놀랄 일은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번 결혼에 실패한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자기 동족들도 상대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유대인이셨던 예수님이 말을 건네오신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에 사마리아 여인은 너무도 놀라 “어찌하여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외쳤다. 그것은 감격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자기 눈 앞에 있는 예수님이 진정 누구인지는 몰랐다.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10절). 이 여인은 왜 예수님을 몰랐을까? 평소 예수님과 일면식도 없었기 때문에? 물론 예수님을 처음 본 것이 맞다. 그러면 반대로 예수님을 오랫동안 알았다고 해서, 예수님의 진정성을 알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어릴 때부터 30세가 되기까지 사셨다. 그러면 이 땅에서 33년을 사셨던 예수님과 가장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나사렛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권능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기만 할 뿐 예수님이 누구인 줄은 몰랐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며 예수님의 진정성을 알아보지 못했고,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그들의 인생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해도, 예수님이 누구인 줄 모를 수도 있다. 모태신앙으로 교회를 다니고 또 20년 30년 교회를 다니면서도, 내가 예배하는 주님이 누구인 줄 모른다면, 그 세월이 얼마나 아깝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라고 하셨다. 남보다 먼저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인 줄 몰라서 나중 된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지식이 아니라 믿음이다

우리는 또 사마리아 여인이 왜 예수님이 누구인 줄 몰랐을까?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물론 그럴 수도 있다. 성경을 몰라서 자기 눈으로 보고 있는 예수님이 누구인 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을 안다고 해서 반드시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어느 집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도 찾아왔다.그때 중풍병자를 메고 온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너무 많은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 앞으로 다가갈 수가 없자 지붕을 뜯고 중풍 병자를 침상에 달아 내렸다.

그 중풍병자를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눅 5:20-24). 그때 함께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눅 5:20)라며 수근거렸다.

서기관은 율법학자로 성경에 대해 정통하고 박식한 사람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오경에 기록된 613개 달하는 율법의 잣구까지도 외우고 있던 성경의 대가들이었다. 당연히 누구보다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도 밝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들 앞에 계셨던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성자 하나님인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서도 말씀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을 많이 알고 신학에 정통했다고 해서, 반드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침상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는 어떠한가? 중풍병은 부정한 병이었기에 사람과의 접촉을 금했다. 따라서 중풍병을 앓고 난 이래로 성경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거의 전무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성경에 대해서 문외한이었던 중풍병자였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많은 인파가 보는 앞에서 침상에 매달려 내려올 수 있었다.

예수님도 그의 믿음을 보셨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있던 그의 믿음을 보셨다. 그래서 그의 죄와 병을 사하시고 고쳐주셨다. 중풍병자는 누워있던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루 온종일 침상에 누워 꼼짝도 할 수 없던 그가, 이제 자신의 두 발로 그 지긋지긋한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예수님이 누구인 줄 몰랐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을 알되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신학이 있어도 믿음이 없다면 허탕이다. 한 말씀을 들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한 절을 읽어도 믿음의 눈으로 읽을 때 그 말씀이 살아 움직이고, 내 인생을 바꾸고, 내 삶을 새롭게 할 수가 있다.

 
생수만이 살 길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갈증은 단순히 육신의 목마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목말라 했다. 여러 번 결혼에 실패한 상처 때문에 목말라 했고, 사랑에 목말라 했고, 기쁨에 목말라 했다. 그녀는 목마름을 해결하지 않는한 그녀의 삶은 결코 새로워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물을 찾고 또 찾아 보았지만 그녀의 목마름은 도무지 해결되지 않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우물을 찾아다닌다. 때로는 세상의 물질일 수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다. 또 사람일 수도 있다. 그것들만 있으면, 그 사람만 있으면 우리의 목마름이 해결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아무리 많은 물질로도 우리의 깊고도 깊은 영혼을 다 채울 수 없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라도 언젠가는 쓸쓸히 퇴장할 때가 오고, 아무리 높은 명예라도 세월 앞에서는 빛이 바라기 마련이다. 또 죽도록 사랑하던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이별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영혼이 메말라 가고,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 받고,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 하고, 교회를 다녀도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는 까닭도 내 영혼에 생수가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의 목마름도 그리고 우리의 목마름도, 오직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로만 해결될 수 있다. 생수만이 우리의 삶을 치유하고, 사랑의 필요를 채워주고 영원한 기쁨을 줄 수가 있다. 생수만이 살 길이다. 

 
예배, 예수님을 맛보아 아는 것

우리의 예배가 진정 벅찬 감격과 은혜를 누리려면 그 생수가 흘러넘쳐야 한다. 찬양 가운데, 기도 가운데, 말씀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어지는 생수가 흘러들어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때에만 가능하다.

시편 34:8에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하나님을 맛보아 알아야 진짜 알 수 있다. 맛보는 것은 먹는 것이다. 먹는 것만큼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것도 없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지식으로 신학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 먹어봐야, 내 삶으로 경험하고 맛볼 때, 하나님의 진정성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하더라도 내가 맛보지 못한 하나님이라면,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오늘부터 하나님을 알아야지 결심하고 머리에 띠 두르고 구호를 외친다고 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먹어보고 맛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예배는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맛보아 아는 것이 참다운 예배다. 예배 가운데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자, 그 사람만이 진정으로 생수의 기쁨을 누리는 예배자가 될 것이다.〠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blog.daum.net/goodseedchurch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