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청년

정기옥/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2/27 [12:04]

아름다움을 생각할 때 나는 때때로 젊음을 생각하곤 한다. 청년의 시기는 모든 것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청년의 무모함과 저돌성도, 그 시절의 그 싱그러운 건강미도,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처녀림도, 심지어 젊은 날의 고뇌와 방황조차도, 모두가 아름답다.

특별히 젊음이 아름다운 것은 젊음만이 발산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과 정의감이다. 간혹 청년들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얼굴이나 몸매 같은 외형에만 집중하는 것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것들 외에도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이 그들 속에 있는지를 정작 자신들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예전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실화에 근거해서 만들었는데 영화를 개봉했을 때 그 영화는 남루한 노동자의 때 묻은 옷깃과 한 젊은이의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순수한 공감이 눈물이 나도록 아름답다는 진실을 온전히 드러내는 수작이었다.

<전태일 평전>에 나타난 그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고로 인해서 자연히 다른 감정에도 잘 동화되며 남자인 내가 불쌍한 광경으로 인해서 코언저리가 시큰할 때가 많으니까 말입니다.” 모진 사람이 생각할 때는 어리석고 유약해 보이는 전태일의 불쌍한 사람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공감 능력이야말로 전태일을 아름다운 청년이 되게 하는 절대요소이다.
 
얼마 전에는 <그 청년 바보 의사>라는 책을 통해 소개된 예수님의 흔적을 쫓아 달려가다가 예수님과 같은 서른셋의 나이에 주님 품에 안긴 안수현이라는 아름다운 청년의사가 있었다. 그가 아름다운 것은 다른 의사들보다 의술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가 마음에 담고 있던 생각과 행동으로 옮겼던 삶의 족적들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불안과 고통 중에 있는 환자들에게는 언제나 따뜻하고 친절하게 정성을 다해 주며 가능한 모든 순간을 그들과 함께 해주었다. 마치 우리처럼 되셔서 우리 중 하나가 되어 주신 예수님처럼 동행함으로 환자들을 이해하며 위로한 것이다. 삶을 가장 아름답게 하는 것이 사랑인데 그 사랑은 그들 속으로 자신을 이끌고 들어가 현재를 함께 지내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환자의 곁에 있음으로 자신이 의사됨의 확신하고 그들의 숨소리와 고통소리에 동참했다.  

이런 청년들의 순결한 헌신의 아름다움은 참된 아름다움에 목마른 영혼들의 숨결을 사로잡고 우리네 인생을 뒤돌아보게 하는 사색의 창가로 인도한다. 무시와 무관심, 심지어는 정죄와 판단이 파도치는 이 무정한 시대에 우리 중 누가, 누군가의 <주홍글씨>를 끌어안고 그와 함께 하면서 조건 없는 사랑과 교제의 악수를 청할 것인가!

전태일은 세상을 떠나면서 "엄마, 내가 죽어서 캄캄한 세상에 좁쌀만 한 구멍이라도 뚫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넓혀가야 해요."란 유언을 남겼다. 그 유언을 간직한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그렇게 살다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들이 있는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갔다.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믿는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칠천 명의 하나님의 사람이 아합의 시대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 삶의 현장 곳곳에 하나님의 은혜로 숨겨져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왕상 19:18)

내가 아는 J라는  청년이 있다. 그 청년은 예수님께 헌신되어진 좋은 그리스도인이고 소위 호주에서는 일류라고 말할 수 있는 탄탄한 학력과 미래, 게다가 멋진 외모를 갖춘 재원이라면 재원이다. 그만하면 괜찮은 청년인데 그 청년을 더 아름답게 하는 것이 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 청년은 토요일이 되면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별한 곳을 가서 특별한 사람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전도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한 유학생 청년 P가 순간의 실수로 죄인이 되어 2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한국에 있는 그 P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그가 그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부끄러워 알리려고 하지도 않았고 멀고 먼 이국땅에서 그를 아는 사람도 실상 없었다. P를 지극히 사랑하는 가족들도 경제적 형편으로 인해 그를 찾아 볼 길이 없었다. 게다가 호주에는 단 한 명도 그를 진심으로 돌아보고 함께 하며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변호사는 돈을 받은 만큼만 사무적으로 행동을 했고 정부에서 고용한 그곳을 드나드는 상담가나 복지부 직원들은 형식적이었다. 이 청년 P에게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 청년 J가 있었다. 법이 허락하는 격주 토요일이 되면 J는 분주한 삶이 더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2년 동안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날은 P와 함께 하기 위해 그곳으로 달려갔다. 자유를 잃고 갇혀 있는 그 P에게 유일한 외부와의 창문은 바로 이 청년이었다.

혹 피치 못 할 사정으로 한 번을 거르면 P는 한 달 동안 외부 사람을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외롭고 답답하게 보내야 했다. 그런 때면 P로부터 J에게 전화가 걸려오곤 했다. P에게는 J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그 청년 J는 면회가 허락되는 날이 되면 거의 매번 그곳으로 달려갔다. 2년을 그렇게 한 것이다.

많은 돈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돈도 써야 했고 소중한 시간과 조건 없는 사랑과 돌봄이라는 값 비싼 감정을 투자해야 했다. 하지만 J는 불평의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P를 찾았다. 만날 때마다 두 사람은 함께 말씀을 묵상했다. 아무런 것도 면회 장소에 지참 할 수 없는 법적규칙 때문에 두 청년은 말씀을 암송한 후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었다. 어떻게 말씀대로 살아갈 것인가를 놓고 함께 고민하고 현재와 미래를 놓고 함께 기도했다.      

 며칠 전 청년 J는 마지막으로 P를 만나고 왔다. P가 만기를 채우고 출소하게 된 것이다. 이제 J가 한국에 가지 않는 이상 두 청년은 다시 만나기가 쉽지 않다. P는 규정상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이민국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공항을 거쳐 바로 한국으로 출국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청년 J를 바라보며 가슴에 와 닿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 이게 아름다움이구나! 아름다운 청년, 이 청년은 아름답구나! 목사인 나에게 P로부터 전화가 왔다. P의 어머니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J에게 감사한다고. J는 아름다운 청년이라고. 가슴이 가득 차 온다. 뱃전을 때리는 갈릴리의 물결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살며시 영혼의 해변으로 밀려온다. 충만해 진다.

"이에 의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된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을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마 25:37-40) 〠

 

정기옥|안디옥장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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