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사는 영혼 사랑의 승부사

맨땅에서 맨몸으로 교회 개척, 신자 3만을 이룬 꿈의 스토리

글|윤석진,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2/27 [12:12]

‘소명’과 ‘열정’으로 똘똘 뭉쳐진 소강석 목사. 신자 3만 명이 다니는 죽전의 초대형 새에덴교회를 이끄는 목회자다. 사회 사역에 더 열심이고, 작은 교회 살리는 운동에 앞장서는 개신교계의 드문 지도자이기도 하다. 

 
▲ 2012 시드니성시화대회 주강사로 초청받은 소강석 목사.지난 해 오세아니아성령대성회 인도차 시드니를 방문하고 오페라하우스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크리스찬리뷰


‘맨발의 소명자’. 새에덴교회 소강석(蘇康)錫·51) 목사를 가리키는 별칭이다. 소 목사가 1997년 초판을 펴낸 자서전의 제목이기도 하다. ‘맨주먹 맨몸으로 몸부림친 무일푼 개척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책 표지에는 이런 설명도 곁들여져 있다.

 “가진 것이라곤 3M(맨손·맨몸·맨땅) 밖에 없어/울부짖는 기도와 불타는 열정만으로/교회개척을 시작하였다…”

이 짧은 글 속에 ‘소명’과 ‘열정’으로 똘똘 뭉쳐진 목회자의 삶이 함축돼 있다. 개신교계에서는 그를 가리켜 ‘소명 덩어리’로 부를 만큼 소명의식이 충만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새에덴교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자리했다. ‘3만 성도’가 ‘성전’으로 삼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형 교회’다. 이 교회의 외양은 거대한 성채를 연상케 한다. 6,600m2(2000여 평)가 조금 넘는 대지에 지하 3층, 지상 10층, 연건평 3만 3,000m2(1만여 평)다. ‘프라미스 콤플렉스’로 불리는데 ‘약속의 복합 건물’이란 뜻이다. 주변에 즐비한 아파트 단지들 사이에서 웅장함으로 단연 돋보인다. 소목사의 공식 직함은 이 교회의 담임 목사다. 

 
양들 사랑이 유별난 하나님의 종

개신교계 한 ‘목회자 미담 사례집’에는 그를 “희망을 보며 말씀을 전하는 타고난 목자”로 소개했다. ‘양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유별난 종’이라고도 했다. “어떤 환경에서도 결코 낙망하지 않는 목회 열정은 신학생들에게 큰 희망이 되고 있다”는 평가도 뒤따른다.

2008년 12월호 <시사저널>은 그를 ‘기독교 차세대 리더’로, 2009년 <목회와 신학>에서는 ‘10년 후 한국교회를 이끌어 갈 목회자’로 각각 선정했다.   

▲ 강의식으로 말씀을 전하는 소강석 목사     ©크리스찬리뷰

 
교회 입구 출입문마다 ‘사랑하며 섬기는 교회’라는 문구가 있었다. “제가 목회를 하는 교회는 파당이나 싸움이 없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소 목사는 말했다. 

“제가 신학대에 다닐 때부터 다투고 싸우는 교회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미래 교회상을 자주 연상해 봤죠. 정말로 ‘사랑하고 섬기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가르침”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저명한 사상가인 프랜시스 후쿠야마(존스홉킨스대 교수)의 유명한 저서 ‘역사의 종말’을 끄집어냈다.

“그 책에 ‘역사가 성숙해 질수록 섬김의 나라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란 대목이 나옵니다. 나라뿐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고 섬기는 일은 시대 정신과도 맞아 떨어지는 얘기죠.”

소 목사는 시대의 트렌드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다. 소 목사는 “사람은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말로 그 설명을 대신했다. 이를 바탕으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필요한 변화를 계속 도모해왔다. 목회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교회에서도 과거에는 용광로적 마인드로 목회를 했어요. 목회자가 카리스마를 가지고 ‘따라오라’는 식이었죠. 그것을 소위 ‘용광로 목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샐러드 목회’를 해야 합니다. 샐러드 속 야채의 개성을 그대로 살리되 드레싱을 통해 조화로운 맛을 내야지요. 목회를 할 때도 각자 개성과 차이를 존중하는 이런 샐러드 마인드를 가져야 합니다.”

 
‘샐러드 목회’와 ‘혼창통 목회’로 화제

그렇다 해서 “본질이 희석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내 중심을 분명히 하면서 남을 인정하고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면서 화음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파당이나 다툼이 없다”고 소 목사는 자랑했다.   

소 목사 말대로라면 이런 대형교회에서 내부 파벌이나 갈등이 없다면 한국 사회에서는 드문 일이다. 그런 교회는 특별한 리더십이 작동해야 가능하다. 소 목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결국 정신이 중요합니다. 최근에 나온 ‘혼(魂) 창(創) 통(通)’이라는 책에서 말했듯이 혼입니다. 교회 언어로영성(靈性)이죠. 그 영성이 기본이 되고 인프라가 돼야 합니다. 물론 사람이기 때문에 경쟁이 없을 순 없겠죠. 그 과정에서 영성만 제대로 갖춘다면 서로 개성과 차이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다툼의 요소가 아니라 창의력으로 연결됩니다. 우리 교회는 복음의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성도들끼리는 물론 나아가 사회와 소통의 다리를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 희로애락의 다양한 표정을 담고 있는 소강석 목사의 모습     ©새에덴교회
소 목사는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기독교 신앙에 눈을 떴다. 그가  군산제일고 2학년 때 교회 문턱을 처음 넘었다. 군산 명석교회(현 사랑의 교회 전신)였다. “예쁜 여학생을 소개해 주겠다”는 한 후배의 말에 솔깃했기 때문이다.

1962년생인 소 목사의 고향은 전북 남원의 지리산 자락이다. 그 시절 시골이 보통 그랬듯이 그의 집안도 완고한 유교 가풍을 지녔다. 아버지는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집안 분위기 때문에 교회 다닐 엄두조차 내기 힘들었다.

그런데 ‘늦바람’이 더 무서웠다. 소 목사는 “모든 예배 참석은 물론 새벽기도까지 다녔다”며 “찬송가를 얼마나 열심히 불렀는지 교회 출석 한 달여 만에 100여곡이나 익혔다”고 말했다. 그때 “불가항력적이고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소명을 입었다”고 소 목사는 말했다. 그리고 목회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굳힌다.

▲ 새에덴교회 본당의 예배장면. 4,500석 규모로 건물 전체 크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새에덴교회


그런데 부모형제들이 하나같이 교회에 다니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학업을 소홀히하는 모습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회초리까지 들면서 교회 다니지 말라며 엄하게 꾸짖었다. 그런데 소 목사는 “일편단심의 믿음을 주님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며 고집을 세웠다. 말리다 못한 소 목사 부모는 끝내 “내 자식이 아니다, 차라리 집을 나가라”고 선언해 버렸다. 

“사실상 집에서 쫓겨난 셈이죠. 그때 완고한 부모님이었지만 자식으로서 제가 졌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좀 더 융통성 있게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부모도 모두 나중에는 개종해 교회를 다녔다. 그리고 임종에 이른 부모는 똑같이 “귀한 아들 덕분에 예수님을 믿고 천당가게 됐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광주사태 겪으며 영적 도전정신 체득

18세 되던 해 겨울, 집을 나온 소 목사는 가까운 대도시인 광주로 향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는 도청 소재지인 전주나 서울로 가지 않고 광주로 간 까닭도 종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해석한다. 1980년 이른 바 ‘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를 그는 현지에서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그는 “야생마 같은 영적 프론티어 정신을 갖게 됐다”고 고백했다.

이미 목회자가 되겠다는 꿈을 굳힌 뒤였으므로 ‘무작정’은 아니었다. 얼마 동안 헐벗고 굶주린 떠돌이 생활을 하다 당시 광주신학교(현 광신대 전신) 신학과에 입학했다. 그 시절에도 “돈만 있으면 먼저 책을 사보고 꿈을 키웠다”고 소 목사는 말했다. 그 꿈이 소 목사의 표현으로는 ‘한국 교회의 부흥’이었다.

소 목사는 그 꿈을 이루고자 크게 4번의 교회 개척에 나섰다. 전남 화순군 능주면, 서울 송파구 가락동,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등이 소 목사의 교회 개척 경력이다. 그리고 2005년 10월 앞서 말한 죽전에서 그 꿈이 결실을 이뤘다. 교회 개척 때마다 크고 작은 시련이 쓰나미처럼 닥쳐왔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굴하는 법이 없었다.

“시련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선한 길로 인도하기 위해 담금질하시는구나 하고요.”

▲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라는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소강석 목사가 시드니 하버브릿지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    ©크리스찬리뷰


소 목사는 특히 화순에서 온갖 역경과 척박한 현실을 이겨내고 교회 개척에 성공을 한다. 그가 스물네 살이던 신학교 2학년 2학기 때 일이다. 그가 선택한 백암리는 주변에 300호 정도의 집이 있는 시골로 물론 교회는 없었다. 그때까지도 반상(班常)의 구별이 있었고, 텃세가 심해 타관 사람이 들어와 살기 힘든 동네였다. 개척자 입장에서는 신앙의 황무지 같았다. 그런 곳을 신앙의 옥토로 바꾸는, 무모하다 싶은 도전에 나섰다. 

몇 년째 비어 있던 헛간을 빌려 교회 문을 열었다. 겨울방학 내내 축호(逐戶) 전도를 벌였다. 축호란 ‘집집마다’라는 뜻으로, 가정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전도했다. 그런 각고의 노력 끝에 주일에 앉을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신자들이 급격하게 늘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교회가 불같이 일어서자 마을에서는 조직적인 핍박이 여러 갈래로 시작되었다. 그는 당시 마주쳤던 이런 고난의 언덕에서 골리앗 앞에 선 다윗 같은 심정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마침내 예배당 건물을 짓고 ‘백암교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말 그대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한 외로운 교회 개척자의 피와 땀과 눈물이 합쳐져 이뤄낸 승리였다.

“그때 만약 제가 실패했으면 그 꼬리표가 제 마음 속에 영원히 따라 다녔을 것입니다. 소명 의식과 기도, 그리고 은혜의 정신만 살아 있으면 어딜 가서 무엇을 해도 승리한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제가 비록 가진 게 없고, 나아가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말입니다. 그런 확신이 저의 평생 재산이 됐습니다.”

그는 요즘도 ‘확신’의 가치를 전파하는 전도사 역할을 자임한다.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안의 확신이 가장 중요합니다. 모든 CEO도 마찬가지죠. 회사에서는 기업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 경영자의 경영철학으로 표현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소명’이라고 하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입니다. 그 바탕 아래서 꿈도, 비전도 생겨납니다. 그걸 향해 무한도전을 하죠. 그래서 지금도 제자들 교육 때 그 확신의 중요성을 늘 강조합니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그는 서울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꿈을 꾸게 된다. 1983년 광

▲ 제5회 한인의 날(2011. 10.5)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한 소강석 목사.          ©새에덴교회
주신학교를 졸업하던 해의 결심이었다. 당시에도 물론 ‘확신’ 이외에 가진 것 없는 ‘3M’ 신세였다. 서울의 교회 개척지로 처음 선택한 곳이 서울 송파구 가락동이었다. 76m2(23평)짜리 건물 지하였다. 1,000만 원 보증금에 월세 48만 원도 버겁게 느껴질 만큼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이것이 새에덴교회의 시작이었다.


“목회자로서 제 인생에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서울은 오뚝이 정신만 가지고는 교회 개척이 어렵습니다. 제가 우선 서울 문화를 잘 모르고, 시작할 때 교회 신자라고는 가족 이외에는 없었으니까요.”

교회 문은 열었지만 구원의 손길 하나 내밀기 힘든 바다나 사막 한 가운데 놓인 듯했다. 이때 소 목사의 승부 기질이 빛을 발한다. 소 목사는 그때를 돌아보며  “영혼 사랑의 승부사가 된 것 같다”고 술회했다. 여기서 소 목사가 말하는 ‘영혼’은 당연히 사람이다. “열댓 개밖에 안 되는 교회 의자를 붙잡고 울면서 기도했어요. ‘제발 사람 좀 보내 달라고요.”

하지만 좀처럼 사람이 모이지 않았다.

“개척교회에는 대부분 상처받고, 문제 있는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다 안정을 찾으면 떠나버리기 일쑤입니다.”

 
떠나는 신자 앞에서 <가지 마오> 노래

떠나는 교인들이 생겨날 때면 소 목사는 그들 앞에 서슴 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바지와 치마를 붙잡고 느닷없는 유행가를 부르곤 했다. 나훈아의 <가지 마오>라는 노래였다. 목회자의 체면을 벗어던진 간절한 호소에 감동을 받은 일부 교인들은 발길을 되돌리기도 했다.    

“하나님이 그때 아마 제 기도에 감동해서 얼마간의 사람이라도 보내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점차 신자들이 늘어 교회 개척 4년째가 되었을 때 300여 명에 이르렀다. 예배당도 396m2(120평)로 10배 가까이 커졌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전도를 하고, 발버둥을 쳐도 그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었다”고 했다.     

교회가 도약하려면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소 목사는 다시 한 번 모험에 가까운 도전을 한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으로 이전한 것이다. 당시 분당은 막 자리잡기 시작한 신도시였던 까닭에 개척교회 입장에서는 일종의 무주공산 같은 곳이었다. 그런 만큼 각 교회의 경쟁 또한 매우 치열했다. 개신교계에서 ‘별들의 전쟁터’로 부를 정도였다. 

▲ 제61회 한국전 미국 참전용사 보은행사에서 참전용사에게 감사하는 소강석 목사(워싱턴DC, 2011. 6.22)                 ©새에덴교회


상가에 세를 드는 이른바 ‘상가(商街) 교회’부터 벗어나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새에덴교회의 구미동 시대는 쉽게 열리지 않았다. 정부 측의 실수로 얽힌 대체 부지 마련, 민원으로 따른 공사 중단, 공사 중간 시공사의 부도 등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마침내 3년 만인 1996년 11월 소 목사로서는 그야말로 ‘감격적인 입당 예배’를 보았다. 새에덴교회는 분당에서 신자들이 5,000여 명으로 늘어나는 큰 부흥을 이루게 된다.

죽전 프라미스 콤플렉스는 새에덴교회 대도약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른바 ‘대형 교회’란 평가도 여기서 시작된다. 건축 계획을 세우던 초기에 “너무 크게 짓는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내부에서 제기됐다. 이런 의견을 들어 애초 구상보다 작게 지었으나 소 목사는 지금도 조금은 아쉽게 여긴다. 예배당 본당은 4,500석 정도로 본당 중심의 다른 대형교회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대신 교육관·문화관·예술관 등 부대시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프라미스 콤플렉스의 또 다른 특징이다.

소 목사는 새에덴교회를 한국의 ‘영적(靈的) 장자(長子)교회’로 키우고 싶은 소망을 숨기지 않는다. 장자는 ‘맏이’를 뜻한다. 새에덴교회는 역사가 아니라 교회 역할에서 ‘맏이’가 되고 싶다는 뜻이다. 

소 목사는 ‘영적 장자교회’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목회적 대형 교회’를 표방한다.

“큰 교회가 되면 종종 본질과 본연의 소명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을 닮아가거나 교회 자체의 부흥과 성공을 추구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교계에서는 이런 교회를 ‘세속적 대형 교회’로 부릅니다. 목회적 대형교회는 목회라는 교회의 본질을 중심에 두고, 나아가 대형교회만이 가능한 역사와 사회에 대한 소명을 다하자는 의미입니다.”

소 목사는 새에덴교회의 그 연장선에서 ‘지역 사회를 섬기는 교회’ ‘자녀 교육에 힘쓰는 교회’ ‘통일 한국시대 지도자를 키우는 교회’ ‘세계 복음화를 선도하는 교회’ 등 크게 4가지 비전을 제시했다. 비전마다 교회의 본질에 해당하는 요소는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교회치고는 파격적일 만큼 내용이 개방적이고, 유연하게 대처한다. 교회의 오랜 ‘엄숙주의’ 옷을 과감히 벗어던졌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통 큰’ 접근법을 구사한다.

“우리는 교회 자체의 부흥만을 교회 역할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사와 민족, 사회를 섬기는 것이 교회 비전의 큰 방향입니다. 이른바 사회 사역에 힘씁니다.   이는 일종의 사회 환원이고, 더불어 살자는 차원입니다. 그런 비전에 교회 당회와 신자들이 공감을 하고 함께 해줍니다.”

 
영적 장자 교회의 꿈 

새에덴교회는 비전을 실현하려고 ‘헌신적 노력을 기울인다’고 소 목사는 말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라는 비전이며 이를 위해 새에덴교회는 대문부터 활짝 열어 젖히고 문턱을 낮췄다. 그리고 지역사회 문화센터로서, 친근한 생활·휴식 공간으로 역할을 자임했다.

▲ 2011 송구영신예배에서 환호하는 성도들과 소강석 목사     ©새에덴교회


‘레인보우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새에덴교회에서 1년에 두 번씩 열리는 대중문화 공연은 그 일환이다. 지금까지 퍼포먼스 무대 <점프>, 클래식 콘서트 <명품> <난타> <웃찾사> <맘마미아> ‘윤도현 밴드’ 공연이 교회 무대에 올려졌다. 노인 대상의 ‘실버 스쿨’도 지역 사회에서는 큰 인기다. 이런 행사들은 교회와 지역사회가 소통하는 소중한 기회가 된다. 행사 때마다 소 목사는 지역 주민들에게 “교회에 자주 놀러 오시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보내기 바란다”는 내용의 인사말을 잊지 않고 건넨다.

‘자녀 교육에 힘쓰는 교회 ’비전을 소 목사는 미래를 위한 투자로 여긴다. 소 목사는 ‘최고급 교육 시설’ ‘차별화된 교육 컨텐츠’ 제공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현장 교육도 실천한다. 특별히 그는 고난의 역사 교육을 강조해왔다. 고난의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은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학생들을 인솔하여 남한산성·삼전도비·울돌목과 같은 우리 민족의 살아 숨 쉬는 역사 현장을 방문해 고난의 역사를 교육한다. 민족과 역사를 별로 의식하지 않았던 아이들도 소 목사의 역사 교육을 통해 나라 사랑과 역사의식을 가슴에 새기고 꿈을 갖게 된다. 소 목사의 투철한 역사관과 교육관은 통일한국 시대의 민족의 지도자 양성이라는 새에덴교회의 비전으로 연결된다. 현재의 교회 건물을 지을 때 본당 중심이 아닌 교육관 중심으로 지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 교회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는 현세 중심으로 운영됩니다. 그래서 교회 본당을 가장 중시합니다. 저는 본당 못지않게 교육관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미래 세대를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통일 한국 시대 지도자를 키우는 교회 비전’도 같은 차원이다. 소 목사가 이에 눈을 뜬 것은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다. 소 목사는 2001년 3월 평양을 방문했다. 평양 봉수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북한의 여러 지역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평양 창광유치원을 방문했을 때 소 목사는 남북통일에 대비한 인재 양성의 절실함을 깨달았다.

“우리 자녀들이 민족을 품을 수 있는,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을 말씀으로 훈련해 하나님과 민족을 섬기는 지도자를 기르는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영적 장자교회’를 지향하는 교회답게 새에덴교회에서 ‘세계 복음화를 선도하는’ 선교사 양성도 빼놓을 수 없는 목표 중 하나다. 소 목사는 “선교사를 많이 파견하고, 그들을 돕는 것”이라고 그 요체를 설명했다. 새에덴교회에서 현재까지 세계 70여 개국에 선교사를 파견했다. 소 목사는 앞으로 주요 선교 대상 지역으로 중국을 주목한다. 

 
사회적 책임 다하는 목회 지향
 
소 목사가 목회를 하면서 ‘민족’과 ‘국가’ 그리고 ‘애국심’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도 교계에서는 별난 점으로 꼽는다. 교회 정문에 무궁화를 심어 놓을 정도다. 무궁화를 보면서 교회를 오가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를 이끌고 갈 청소년들이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의식을 되새기길 바라기 때문이다. 목회 현장에서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의식을 강조하는 이유로 구한말 개신교가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 교회가 했던 역할을 소 목사는 상기시켰다.

“요즘 한국 개신교계는 개별 교회의 부흥에만 신경을 씁니다. 우리 역사와 사회를 돌보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 사회와 나라를 제대로 섬기려면 민족의 고난과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소 목사가 3·1절과 광복절에 개신교 차원의 집회에 앞장 서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2007년부터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 용사 초청 행사를 매년 한 차례씩 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행사는 기획부터 재정까지 모두 새에덴교회가 떠맡은 소목사의 작품이다.

이 행사는 대형교회가 섬김과 환원이라는 차원에서 사회적인 책임을 다했다는 이유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미 양국의 대통령이 축사를 보내올 뿐만 아니라 한미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하는 한미 우호와 협력의 장이기도 하다.

▲ 말씀 전하는 소강석 목사     ©크리스찬리뷰


소 목사의 이런 민간 외교 사역은 이제 글로벌 공동체를 향한 비전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는 또 2006년 2월 한일기독의원연맹(한국측 대표 김영진 의원, 일본측 대표 도이 류이치 의원) 지도 목사를 기꺼이 맡았다.

소 목사는 2011년 제92주년 3·1절 기념예배를 새에덴교회에서 드렸다. 한일기독의원연맹 일본측 대표인 도이 류이치의원은 매년마다 3·1절 기념예배에 참석해 과거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머리 숙여 사죄했다.

그런데 이번에 도이 의원은 한일공동선언문을 낭독했다는 이유로 민주당 원내 대표직을 사임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2007년, 2008년 두 차례에 걸쳐 세에덴교회에서 열린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한미동맹 증진을 위한 예배’를 직접 인도하기도 했다. 목사면서 동시에 민간외교관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소 목사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 1월 ‘마틴 루터 킹 퍼레이드 집행위원회’ 본부가 수여하는 국제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새에덴교회는 한미 외교뿐만 아니라 한일 과거 역사 청산과 창조적 발전에도 노력해왔다. 그가 이렇게 애국사역과 민간외교 사역을 펼치는 이유는 대형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환원을 지향하는, 더불어 사는(신공유적) 목회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소 목사의 차별화된 이런 리더십은 새에덴교회의 위상까지 바꿔 놓았다. 개신교계에서 새에덴교회의 영향력은 ‘수직으로 상승했다’고 소 목사는 평가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교회보다 큰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전통과 제도에 얽매여 규격화된 운영을 하고 있어요. 교회 성직자나 장로들의 눈치를 보는 ‘타협 목회’를 안할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가 ‘소신 목회’를 할 수 있어야 교회도 창의적 운영이 가능합니다. 다행히 우리 교회는 다른 대형 교회처럼 화석화된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도 시대 흐름에 발맞춰 변하지 않으면 시너지 효과가 분출되지 않아요.”               

 
더 낮은 자리, 상생의 리더십으로 

현재 새에덴교회에는 시무목사만 30명에 육박한다. 전도사는 좀 더 많다. 신자 분포도 새에덴교회 소재지인 용인을 중심으로 서울은 물론 성남·하남·이천·남양주·동탄까지 인근 지역에 넓게 퍼져 있다. 18개 교구로 나눠 관리해야 할 만큼 거대한 조직이다. 하지만 새에덴교회의 지교회(支敎會)는 한 군데도 없다. 속칭 ‘새끼교회’가 없다. 여기에도 소 목사의 ‘깊은 뜻’이 있다. 그는 어떤 면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었으나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 상생의 리더십을 추구한다.

“옛날 같으면 대형교회의 지교회운동은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대가 바뀌었어요. 상대적으로 작은 교회들이 죽는다고 이를 반대합니다. 같이 살자는 작은 교회들의 주장이 옳은 얘기 같아요. 그래서 우리 교회는 오히려 작은 교회를 살리는 운동을 합니다. 매년 우리 교회 주최로 열리는 생명나무 컨퍼런스가 바로 그것입니다. 2,000~3,000명의 목회자들이 모여 어떻게 하면 목회를 잘할 수 있을까를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소 목사는 훗날 ‘참 목사’ ‘참된 하나님의 종’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마지막에 덧붙였다.〠

*기사제공= 월간중앙 (2011년 4월 호 전재)

 

윤석진|월간중앙 전문기자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