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공 하나로도 선교가 가능합니다

카자흐스탄 장애인 체육회 국가대표 축구감독 이민교 선교사

글|송기태,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2/27 [12:18]
화장터와 소록도 
 
“선교사와의 만남은 세계여행과 같다”고 표현할 수 있다. 메마른 광야, 거친 들판 같은 현장에 대해 들려주는 말은 ‘여행’이라기보다 차라리 ‘탐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사건과 사연이 점철된 선교사들의 이야기들은 거대한 역사를 창조하는 다큐멘터리이다. 이번에 만난 이민교 선교사 또한 예외가 아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의 스토리를 만들어내며 메마른 광야 거친 들판을 질주하고 있는 선교사이다.   

▲ 골수 원불교 가정에서 태어난 이민교 선교사는 원불교 교역자가 되기로 예정된 코스를 밟는 것이 그의 숙명(?)이었는데, 소록도에서 예수를 만나 목사가 되었다.                          ©크리스찬리뷰


‘소록도 (원불교) 법당에서 카자흐스탄(이하 카작) 농아 선교사로!’ 이 한 줄에서 그의 인생은 예사롭지 않은 극적 반전을 거듭했음을 알 수 있다.

“이민교입니다.”

‘이민교’라 기독교라 해야 할 것인데, ‘이민교’라니? 그의 이름이 이민자들을 모아 만든 종교 같기도 하고, 끝자에 선입견을 갖고 들으면 이민자들의 교회 이름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좋다. 그는 이민교를 창립한 사이비 교주도 아니고, 이민교회 목사도 아닌, 그야말로, 모슬렘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중앙아시아 지역 카작 알마타에서 농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선교사이다. 여기까지는 ‘선교사’라 이름 올린 이들의 대부분의 이력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그에겐 전혀 다른 이면 스토리가 있다. 바로 그가 골수 원불교 가정에서, 원불교 종립대학인 원광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원불교 교무(교역자)가 되기로 예정된 코스를 밟아야 하는 것이 그의 숙명(?)이었다.  

“대학 시험을 치를 무렵 진로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늘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고 다니던 원불교 정녀인 누님이 하루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민교야, 사람이 살면서 꼭 가봐야 하는 곳이 두 군데 있는데 거기 가보면 네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야’해요.

‘거기가 어딘데?’하니, ‘소록도와 화장터야. 소록도는 옛날 문둥이라고 멸시해온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사는 곳이지. 그리고 화장터에 가서 죽은 사람의 시신이 한 줌의 재로 변해가는 것을 한 번 봐야 해’하는 거예요. 그래서 먼저 소록도로 갔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소록도에 들어서자 뜻밖에 원불교 법당이 눈에 띄었다. 그곳에 가 자신을 소개하니 ‘원불교 집안에서 나름 유명한 집안’ 덕분에 법당에서 지낼 수 있게 해 주었다.

도착 다음 날이 성탄절 이브였다. 원불교 법당에는 찾아오는 이 하나 없고, 사람들은 모두가 교회로 가는 듯했다. 그때 소록도병원 한 간호사가 성탄행사에 간다면서 그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따라나설 채비를 하는데 교무가 주의를 단단히 주었다.           

“그곳에 가는 것은 좋은데, 한센병 환자 바로 앞에서는 침을 뱉지 마라. 뱉고 싶어도 안보는데 가서 살짝 뱉으렴.”

 
약인 줄 알았던 ‘성체’

그렇게 따라간 곳이 가톨릭 성당이었다. 교회와 성당의 구별도 못할 정도로 그의 종교배경은 기독교에 무관했다. 그곳에서 난생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한센병 환자를 보았다고 했다. 미사를 드리는 중에 갑자기 환자들이 죽 일어서 뭘 하나 받아먹는 것을 보았다. 그도 얼떨결에 일어서 눈을 질끈 감고 받아먹었다.

“처음엔 한센병 예방약이나 치료제인 줄 알고 받아먹었습니다. 그런데 입속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딱딱하지 않고 의외로 부드러운 겁니다. 입안에서 살살 녹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게 아무래도 약 같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가톨릭 성찬예식 때 먹는 밀떡이었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살을 상징하는 성체였다니... 저도 모르게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예식에 처음으로 참여한 셈입니다. 아마 저를 예수님께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오묘한 물밑작업이 시작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렇게 소록도를 다녀온 그는 화장터에도 다녀왔다. 그리고 세상의 ‘물리’를 배워 한센병 환자 같은 불쌍한 사람에게 부처를 전하는 원불교 교무가 되기 위해 원광대학교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소록도와 화장터를 다녀온 탓인지 그는 유달리 병자나 장애인, 노숙자 등 연약한 사람들에게로 마음이 이끌렸고, 관심이 쏠렸다.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 장애인도 많은데 난 왜 그렇지 않은가?’를 고민하면서, 대학을 입학만 하고 2년 가까이 다니지 않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나름 구도의 길을 걸었다. 점쟁이들을 찾아다니며 점술도 배워보기도 했다. 그 덕분에 부산 범어사 근처에서 손금을 봐주고 먹고 살기도 했다.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해보고 싶어 벽제 화장터에서 스님 보조 역할을 하기도 했고, 장의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묘 이장하는 일을 돕기도 하고, 배가 고프면 초상집에 가서 얻어먹고 한쪽 구석에 쪼그려 잠을 청했다.

“우리네 정서가 초상집에서는 사람들을 배척하지 않더군요. 그렇게 다니면서 죽음에 관해서는 나름 답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장애인에 대한 답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는 원불교 총부인 학림사에 들어가 교무로서의 수련을 병행했다. 원래 학림사는 원불교학과 학생들만 갈 수 있었지만 교무 후보인 그는 일종의 특혜로 들어갈 수 있었다. 

 
농아와의 만남, 수화동아리 조직

 어느 날 길을 지나다 농아를 보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입이 아닌 손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이 세상에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섬광처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내가 농아들을 돕기 위해 수화부터 배워야겠구나!’

그리하여 대학 3학년 때 ‘손짓사랑회’라는 수화 동아리를 만들어 학교에 정식 등록했다. 수화 회원 모집 광고를 내니 400여 명이 몰려올 정도로 반향은 컸다. 이를 계기로 이웃 전북대, 우석대에도 수화동아리가 생겨날 정도였다.

“그때는 원불교 신앙에 기초해 우리가 건강한 육체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자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저는 수화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먼저 우리 몸에 장애가 없다는 사실에 감사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이를 테면 수화를 배운지 3개월 된 학생들을 모아 익산에서 군산까지 밤새 걸어서 다녀오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건강한 다리가 있는 우리의 육체에 감사하자는 뜻에서 시행한 체험행사였습니다.”

이후 그는 소록도에도 자주 갔다. 그곳 환자들에게 아무리 부처를 전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센병에 걸린 것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부처를 전할 때마다 돌아오는 소리가 그에게 충격이었다.

“그러지 말고 예수님 믿어. 예수 믿으면 행복할 텐데...”

“그럼! 예수 믿고 이 땅에서도 행복하게 살아야지, 예수 믿고 천국에도 가야하고...”

“우리가 문둥이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어. 문둥이가 아니었다면 한평생 멋모르고 살다가 지옥에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나님은 우리를 문둥이로 만들어주셔서 이제는 예수 믿고 영생을 얻었으니 살아도 천국에 살고,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어. 그러니 우리는 지금 행복해.”

이런 대답을 들으면서 ‘전생에 당신들이 지은 죄로 인해 이생에 문둥이라는 과보를 받았다’는 부처님의 법문을 설법하려던 그의 입술이 닫히기 시작했다. 대신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나를 더 불쌍히 여기는 그들의 배짱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예수믿으면 행복하다는데 그 예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염불에서 찬송으로

도무지 예수를 믿을 것 같지 않던, 아니 믿으면 큰 일 날 것 같은 그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 2011 코스타 강사로 참가한 이민교 선교사(뒷줄 오른쪽 2번째)가 강사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크리스찬리뷰


“1988년 3월 2일 그날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틈만 나면 소록도로 가던 저는 그날도 소록도 법당에 있었습니다. 그날도 평소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법당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30분간 좌선을 한 다음 목탁을 치며 염불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염불이 되지 않고, 엉뚱한 말이 입안을 맴돌았습니다. ‘ 며칠 후 며칠 후... (딱딱딱) 며칠 후 며칠 후... (딱딱딱) 요단강 건너가 (딱딱딱)’화들짝 놀랐습니다. 처음엔 ‘내가 멸치가 먹고 싶나?’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만 하려고 해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그것은 장의사 아르바이트 할 때 기독교인 장례식에서 들었던 찬송가 가사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염불을 해야 하는 법당에서 아무리 땡중이지만 입에서 찬송가를 부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 그런데 혀가 멈추지를 않아요. 혀가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하다가 뜻 모를 소리까지 외쳐댔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 방언이 터졌던 것 같습니다.”    

법당에서 염불 대신 찬송가라?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장례식에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세상에 죽음을 기뻐하는 사람도 있구나’하는 생각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소록도에서의 장례식을 보았다. 굉장한 쇼크였다.

“소록도에서 이분들은 장례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축제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울지 않고 기쁨으로 환송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로서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개념이었습니다.”

소록도에서 기이한 체험을 한 그는 크리스찬이었던 고등학교 은사를 찾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은사는 성경을 꼭 쥐어주며 말했다.

“감사하게도 성령 하나님이 너를 직접 찾아오신 모양이구나. 이 성경이 하나님을 잘 설명해주고 있으니, 처음에는 좀 이해가 안되더라도 꾸준히 읽어보렴.”

그때부터 그는 법당에서 성경을 보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제는 그렇게 잘 외우던 염불도 안되니 달리 할 일도 없었다. 게다가 원불교 교인이 하나도 없는 소록도 법당엔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성경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창세기부터 며칠 동안 죽 읽었다. 마침내 요한복음에 이르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 빛이 그에게도 비쳤다. 깨달음이 왔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처음 본 요한복음의 이 말씀이 논리적인 구조로만 보았을 때, 꼭 불교의 윤회설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며 알게된 사실이지만, 요한복음을 쓴 요한이 동양철학의 관점에서 헬라철학에 익숙한 사람들을 위해 기록했기 때문인지, 불교에 익숙한 저의 눈에도 이해하기 쉽게 다가왔습니다. 마치 요한복음이 살아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을 흡수하듯이 읽으면서 맹인의 치유기사(9장)를 읽으면서 치유받은 맹인의 부모는 사회에서 출교당할까봐 몸을 사리는데 비해 맹인은 당당하게,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요 9:38)는 대목을 대하니 그의 안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그렇구나! 이게 내 모습이구나. 영적 소경으로 살던 나를 눈뜨게 해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구나. 그분이 바로 나의 그리스도이시구나. 예수는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생각이 드는 그 순간 저는 ‘예수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뜨겁게 고백했습니다.”

 
영적 전쟁

이때부터 그는 영적인 시련과 부딪혀야 했다. 영적으로 눌리고 혼돈스러운 마음이 심해지면서 옷을 입은 채로 오줌을 지릴 정도였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실제로 귀신이 눈 앞에 보이는 날도 있었다.

“지금 제 아내와 데이트 할 때입니다. 아는 분의 차를 빌려 아내를 전주까지 데려다 주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조용히 운전을 하다 문득 백미러를 보니 뒷좌석에 누가 앉아있는 형상이 보였습니다. 아무도 있을 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진짜 누군가 있는 것 같아 조심스레 돌아보니 정말 누군가 떡하니 앉아있었습니다. 순간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핸들을 꼭 붙들고 다시 고개를 돌려 앞만 보고 가는데, 이번에는 옆에 누군가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아예 옆자리에 앉아버린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엑셀만 계속 밟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커브길에서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핸들을 꺾지 못하고 낭떨어지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자동차는 심하게 찌그러지고 유리도 다깨졌지만 신기하게도 제 몸은 한 군데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순간순간 이런전런 영적 공격을 받으면서 ‘진짜 예수를 믿어야 하나? 나 같은 사람은 예수를 믿지 말라는 말 아닌가?’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들었다고 한다. 뒤늦게 입대한 군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제가 만나온 사람들은 다 원불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종의 ‘분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공격은 군대 막사에서도 쉬지 않았습니다. 한 달이 넘도록 잠만 자면 오줌을 지리거나 심지어 변까지 보는 일이 있을 정도로 무의식 중에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너무 무서웠습니다. 악한 영적 세력은 제가 하나님께로 향하지 못하도록 끈질기게 붙잡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공격이 심할수록 저는 미친 사람처럼 성경을 파고들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니 차츰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말씀이 제 속에 들어오니 편히 잠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군대 동기들에게 저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저를 구원해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커지자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담대한 마음까지 생겼습니다.”

논산훈련소에서 1등으로 수료하고 사단장 상을 받은 그는 법무부 산하 교도소 병력으로 차출되어 조직 폭력 5범 이상만 수감되는 전주교도소로 배치받았다.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더욱 뜨거워졌다. 사형수들의 독방에 몰래 찾아가 예수를 전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방안에 받아둔 오물을 그의 얼굴에 뿌리는 소위 ‘똥물세례’였다. 그러면서 한 번만 더 찾아오면 ‘네놈 눈을 확 뽑아버리겠다’는 험한 말로 협박하기도 했다.

“지나치게 강퍅해진 사람들은 복음을 들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교도소 안에서 우직하게 예수를 전하고 다니니 믿지 않던 고참들에게 많이 두들겨 맞기도 했습니다.”

 
소명으로의 첫출발

군 제대 후에도 소록도는 그에겐 마음의 고향이었다. 틈난 나면 들렀다. 한번은 소록도 화장터 옆에 있는 구북리에서 한센병 환자들과 있는데, 간호사들이 환자들에게 약을 나눠주기 위해 그곳까지 찾아왔다. 그때 그들 앞에서 그가 자신도 모르게 어느 환자의 침이 흐르는 것을 핥아주었다고 한다. 그것을 지켜본 어느 목사가 그에게 이야기를 좀 하자고 하였다.

“예수 믿는 분입니까?”

“예, 여기 소록도에서 믿게 되었습니다.”

▲ 이민교 선교사는 장애인 선교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선교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크리스찬리뷰


그리고 간단히 그의 간증을 했는데, 그 목사는 가만히 듣더니 신학을 하여 사역자가 되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그러면서 대전 침신대학교 목회학석사(M. Div)과정을 소개해 주었다. 그렇게 신학생이 된 그는 그 후에도 계속 소록도를 고향처럼 방문했다.

“제가 교회 전도사로 사역할 때, 교인들을 데리고 소록도 교도소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계신 분들이, ‘저 전도사는 옛날엔 부처 믿으라고 하더니 지금은 예수 믿으라고 한다. 웃기는 사람이다’하고 말해서 배꼽을 잡고 웃기도 했습니다.”

소련이 무너진 이후, 아직 신학생이었던 그는 러시아로 단기선교 여행을 떠났다. 모스크바 도심지 아스밧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리의 화가를 만났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그의 얼굴이 어쩐지 친근했다. 한국말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배웠다고 하였다. 그는 우즈벡에서 온 고려인 3세였다. 고향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해 모스크바로 온 것이었다.

“무엇보다 러시아에서 저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사람, 우리말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순간, ‘아, 이들이 바로 독립운동을 한 분들의 후손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좀 이상했어요. 유난히 창백한데다 기침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결핵을 앓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지내고 있는 그를 데려다 가까운 곳에 방을 하나 구해 며칠을 함께 보냈다. 결핵은 잘 먹고 쉬어야 하는 병이니 편히 쉬게 해주었다.

“제 이름이 민교이니 그의 이름은 김블라지미르인데 형제가 되자는 뜻으로 교자 돌림을 해서 ‘순교’라고 불러주었습니다. 예수 전하다 잘 죽자는 뜻으로 말입니다.”

순교에게 태권도와 한국말도 가르쳐주며, 시시때때로 기도도 해주었다. 6개월 후 결핵이 말끔히 나았다. 몸을 추스린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여 순교와 함께 레닌그라드를 거쳐 타슈켄트까지 3박 4일 동안 긴 여정을 함께 보냈다.

이때 그는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가졌다. 말씀을 실것 읽고, 전도도, 기도도 원없이 했다. 하나님께서 계속 격려해주시는 것을 느꼈다. 벅찬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교에 대한 소명과 꿈이 그려졌다. 한국에 돌아와 신학교를 마친 후 여수 은현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했다.

그러나 그의 꿈을 이해하거나 지지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약사로 일하던 부인도 그의 이야기를 듣고 당황해했다.

“우즈베키스탄이 도대체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에요?”

“한 번 살라는 인생, 젊었을 때 쓰임받아야 하지 않겠어?”

주변에 모든 사람이 익숙한 나라도 아닌 나라이니 거리상으로나 정서상으로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내가 운영하던 약국에 작은 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곳을 기도처소로 삼았습니다. 아침에 들어가면 저녁에 나왔습니다. 기도하고 말씀 읽고... 그런 저를 보고 아내는 ‘당신은 가야하는 사람이군요’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사실 그때 저는 이혼까지 생각했습니다. ‘따라오지 않으면 이혼하는 걸로 알고 간다’는 모진 말도 내뱉었습니다. 얼마 전에 그 말이 생각이 나서 ‘이혼 도장 안찍어줘서 고마워’했더니, 아내는 ‘어떻게 이혼하는지 몰라서 그랬어’하며 웃으며 대답하더군요.”

 
선교지로 떠나다

1997년 1월, 그는 3년 전 결핵환자, 그가 지어준 이름 ‘순교’를 고향에 데려다 주면서 “언젠가 너에게 다시 올께”하며 약속했던 그 약속을 지키려 순교의 고향 타슈켄트로 갔다. 그의 도움을 받아 고려인들을 만나고 정착해나갔다. 두 달 후 부인이 약국을 정리하고 아이 둘과 함께 합류했다.

“모슬렘 국가에서는 마음대로 예수를 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처음 선교지에서 한 일은 섬김과 봉사뿐입니다. 아내는 먼저 그 아이들에게 밥을 해먹였습니다. 농아들을 상대하는 일은 그들의 장애 특성상 보통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훨씬 심합니다.

아내는 결국 갑상선 질환을 얻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둘째가 결핵에 걸렸습니다. 아내는 감기인 줄 알고 감기약을 계속 먹였는데 열이 내리지 않아 확인해보니 결핵이더군요. 우리와 같이 지내던 우즈벡 청년들 가운데 결핵환자가 있었는데, 한집에 살면서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었으니 면역력이 약한 둘째가 결핵에 걸렸던 것이지요. 첫째 아이 역시 초반에 스트레스로 인한 급성 신우신염에 걸려 한참 동안 소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했습니다.”

이 몇 마디 속에는 선교사들의 애환이 스며있다. 이뿐만 아니었다. 동네 청년들이 아파트 문 앞에 ‘저녁 8시까지 옥상에 돈과 담배를 갖다 놓지 않으면 너희 애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적어놓았다. 외국 땅에서 처음 당하는 일이라 무섭고 두려워 부들부들 떨면서 기도했다. 점차 화가 누그러지면서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우리 편으로 만들까?’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생각지 않은 곳에서 문제가 풀렸습니다. 재활의 집 이병창 선생께서 우즈벡에 오셨을 때 축구공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들딸과 함께 축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동네 아이들이 우리가 축구하는 시간에 하나 둘 몰려들었습니다. 처음엔 제 눈치를 살피면서 구경하더니, ‘같이 하자’고 하니 신나하더니 함께 뛰놀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품질 좋은 축구공이 관계해결의 열쇠가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축구공의 기적

아이들이 축구공 하나로 모이자, ‘아, 농아사역도 이렇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타슈켄트 농아들을 모아 축구대회를 열었다. 다른 도시까지 축구를 하면서 농아들을 모았다. 축구대회 땐 푸짐한 잔치도 했다. 잘하는 아이들을 뽑아서 특별 훈련도 시켰다. 모슬렘 국가라 처음엔 예수의 ‘예’자도 못꺼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는 마음으로 아무 말 없이 섬기는 일이 전부였다.

▲ 축구공 하나로 카자흐스탄 장애인 체육회 국가대표 축구감독을 맡고 있는 이민교 선교사는 농아축구는 물론 농아들의 자립과 선교를 도모하는 일터교회 사역을 통해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라는 주님으 지상명령을 실천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모슬렘 국가에서는 예수를 전할 수 없지만 자기 신앙을 간증할 수는 있습니다. 제가 소록도에서 변화된 이야기, 교도소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정말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 등을 이야기해 주었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이들이 성령을 받고 하루에 두 갑씩 피던 담배를 한순간에 끊어버려요. 그리고 중앙아시아 인접국가에서는 마약 유통없이 성행하는데, 마피아들이 농아들을 운반책으로 씁니다.

경찰에 걸려도 이들이 ‘에에’하면서 말을 못하고 어수룩하게 행동하면 재수없다고 보내니 마피아들이 악용합니다. 그렇게 마피아 밑에서 일하던 아이가 모든 핍박을 참아가며 모스크바에서 신학을 하여 이제는 ‘우즈벡 농아교회’전도사로 농아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축구공 하나가 훌륭한 선교의 도구가 된 것이다. 원래 테니스를 비롯한 운동을 좋아하던 그에게 안성마춤이었다. 농아들을 축구공 하나로 모았으니 어쩔 수없이 감독을 해야 했다. 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축구를 공부해야 했다. 관련서적을 읽고, 비디오를 구해다 분석했다.

30여 명의 농아들을 모아다 훈련을 시키다 보니 국제대회에 참가해 실력을 겨루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침 대만에서 농아인 아시안게임이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즈벡에서는 농아들이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전례도 없었으니 국가의 지원이나 후원도 없었다. 부족하지만 한국에서 가져간 돈으로 충당했다.

겨우 비행기값만 마련해서 출전했다. 호텔에도 투숙할 수 없어 축구장 라커룸을 숙소로 삼고, 초크릿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그러면서 새벽마다 여리고성을 돌듯이 운동장을 일곱 바퀴 돌면서 맨발로 연습했다. 예선전 경기 중에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런데도 경기마다 이기는 기염을 토했다. 마지막 예선전인 네팔과의 경기에서 28대 0이란 대회 신기록을 세웠다. 이렇게 첫대회 출전에서 4강까지 올라서 3위를 했다.

 
장애인 선교, 선교의 본질

이런 일이 있은 후 한국 KBS 1TV ‘한민족 리포트’ 제목이 ‘우즈벡 한인목사와 농아축구단’으로 목사인 그의 신분이 공개와 교회사역을 한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다.

“그런데 추방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체육부 장관이 다시 들어오라고 저에게 조용히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6개월만에 다시 들어갔는데 2003년 3월에 터진 이라크 전쟁 영향으로 또다시 추방을 당해야 했습니다. 보통 추방을 당하면 이틀만에 강제출국하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추방명령을 내려놓고도 이상하게 집행하러 오지 않아요. 더욱 바짝 엎드려 기도했던 기간이었습니다. 추방당할 것을 의식하여 농아교회 연합으로 수련회도 하고 세례도 베풀었습니다. 물론 철저히 비밀리에 시행했습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몇 번이나 겪으면서 카작을 중심으로 농아들에게 선교하면서 농아 축구는 물론이고, 농아들의 자립과 선교를 도모하는 ‘일터교회’(콩나물, 두부, 뻥튀기 등) 사역을 통해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라는 주님의 지상명령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다. 

“장애인 선교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선교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장애자들을 치유해주신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 이전에 누가복음 4장에서 이사야 선지자 글 인용하시면서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신다는 표현이나, 누가복음 14장에 천국잔치 초청장 보냈을 때, 다들 바쁘다고 했을 때, 마지막에 장애인들을 초청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장애인들을 어떻게 보셨는가를 항상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에겐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려는 몸부림과 간절함이 보였다.

“올해 처음으로 한국에서 농아인들 중심으로 17개 종목으로 펼치는 농아인 아시안게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안게임 때 북한의 장애인들을 초청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북한도 장애인들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 유난히 힘이 들어있는 그의 목소리, 고국에서 그동안 훈련했던 선수들을 좀더 잘 보살필 수 있겠다는 자신감, 그리고 선교의 지평을 우리의 반쪽인 ‘북한’도 보아야 한다는 소망으로 들려오니 웬지 찡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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