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위대한 스승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Saint Augustine)
32세의 젊은 아우구스티누스(혹은, 어거스틴|Augustine)는 오랜 세월 동안의 영적인 방황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하루속히 영적 방황을 끝내고 진리에 대한 확신을 얻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나, 원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여 말할 수 없는 고뇌의 탄식이 속에서 치밀어 올라왔다.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 주저앉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마음속으로 안타까이 외쳤다. 구원의 역사 체험 “오오 주여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있어야 하나요? 영원토록 제게 진노하시렵니까? 오오, 저의 과거의 허물은 기억하지 마옵소서.” “어느 때까지 내일, 내일, 해야 하나요? 왜 지금은 안 되는가요? 부정한 저의 삶을 청산하는 일이 어째서 지금은 안 되나요?” 그런데 바로 이 순간,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한 어린아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는데, 노래하듯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었다. “톨레 레게(tolle lege)! 톨레 레게(tolle lege)!" "집어 들어 읽어라!", "집어 들어 읽어라!” 그런 노래는 처음 듣는 것이었고, 아이들이 놀며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하기에는 아주 이상스런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쓴 [고백록](Confessions)에서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 소리를 듣고 주위를 둘러보며, 어린아이들이 그런 말을 노랫말로 하는 놀이같은 것이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전에 그 비슷한 것을 들은 기억이 전혀 없었다. 비 오듯 쏟아지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면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 노래 소리는 성경책을 펴서 처음 눈에 들어오는 곳을 읽어서 빛을 얻으라는 신적인 명령일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되뇌었다. 서둘러 알리피우스(Alypius)가 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바울의 서신서를 집어 들고 펼쳤다. 그리고 첫눈에 들어오는 대목을 말없이 읽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는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더 이상 읽어내려 갈 생각도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마지막 문장에 이르자 그 순간 확신의 빛이 내 마음속에 홍수처럼 밀려들어와 캄캄한 의심의 구름이 말끔히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386년 8월, 오랜 의심과 방황, 그리고 절망 속에 갇혀 지내온 젊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섭리로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출생과 성장 2천 년 교회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스승으로 일컬어지는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354년 11월 아프리카 북부의 타가스테(Thagaste: 현재의 알제리에 속함)에서 비교적 부유한 농부였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Patricius)와 어머니 모니카(Monica)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불신자였으나 어머니 모니카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어머니 모니카는 가정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모범을 보였고, 남편과 아들의 구원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또한 남편들에게서 고통을 당하는 이웃의 아낙네들을 따뜻하게 보살피며 위로하고 권면하는 등, 사랑을 베풀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아들이 최고의 수사학(修辭學) 교육을 받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11-15세까지는 집에서 멀지 않은 마다우라(Madaura)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 후에는 1년 동안 집에 머문 뒤 아버지의 죽음 이후 17세부터 20세까지는 카르타고(Carthage)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머니 모니카는 카르타고로 떠나는 17세의 아들에게 “음행을 범하지 말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아내를 유혹하지 말 것”을 간절하게 당부하였다. 그러나 카르타고에서 그는 온갖 육신적인 정욕의 수렁에 빠졌고, 도둑질도 했다. 그러나 수사학 공부에 있어서는 뛰어난 재질을 보였고, 그리하여 온갖 교만과 허영이 가득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무엇보다 이때에 한 여자와 동거를 시작하여 15년 동안 함께 살며 그 여자에게서 아데오다투스(Adeodatus)라는 아들을 얻기까지 했다. 이처럼 성적인 쾌락과 허영과 방탕한 생활에 젖어 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19세 때에 로마의 위대한 철학자 키케로(Cicero)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고 처음으로 그 내용에 감동을 받아, 육체적인 쾌락보다 더 고귀하고 높은 지혜와 진리의 세계가 있음을 각성하였고, 이때부터 지혜와 진리를 얻기 위한 탐구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당시 지식층 사이에 유행하던 마니교(Manichaeism)의 이원론적 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방탕한 생활과 마니교 심취 그가 보기에 성경은 초라하고 조잡하여 진리를 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는데, 마니교의 가르침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미사여구로 포장되어 있어 무언가 참된 지성적인 진리를 전해주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마니교는 페르시아의 예언자로서 로마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 마니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었는데, 그는 선과 악의 두 세력이 영원토록 서로 대적하는 것이 인간 세상이라고 가르쳤다. 선은 선한 하늘의 신이 창조한 영에서 비롯되며, 악은 악한 원리가 창조되어 물질에 들어간 데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마니교에 심취해 있던 어느 날 그는 마니교의 허구성을 볼 수 있는 결정적인 한 계기를 만나게 된다. 곧, 카르타고에서 마니교의 위대한 스승으로 일컬어지는 파우스투스(Faustus)와 대면한 일이 그것이다. 진리에 대해 많은 고민거리를 해결할 생각에 그는 그 위대한 스승과의 만남을 갈망하며 스스로 많은 준비를 하였으나, 정작 그를 만나 대화해 보고서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는 어법이 화려하고 부드러운 것 외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던 것이다. 9년 동안 마니교를 열정적으로 지지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가르침을 전해왔는데, 결국 마니교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아무런 해결도 주지 못했던 것이다. 383년 아우구스티누스는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최고의 연설가가 되어 성공하리라는 야망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결국 아들에 대해 노심초사하며 기도하는 어머니를 속이고 그는 배를 타고 로마로 향하였다. 그러나 로마에서도 얻은 것은 실망과 좌절뿐이었다. 그는 그 곳에서 다시 밀라노로 향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가 이 일에 작용하고 있었다. 당시 밀라노에는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 감독의 설교가 지식인들 사이에 유명하였다. 그는 훌륭한 설교자요 연설자였고, 그의 명성을 들은 아우구스티누스도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는 암브로시우스의 순전한 삶과 그의 탁월한 설교와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권위에 감복하였다. 암브로시우스 감독은 그저 사랑에 대해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목회 사역에서 그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낯선 밀라노에 처음 온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보살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설교는 수사학적인 면에서도 아주 탁월한 것이었다. 스타일과 문장 구조, 논지의 전개 방법 등, 나무랄 데 없는 교과서적인 연설이었다. 그러던 중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중요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의 관심사가 감독의 설교 스타일과 논리 등 외형적인 것으로부터 설교의 내용에로 바뀌어 갔던 것이다. 하나님은 밀라노의 감독을 미리 예비하셔서 아우구스티누스를 구원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그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나는 그의 설교를 열심히 들었다. 그의 연설들이 그의 명성에 걸맞게 과연 들을 만한 것인지를 시험해보려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청중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그의 연설법은 정말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연설 내용은 지루하고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점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이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 즐거움을 주는 그의 연설과 더불어, 전혀 관심이 없던 그 연설의 내용이 내 마음에 와 닿기 시작하였다. 그의 연설법을 주목하며 그것을 마음에 담아가는 동안 그가 전하는 그 진리가 함께 마음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변화 아직 마니교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는 아니었으나, 최소한 전처럼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를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밀라노의 교회에 초신자로 등록하였다. 기독교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배워서 “내 인생을 이끌어갈 무언가 분명한 빛”을 얻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특히 하나님의 본성, 악의 기원, 그리고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아주 심각한 지성적인 고민이 있었다. 그런데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공적인 설교를 통해서, 그리고 그 자신의 개인적인 공부를 통해서, 점점 진리의 빛이 그의 가슴속에 밝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진리의 빛이 밝아올수록 그에게 견딜 수 없는 고민거리가 있었다. 곧, 그 자신의 더러움, 도덕적인 부정함이 함께 밝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주님, 주님은 나로 하여금 다시금 나 자신을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나 자신이 보기 싫어 늘 나의 뒷모습만을 보아왔는데, 주께서 나를 돌이켜 나의 바른 모습을 보게 하셨습니다. 정말 끔찍했습니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서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나를 다시금 나 자신 앞에 세우셨고, 내 눈으로 그 모습을 직접 보게 하시고, 나의 사악함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정말 싫었습니다.” 386년 8월, 이러한 기나긴 영적인 갈등과 괴로움 속에 신음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정원의 무화과나무 아래 주저앉아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었고, 그때에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역사하사, 그를 새로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키신 것이다. 387년 부활절,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친구 알리피우스와 함께 암브로시우스 감독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의 세례를 지극한 감격과 기쁨으로 바라본 것은 평생을 그의 구원을 위해 애타게 기도해온 어머니 모니카였다. 그녀는 아마도, 평생토록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다가 아기 예수를 만나고서, “주여 이제 주의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며 감격했던 시므온과 비슷한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눅 2:29). 아우구스티누스가 세례를 받은지 얼마 후 모니카는 아들과 함께 밀라노에서 북아프리카로 돌아오던 중 오스티아(Ostia)에서 56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삶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여종이 평생 바라던 아들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을 두 눈으로 본 후 감격에 찬 상태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객지에서 병석에 누워 있던 어머니 모니카는 걱정과 슬픔에 잠긴 자식들을 바라보며, “나를 아무데나 묻어도 좋다. 그것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육체가 어디에 묻힌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하지만 한 가지, 너희가 어디에 가든지 주의 제단 앞에서 나를 기억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헤어지는 슬픔이 밀려왔으나 그것은 비탄과 절망에 싸인 슬픔은 아니었다. 그는 [고백록]에서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어머니의 눈을 감겨드렸다. 큰 슬픔이 가슴 속에서 북받쳐 올라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어린애처럼 슬피 울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슬픔과 탄식으로 치루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이를 위해 슬퍼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실상 어머님은 그 죽음으로 불행을 당하시거나 또 그 죽음이 그의 마지막이 되어버린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생각했고, 어머니의 선한 말씀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떠올리며 울지 않으려 애썼다.”〠 <계속> 원광연|시드니영락교회 EM목사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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