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사회의 문제점에 대하여 고민하고, 지적하고, 연구하면서 늘 부딪치게 되는 것은, “너나 잘 하세요!” 하는 내 마음속의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소리가 있다.
성직자와 다르게 학자가 가지는 속성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답을 구하여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질문조차 다시금 끄집어내어, 의심하고 때로는 사람들이 구하지도 않는 해명을 하고자 하는 고집스러움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삶을 개척할 뿐더러,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게 하셨다.
그리스도인과 교회
우리는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우리의 영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매일을 살고있다. 반면에 이 세상의 문화 그리고 물질문명은 우리 눈으로 늘 확인할 수 있고, 사람들은 그 삶의 여정에서 변화하는 문화속에서 삶을 살아내고 누리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과 경쟁을 이어간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것이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과정은 이 세상의 문화와 물질문명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에 대하여 많은 기독인들이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고 많은 교회들이 처절한 실패를 보여 주기도 하였다.
우리는 과학과 근대화, 그리고 합리적인 교육을 받음으로써 이 땅에서의 삶이 시작된다. 따라서 합리주의와 근대성은 교회와 크리스찬의 삶에 깊이 스며들었고 그 추세를 포용하고 지혜롭게 수용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삶이나 존재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
물론 기독교의 초기 형성 단계부터 지금까지 기독교는 주변의 문화에 의한 영향을 받기도하고, 영향을 미치기도 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기독교인는 어떤 세계관이나 정체성을 갖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본질적 질문을 하게 된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다스리시는 세상이 오기 전에 완벽한 교회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
단지 우리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성경을 통하여 배우고 이해하고 그것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원칙들을 지켜나갈 수는 있지만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를 현대교회에 적용하기에는 여러 가지의 모순에 빠지기 마련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교회 또는 현대교회와 문화와의 관계를 고찰한다는 것은 단순히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성찰에 가깝다고 보는 게 옳다는 생각이다.
이와 관련하여 기독교 윤리에 관한 책을 한 권 소개하면서, 교회와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와 이 세상의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어가는가에 관하여 나누고자 한다.
그 책은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의 1951년에 출판된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이다.
우리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이유는 성경이 우리를 획일적이고 경직된 방법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과 고민의 여지를 많이 주셨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다음의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자.
•요한 일서 2:15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골로새서 3:22-23 :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로마서 13:1 :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우리로 하여금 “어느 길이 맞나?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하는 고민을 하게 만드는 몇 구절의 말씀이다.
리차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
먼저 리차드 니버는 독일계 이민 1세대의 매우 복음적인 목사였던 구스타프 니버와 독일계 이민 2세대인 리디아 호스토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리차드 니버는 그와 함께 미국 신학의 큰 맥을 이룬 누이 홀다, 그리고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를 쓴 형 라인홀드가 있다. 리차드 니버는 하나님이 역사 위에 계시고, 인간에게 명령을 내리고 모든 역사가 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배 아래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리스도와 문화』를 읽으면서 마치 제2의 성경을 읽는 듯 강한 그 무엇이 나를 사로잡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 한 분만이 주권자 되시며 찬양과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으로 그의 마음에 너무나도 확고히 자리 잡고 계셨기 때문이다.
어느 시편 못지않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려는 그 책의 전반부가 내게 큰 감동을 주고 내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리차드 니버 (Richard Niebuhr) 의 『그리스도와 문화』 (Christ and Culture, 1951)는 기독교인과 교회가 “문화”와 어떤 관계를 만들어가고 유지하는가를 유형학적(typological)으로 다루며 기독교인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암시적으로 제시하는 책으로, 크리스찬이 주목할 만한 책이다.
출판 이후 70년이 지났지만 오늘을 사는 기독인들에게 아직도 대단한 통찰력을 주는 책으로 인정받고 있다. 니버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헌신과 ...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다른 어떤 표현으로도 상징할 수 없는 그분에 대한 절대적 신뢰”(1951: 27)로 정의한다.
가치로써의 ‘그리스도’의 속성은 상대적으로 불변·고정적이며, 문화는 “인간 활동의 총체적 과정과 그러한 활동의 총 결과, 예를 들면, 언어, 습관, 사상, 신념, 관습, 사회적 조직” 등을 말한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가치는 역사적으로 기독교인의 삶에 깊이 자리 잡고 있으며, 기독교인의 삶의 사회·문화적 영역에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뿐더러 큰 의미로 자리 잡고 있음에 틀림없다. 기독인들은 이땅에 발을 붙이고 살 뿐더러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니버의 다섯 가지 모델
니버의 다섯 가지 모델을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로, ‘문화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에 의하면 교회는 문화를 완전히 거부하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킨다. 교회 밖의 모든 문화적 요소는 죄로 인해 타락한 것으로 간주된다.
많은 기독교 종파의 근본주의 그룹이 이 모델에 속한다. 대표적인 성경 본문은 요한1서 2장 15절이다.
“너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대표적인 그룹이나 개인은 터툴리안, 레오 톨스토이, 수도원 운동, 메노나이트, 퀘이커 신도들이다.
두 번째로, ‘문화의 그리스도’는 주변의 높은 문화를 쉽게 수용한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곧, 훌륭한 시민으로서 문화를 최대한 활용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높은 수준의 문화를 그리스도의 성품과 동일시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가르침과 ‘높은 수준의 문화’를 동일시하기 위해 문화의 가치 있는 활용을 추구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문화 안에서 생활하고, 문화를 접하는 데 어려움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높은 가치는 교회에서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대표하는 그룹과 사상은 영지주의자, 아벨라르, 자유주의 신학 등이다.
세 번째로 ‘문화 위에 계신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영역에 모두 살면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문화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두 세계의 가치와 삶을 종합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높은 가치는 세상의 좋은 것들을 보완하고 더 발전시킬 수 있다.
대표적인 단체와 전통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정교회의 전통이다.
네 번째로, ‘역설 속의 그리스도와 문화’는 두 가지 다른 영역, 즉 신성한 영역과 세속적 영역의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인정하는 이원론적 모델이다. 십계명과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면서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대조되는 가치관과 정체성으로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종합적 유형인 ‘문화 위의 그리스도’와 동화적 유형인 ‘문화의 그리스도’에 비해 이원론적 유형인 ‘그리스도와 문화의 역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문화에 대해 훨씬 더 비판적 의견을 가진다. 대표되는 사람과 단체는 루터, 칼빈, 청교도이고, 그들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한다.
마지막 다섯째로, ‘문화의 변혁자이신 그리스도’라는 모델의 옹호자들은 죄의 영향을 심각하게 인식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죄악된 세상을 구속하심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문화에 대한 단호하고 희망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 생활의 모든 문화를 변화시키고 개종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모델을 대표하는 선각자는 루터, 칼빈, 웨슬리 등이 있다.
인류사에 대한 그들의 시각은, 세상은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하므로 기독교인들은 문화의 변혁을 위해 적극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이를 위해 기독교인들은 문화에 대하여 지나치게 배타적인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니버의 유형론 다섯 가지 모델
니버의 모델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은 다섯 가지 모델 중 하나에 적절하게 짝지을 수 있는 개별 기독교인이나 종파/교회를 제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는 어느 시점에서든 각자가 가지는 다양한 기능과 목표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접근 방식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특정한 교회와 문화의 상호작용은 다섯 가지 모델의 몇 가지 특성들의 부분을 동시에 대표한다고 볼 수 있겠다. 니버의 모델은 우리들에게 교회의 활동을 분석하기 위한 광범위한 원칙을 제공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문화와의 관계를 추구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5가지 유형 각각은 피차간에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다. 즉, 모델 간에 상당한 중복이 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모델에는 특히 공통점이 많다고 이해된다.
니버의 유형론을 연구에 적용하기 위해 나는 다섯 가지 모델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재분류한다.
(1)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접촉하여 일체 되는 모델, 문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 (2) 교회가 문화를 포용한다는 문화의 그리스도, 마지막으로 (3) 문화 위의 그리스도, 역설 속의 그리스도와 문화,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와 문화의 요구 사항을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문화의 변혁자이신 그리스도’이다.
니버가 개발하고 많은 학자들이 수정한, 교회가 가지는 그리스도 및 문화와의 관계에 대한 유형론은 일반적이고 넓은 원칙을 제공한다.
먼저 기독교단과 개별 교회의 정치와 정체성을 고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유형론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주변 문화 사이의 교차점에 대하여 가능한 방향을 교회에 제공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에 관한 문헌과 니버의 교회와 문화의 상호작용 유형론을 살펴보면 현대 교회가 유형론에 쉽게 맞지 않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교회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고자 하는 니버의 근본적인 통찰력은 여전히 적용 가능하다고 사려된다.
니버의 통찰력을 좀 더 생동감있게 이해하기 위해 필자가 고민을 해보았는데, 다음의 메타포(비유)를 놓고 같이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말굽자석
초등학교 시절 자연시간에 가지고 놀던 말굽자석을 생각해보자. 교회는 말굽 자석의 북극과 남극 사이에 놓여진 철판과 같으며, 이는 니버의 교회와 기독교인의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관계의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모델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철판이 자석의 북극과 남극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여 완벽한 균형 상태에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가정한다. 그럴 경우 철판은 중간에 끼어 그 사이에서 떨면서, 어느 쪽으로도 당겨지지 않고, 남극으로 이동하거나 남극을 쉽사리 끌어안지 못한 채 북극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마찬가지로 북극에 쉽사리 끌리지 않고 남극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진땀을 흘린다. 여기서 북극은 그리스도에 대한 은유이고 남극은 문화에 대한 은유이다. 교회의 속성은 무엇과 연결되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교회의 컨텍스트(주변 환경)을 이루는 사회와 문화, 교회 안팎에 만연한 구조적, 문화적 속성, 성도들의 삶에 대한 방향과 속성, 그리고 특정 시대 사람들의 속성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말굽자석의 북극과 남극은 분명히 상호 연결되어있고 연속성을 가진 하나의 자석이다. 그렇지만 동일한 자석의 북극과 남극은 교회가 부딪치고 감당해야 하는 두 개의 다른 속성이다.
즉, 북극과 남극 사이에서 한쪽으로 끌리지 않고 중앙에 위치하려는 철판의 고민과 어려움이 ‘기독교와 기독인이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서 겪는 고민과 유사하다.
철판이 북극이나 남극에 융합될 때의 위험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를 중재하는 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기독교인의 삶, 즉, 그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와 문화의 융합은 교회를 문화의 일부로 만들어 버린다. 마치 자석에 붙은 철판은 그 자체가 결국 자석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빛과 소금의 속성을 완전히 잃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를 그리스도와 융합시키는 것은 교회가 빛과 소금의 속성을 강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교회는 세상에 접근할 수 없도록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세상에 기독교적 봉사 내지는 복음을 전할 가치를 제공할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이를테면 수도원에서 지내는 수도사들과 같이 또는 외딴섬에서 홀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사는 기독인의 모습과 비유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북극과 남극의 특성은 상대적으로 고정되어 있다. 말하자면 강한 독립변수이다. 그리스도의 속성은 매우 강한 독립변수이고, 문화도 독립변수이긴 한데 교회가 위치하고있는 주변의 문화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속성은 그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하며, 그 속성은 계속해서 발전 변화하는 교회 안팎의 구조적, 문화적, 행위적(인간 개개인의) 속성의 역동성에서 비롯된다. 교회가 문화와 지나치게 밀접하게 융합되어 통합될 때 대중의 신뢰를 잃게 된다.
이를테면, 기독교인들은 대중들이 교회를 표리부동한 조직체로 간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대중들에게 교회는 교회의 본질과 교회가 제공하는 것이 달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이중의 요구 사항 – Double requirements –을 충족시키려는 노력에는 문제가 없지만, 이 과정에서 이중 잣대 – Double standards –의 오류라는 덫에 걸리기 쉽다.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키려는 과정에서 두 가지 모두를 저버리는 결과를 낳기가 쉽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지는 도전이요 감당해야 할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첨언하고 싶은 것은, 젊은이들이 생각하고 누리는 문화는 대부분 기성세대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 또한 우리가 만나는 비 기독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우리는 쉽게 판단하고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 말씀의 원칙들은 불변하지만, 내 개인의 배경과 지식, 또는 내가 몸담은 교회의 전통을 중요시하고 그것이 우리의 목표나 가치가 되다 보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쉽게 상실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남기며 마친다.
이글의 요약 버전은 CBF Newsletter에 2022년에 출판되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에서 찾아볼 수 있다.〠
https://keka.snu.ac.kr/publications/working-papers?mode=view&pubidx=837
한길수|호주 모나쉬대학교,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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