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으로 세워진 인생

글/송기태,사진/권순형ㅣ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11/28 [14:59]
일그러진 삽화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5년도 더 됐다. 85년 당시 연예인교회 연예인들이 총동원되어 문화체육관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라는 뮤지컬로 큰잔치 한마당을 펼칠 때였다. 까마득한 그날 그곳, 행사장 입구에 그들의 활동 테이프 판매대 앞에 있던 그를 보았다.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익살스럽게 판촉까지 하면서.

▲ 열창하는 윤복희 권사     ©크리스찬리뷰


뒤에서 누군가 “윤복희다! ‘이거야 정말’을 부른 윤복희다!”하고 ‘스타를 발견한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당연히 그의 명성, 그의 신앙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까마득한 세월이 지나 시드니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당연히 기대감이 부풀었다. 내심 그의 오빠인 윤항기 목사까지 아우르는 가족과 음악, 그리고 신앙의 3대축으로 엮으려 했다. 그러면 한 시간 반 인터뷰에 200자 원고지 70매 분량이 되는 게, 필자의 경험상 나온 정량(定量) 분석이었다.

▲ 절절 끓는 열정으로 가스펠송과 뮤지컬로 종횡무진했던 윤복희 권사(서울 온누리교회)는 35년간 80여 편의 뮤지컬에 출연했다.     ©크리스찬리뷰


그런데 첫마디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에게 가족 이야기를 물으니 “어디서 뭐하는지 몰라요”하며 즉답을 피했다. 연이은 몇 가지 질문에도 “이 달말 두란노에서 자서전이 나올 것인데 거기 다 쓰여 있는 걸 물어요?”면서 상당히 질문과 동떨어진 답변을 했다.

25년 전, 그때 그곳에서 들었던 그 허스키한 목소리가 쇳소리로 변한 듯했다.

미국 르포 작가 톰 울프가 “뉴저널리즘이 문학의 영토에서 소설을 지워버릴 것”이라고 주장했던 게 1972년이다. ‘뉴저널리즘’이란 긴 호흡의 취재와 소설의 표현법을 빌려 일간지 기사를 뛰어넘자는 움직임이다.

톰 울프는 인물 취재를 할 때 반드시 ‘삶의 조건’(Status Life)을 함께 취재하라고 했다. 가족관계, 소득수준, 종교, 말투, 음식 취향 등이 총체적으로 한 인간을 구성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다섯 살 때부터 무대에 서면서 스타가 된 그는 무수한 인터뷰를 했을 터인데, 이런 뉴저널리즘의 주장과 생리를 무시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기자는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독자가 읽고(혹은 ‘알고’)싶어 하는 것을 쓰는 사람이 기자다. 그러기에 기자는 독자가 궁금해 할 내용들을 대신 질문하고, 기사는 그 소리를 글자로 재생시켜 독자들의 입맛에 맞도록 가공한 레시피이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일그러진 삽화가 있음을 밝힌다.

▲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합니다     ©크리스찬리뷰


성령체험, 일대 전환

윤 권사의 인생은 얼마 전 소천한 하용조 목사를 빼고는 설명이 안된다고 할 정도로 그에게 크나큰 영향을 받았다.

“하 목사님과 저는 46년생 동갑이예요. 그리고 목사님을 35년 모셨습니다. 작년에 하 목사님이 말씀하셔서 처음으로 제 이름 석자를 내걸고 ‘윤복희 60주년 스페셜 콘서트’도 했으니까요.”

▲ 시드니성시화운동본부가 주관한 윤복희 권사 찬양콘서트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많은 팬들이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뤘다. (시드니새순장로교회)     ©크리스찬리뷰


1976년 2월 27일, 그의 삶에 일대 전환이 일어난다. 외국에서 대스타로 활동하던 그가 귀국을 했다.

“그날 제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무대에 대한 염증 등 여러 가지 일로 저를 조여올 때 일어난 일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았으면 한국에 안나왔을 거예요. 성령을 안받으면 뮤지컬도 안했을 것이고요. 다 신앙에서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저한데 무대라는 게 일이고 노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고 저 같은 사람이 별 볼 일없는 사람이 아니라 뱃속에서부터 택함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돈만 버는 도구가 아니었구나, 이런 것들도 깨달은 거죠. 이후 그렇게 제가 멋있어 보이는 거예요. 늘 신이 난 거예요.

▲ 시드니순복음교회 찬양 간증집회     ©크리스찬리뷰


하 목사님 만나서 7년간 성경공부하고, 연예인교회 시작할 때 같이 하고, 새롭게 하소서, 참 좋은 나의 친구, 하나되게 하소서 등 뮤지컬을 77년부터 80여 편의 뮤지컬을 했습니다.”

귀국해 데뷔곡인 ‘웃는 얼굴 다정해도’를 비롯해 ‘노래하는 곳에’ ‘여러분’ 등의 히트곡을 냈다. 특히 그가 성경공부하다 만든 노래 ‘여러분’으로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절절 끓는 열정으로 가스펠송과 뮤지컬로 종횡무진 활동했다.

1976년 에디트 피아프의 생애를 다룬 ‘빠담빠담빠담’을 비롯, ‘사운드 오브 뮤직’ '캣츠'와 전도 뮤지컬 ‘슈퍼스타’ ‘지저스 크라이스트’와 어린이 뮤지컬 ‘피터팬’ 등으로 눈을 돌리며 1세대 뮤지컬 배우로 새롭게 무대 열정을 깨웠다. 이후 무대는 그에게 행복한 공간이 다가왔다고 한다. 한국 뮤지컬에 서서히 관객형성도 바로 그의 활동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의 출연작은 한국 뮤지컬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을 물으니 하나같이 다 귀하다고 하였다.

“자식 같은 작품들이지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어디 있어요?”

▲ 열정적으로 찬양하는 윤복희 권사와 35년간 반주를 맡아 온 김영배 집사                        ©크리스찬리뷰


60년 무대 인생 중 언제가 가장 힘들었냐는 질문에도 비슷한 답변이었다.

“힘든 순간은 없었어요. 부족한 때는 있었지만…. 항상 벅찬 프로젝트를 했으니까요. 지난 60년은 축복입니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생활을 살았잖아요. 무대는 계속 서겠지만 앞으로 무슨 역을 하고 싶다, 뭘 할 것이다 그런 것도 없어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본격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 그의 집은 배우, 제작자들의 아지트였다. 강남 자택은 ‘열공’에 빠진 뮤지컬 지망생들로 넘쳐났다. 당시 그곳을 드나들었던 이들로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제작자 설도윤 설앤컴퍼니 대표,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배우 김갑수, 연출가 한진섭 등이다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항상 뒤에서 든든히 후원해주던 하 목사가 작년에 소천하자 큰 버팀목을 잃은 것과 같았다. 아직도 그 사실을 실감을 못한다고 하였다. “사실 내년에 시드니에 같이 오기로 했는데요”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오뚝이 인생

그에겐 예술인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었다. 코미디언 겸 연출가인 부친과 고전 무용가 모친 사이에서 출생했으니 말이다. 그의 부친은 ‘견우직녀’ 등 한국에서 첫 오페라를 만들었고, 전쟁 때는 예술인 수천 명을 데리고 부산 피난을 내려가 8군쇼를 진행한 윤부길 씨이다.

▲ 시드니순복음교회 집회를 마친 윤복희 권사(가운데)와 김영배 집사 부부     ©크리스찬리뷰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만든 창작극 ‘크리스마스 선물’ 무대에 오른 게 데뷔였어요. 첫 무대 때 아버지에게 ‘세워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며 양철 필통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자해 소동’을 벌여 결국 올라갔는데, 사람들이 계속 시키라고 해서 무대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어요.”

그때 그가 부른 노래는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중 아들레이드 넘버였다. 아역배우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절 ‘꼬마 소녀’의 노래는 객석을 들썩이게 했다. 그리고 세월은 60년이 흘렀다.

“그땐 아역 배우로 제가 유일했죠. 그런데 제 나이 7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0세 때 아버지가 병원에서 돌아가시고 나니까, 제가 돈을 버는 유일한 가장 역할을 하게 됐어요. 그때부터는 살기 위해 각종 오디션을 보러 다니고 악착같이 살아야 했어요. 오빠 학비까지 대야 하는 형편이었으니까요. 부모로부터 예술가 기질을 타고난 게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애를 썼을 뿐이에요. 몰론 무대 서니 극단에 속해 있으니 제가 먹고 자는 것은 해결됐지만요.”

사실 그는 ‘부모의 정’같은 건 잘 모른다고 했다.

“제가 부모님 손에서 자란 게 아니고, 엔터테이너적인 환경과 어른들 틈에서 자랐으니까요. 그러니 부모님이 안 계시니 못 살겠다, 이런 건 적었죠.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투병하실 때 제가 여관에서 생활했는데, 그때 죽으려고 생각했던 적은 있습니다. 자살을 생각한 거예요. 엄마 곁에 가면 춥지도 배고프지도 않을 것 같았으니까요.”

그 어린 시절, 감당하기 어려운 그 질곡의 늪을 무대 위에서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사별한 부모를 뒤로 하고 어른들의 세계에서 거칠고 험한 룰에 적응해가면서. 그의 학교입학도 특이하다.

“다섯 살 때 데뷔해 쭉 무대에서 살았으니까 학교 다닐 생각을 못했죠. 그런데 주변에서 ‘복희가 참 똑똑한데, 학교를 다니면 좋을 텐데’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학교란 게 뭐지? 뭔데 그런 얘기들을 하지? 조금 자존심이 상했어요. 그래서 서울에서 학교 다니던 사촌 오빠를 졸라서 검정고시를 친 거죠.

▲ 인터뷰를 마친 후 윤복희 권사와 본지 편집국장 송기태 목사의 기념촬영                        ©크리스찬리뷰


공연 끝나고 밤에 공부해서 시험을 쳤어요. 중학교부터 들어가려고 했는데, 고등학생으로 합격했죠. 학교생활과 무대 생활을 동시에 했어요. 조퇴를 하고 정문을 나서면 나를 픽업할 택시가 대기해 있고, 그 택시를 타고 삼각지 사무실에 가요. 사무실에서 공연 트럭을 타고 미 8군으로 이동하는데, 그 트럭 안에서 촛불을 켜고 공부를 했죠. 공연 끝나고 집에 오면 새벽 2~3시가 되고, 너댓 시간 눈을 붙인 뒤 등교하는 스케줄이었어요. 고등학교 1년을 다니고 학교 추천으로 서라벌예대(중앙대 전신)에 입학했는데, 그해 10월에 루이 암스트롱의 초대로 미국 공연을 하면서 한국을 떠났으니, 학생 신분은 2년 정도였죠.”

 
루이 암스트롱과의 만남

서울 시내 극장은 영화 상영관으로 바뀌면서 설 곳을 잃은 그는 열 살 때부터 미 8군 무대에 섰다. 당시 세계적인 재즈스타 암스트롱은 미 8군에서 자신의 흉내를 낸다는 ‘앙증맞은 여자 아이’를 찾았다. 이에 얼떨결에 암스트롱 앞에 선 그는 루이 암스트롱의 재즈를 멋지게 소화했다.

루이 암스트롱의 공연 게스트였던 그의 듀엣 공연은 ‘대한뉴우스’에 보도될 정도로 큰 화제가 됐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루이 암스트롱은 주급 400달러를 지급하며 도와주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이렇게 시작된 루이 암스트롱과의 인연은 루이 암스트롱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빠와 딸처럼 인연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는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했다.

“필리핀에서 제가 출연하는 클럽에서 제 목소리를 듣고 영국 매니저가 활동을 제의한 덕에 ‘코리안 키튼스’라는 4인조 여성그룹을 결성해 영국에서 비틀스 곡을 불렀습니다. 다음날 영국 신문 데일리에 나오기도 했어요. 독일의 대통령 취임식에 가서 공연도 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일랜드 공연입니다. 당시 구교와 신교가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공연하는 날은 휴전했었어요. 우리가 그 나라의 아리랑격인 ‘대니 보이’를 1절은 한국어, 2절은 영어로 부르면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그랬어요. 그리고 우리가 떠난 다음날, 공연장이 폭파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죠. 72년 만델라가 수감 중일 때, 미국에서 석방을 위한 외교사절단으로 우리를 보냈는데, 남아공에서 두 달간 순회공연을 한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BBC TV 및 ‘에드 설리반 쇼’ ‘제리 루이스 쇼’ ‘마이크 더글라스 쇼’ 등 당시 최고의 TV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고 미국과 영국 뿐 아니라 스페인, 호주, 뉴질랜드 등 세계무대에 섰다.

“운이 좋았고, 좋은 사람과의 특별한 인연들이 많았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누군가 어디 가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만큼 어릴 때부터 훈련시킨 결과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제가 어떤 욕심과 욕망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 같기도 해요. 전 제게 주어진 기회 때마다 최선을 다했을 뿐이죠. 루이 암스트롱과 우연히 만나 모창에 최선을 다했는데, 그게 결국 듀엣을 하고 계약까지 하게 됐잖아요.”

그는 이같은 삶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 소중한 보물이라고 자평했다. 그는 “제 주제에 안맞게 너무 다양한 삶을 살았습니다. 절대 이렇게 두 번 못삽니다”라고도 했다..〠

 

글/송기태 | 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선교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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