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도착한 시드니 공항. 짐을 싣고 정리하느라 좌충우돌하는 20여 명의 아이들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짓고 서있는 백발의 할아버지! 시골학교 수학여행을 인솔해온 마음씨 좋은 교장 선생님 인상이다. 권위도 내세우지 않고, 직접 짐을 옮겨주기도 한다. 그의 현재 신분이라면, 미대사관이나 영사관에 전화만 하면 알아서 안내하고 모든 경비를 대준다. 일반적인 한국 정치인이라면 공항귀빈실을 이용하며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소위 '가방모찌를 달고' 어깨에 힘을 주며, 손에는 힘을 뺀 채 악수하는 관료적 권위주의가 몸에 배일 법한 위상이다.
그런데 그는 그게 아니었다. 철저히 낮은 자세였다. 악수하고자 내미는 손부터 농부의 그것처럼 두툼했다. 30년 학자의 손, 10년 넘는 정치인의 손이라기엔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는 파격이었다. 아무리 만나도 부담이 안되고, 무슨 말을 해도 '허허'하며 수용할 것 같고, 어떤 실수를 해도 '괜찮아'하며 용납할 것 같은 영락없는 시골 할아버지 인상이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다. 인터뷰가 잘 될 것 같다. 다음 날, 그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 그의 숙소로 가는 길의 잔디 향기와 새소리에 심장이 한껏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타임머신이 70년이나 뒤로 돌았다.
▲ 신호범 박사는 음식 중에 떡볶이를 가장 좋아한다며 한국 방문시에는 대학가 뒷골목을 슬며시 찾아가 한국의 맛을 즐긴다고 고백했다. © 크리스찬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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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다 먹어라
저는 1935년 경기도 금촌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저를 낳자마자 유방암으로 누워버린 어머니는 약 한 첩 못써보고 4년만에 돌아가셨지요. 4살짜리 애를 두고는 머슴살이를 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저를 외갓집에 맡겨두고 정처 없이 머슴길을 찾아 떠나버렸는데 후에 일본으로 가셨어요. 외갓집은 남자 어른들이 모두 돌아가셔서 외할머니를 모신 외숙모가 어린 4남매들을 데리고 사는 딱한 집이였습니다.
6살 때였습니다. 외숙모가 엿을 한 웅쿰 가져오시더니 자기 자식들에게만 나눠주는 거예요. 저도 먹고 싶었어요. 안 주길래 4살짜리 외사촌동생의 엿을 뺏어 먹었는데 참 맛이 좋더라구요. 엿맛도 잠깐이었어요. 저는 외숙모에게 방망이로 숱하게 얻어맞았습니다. 집을 뛰쳐나갔지요. 하염없이 밤길을 걸으면서 밤하늘의 별을 세면서, 엄마 아빠를 부르면서, 새벽까지 통곡했습니다.
그래 서울로 가자. 서울 가서 엿장사를 하자. 엿장사 해서 돈을 많이 벌어 내 언젠가는 엿을 한 아름 안고 금촌에 돌아와서 "옛다 엿먹어라!"하고 통쾌하게 복수하리라는 마음에 그 길로 금촌역으로 가서 서울 가는 기차를 몰래 탔지요.
엿장사를 하기 위한 서울행! 화려한 꿈도 아니었고, 큰 비전도 아니었다. 서울역에 도착하여 일본순사의 가죽장화에 채여 길가 좌판을 힐끗거리며 남대문쪽으로 걸었다. 처음 맞닥뜨린 서울 바닥은 어린 아이에게 엿장사를 할 수 있을 만큼 결코 만만한 곳은 아니었다. 엿판도 없이, 가위도 없이, 더군다나 엿도 없이, 아니면 자본이라도 있어야 할 것인데, 엿은커녕 당장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열 살도 안된, 여섯 살된 어린 꼬마의 '노동력'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 직업은 거의 없었다. 남대문 먹자거리 좁은 길엔 온갖 음식냄새가 코를 진동시켰다. 이리 걸어도 저리 걸어도 누구하나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 간증하는 신호범 박사(시드니제일교회) © 크리스찬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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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와 국수
그러다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솥 앞을 떠나지 못하고 한참 서있으니 뜻밖에 주인 아주머니가 국수 한 그릇을 말아 내밀며 말했다.
추레한 시골뜨기 아이가 불쌍해 보였는지, 장사에 방해가 되어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 '국수 한 그릇'은 만 하룻만에 그의 굶주린 그의 배를 찾아온 큰 손님이었다. 시장이 반찬이었던가?
"콧물을 빠뜨려가며 먹은 그 국수맛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러나 이 얻어먹은 '국수 한 그릇'은 그가 거지로 '등극'하는 첫관문이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거지가 되어 남대문, 서울역 일대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음식 냄새를 좇아 이웃 시장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다. 그의 나이 아홉 살 때, 거지의 이력도 탄탄히 붙어 멀리 수색까지 원정을 갈 정도였다. 3년 정도의 경력을 가진 '꼬마 거지'는 구걸 도중 수색의 어느 초등학교를 지나게 되면서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맞는다.
▲ 자신의 저서에 사인하는 신호범 박사 © 크리스찬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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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공부
"그때 책가방을 메고 다니는 애들이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가 없더라구요. 애들 뒤를 따라 가봤습니다. 제 발길도 자꾸 학교로 향했죠. 그러다 아이들이 `거지새끼'라고 놀리고 때리기까지 했지만 자꾸 학교로 발걸음이 향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어요. 교실 안에서 선생님이 칠판에 '철수야 바둑아 나하고 놀자'를 써놓으면 애들이 그걸 베껴 쓰는 거에요."
어느 해 겨울, 그는 미리 준비한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초등학교를 찾았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교실 안에서는 학생들이 선생님을 따라 공부를 하고 있었다. 창밖에 선 채 용기를 내어 한 글자 한 글자씩 선생님을 따라 칠판에 적힌 글씨를 쓰고 입술을 움직여 따라 읽었다. 복도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보면서 뜻도 모른 채 베껴 썼다.
그때, 뒤에서 그를 붙잡으며 별안간 "요놈!" 소리가 나면서 순경이 방망이로 머리를 내리쳤다. 아이들도 "순사 온다"고 하면 울음을 그치던 그 시절, 너무 무섭고 당황하여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쳤다. 얼음판에 넘어져 그만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순경이 그의 뺨을 먼저 한 대 갈겼다.
"너, 뭐 훔쳤어. 내놔봐!" (그때는 거지들이 좀도둑이었다).
“저, 아무것도 안 훔쳤어요."
그의 손에서 빼앗아간 찢어진 누런 종이 위에 몽당연필로 쓴 낙서를 보고, 전후 사정을 깨달은 순경이 미안했던지 말없이 그를 국수집으로 데려갔다. 먹고 싶은 것을 먹으라고 했다. '도둑공부'라도 하고 싶었던 거지 소년의 마음이 경찰을 감동시킨 것이다.
"그때 순경이 사준 막국수가 얼마나 꿀맛이던지요! 그리고 '어려워도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를 해주었어요, 속으로 '내일 또 와서 방망이로 때려줬으면 좋겠다' 했지요. 그때 저는 약속했어요. '공부하자. 공부해서 선생님이 되리라'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도둑공부'를 하다 들켜 뺨맞고, 국수까지 얻어먹은 것이다. 거지 시절 그가 얻어먹은 '국수 두 그릇'은 그의 삶을 지탱해 주는 한 토막 버팀목이 되었다. 그렇게 글자를 겨우겨우 읽을 수 있을 만큼 깨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거지로서 정규교육은커녕 그날그날 굶주리지 않고 눌 자리만 있으면 세월 가는 것도 몰랐다. 명절에는 공동묘지를 다니며 성묘객들이 남기고 간 음식을 먹으며 포식하기도 했다.
그것도 어렵고 힘들 땐 금촌 외갓집으로 갔지만, 역마살이 끼었는지 얼마 있지 않아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했다. 그 사이 부친은 재혼을 하여 영등포에 단칸방을 마련하여 살았지만, 그곳에서도 어렵기는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이복동생들까지 여럿 있었다. 더구나 방 한 칸에 여섯 식구가 옹기종기 사는 궁핍한 살림이라 그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차라리 거리에서 구걸하는 것이 더 편했다.
집에서 겉돌다가 다시 거리로 나와 거지 깡통을 들고 말았다. 순대 찌꺼기 같은 노점상들이 던져주는 음식을 받아먹거나, 서울역 광장에서 구걸한 돈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마저도 없으면 쓰레기통을 뒤져야 했다. 추운 겨울이면 따뜻한 봄을 기다렸고, 비오는 날이면 날이 개기만을 기다렸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점점 지나는 사람들의 조롱과 경멸의 눈초리에도 무덤덤해졌다.
▲ 시드니 옥타 모임에서 강연하는 신호범 박사 ©크리스찬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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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하고 해뜰 날
어느 날, 이 거지소년에게 '쨍-하고 해뜰 날'이 찾아왔다. 일대 전환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미군들이 들어왔다. 미군 트럭이 먼지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미군 트럭을 쫓아다니는 재미는 대단했죠. 트럭을 향해 `기브 미 꺼므' 같은 되지도 않는 영어로 소리치며 쫓아가면 미군들이 초콜릿도 던져주고, 껌도 던져주고…."
그 날도 미군들이 던져주는 초크릿과 껌을 받아먹으며 용기를 내어 차에 매달렸다. 고맙게도 미군이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생각 없이 그 손을 덥석 잡고 트럭에 올랐다. 때가 꼬질꼬질한 옷과 얼굴이 한눈에도 그가 고아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미군들은 그를 데려가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로 일하게 하였다.
그는 미군 장교들의 심부름꾼으로 일했다. 장교 7명의 군화 닦는 일부터 새벽에 일어나 세숫물을 받아오고, 식사를 나르고, 빨래를 하고, 군복을 다리고, 하루 종일 잔심부름을 했다.
거리를 다니며 얻어먹으며 터득한 '눈치'가 하우스보이로 적응하는데 요긴했다. 그는 '구드 모닝가 싸'(Good morning, sir)라는 되지도 않는 영어발음을 씩씩하게 외쳐대며 총알처럼 빠르고 부지런하게 일했다. 미군들은 그런 그에게 `벅샷'(buckshot, 사슴 사냥용 총탄)이란 애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하우스보이 생활은 더 이상 끼니 걱정과 추운 겨울에 얼어죽을 걱정을 안해도 되었다. 더구나 월급까지 주어서 거지생활에 비하면 그야말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민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날은 맑게 개인 날이 많았다.
물론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애를 먹은 적도 많았고, 미군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은 물론 도둑이나 살인누명을 쓰기도 했다. 그런 날은 너무 외롭고 슬퍼서 많이 울었다.
이때 그는 폴 대위를 만났다. 치과의사로 군의관이었던 폴 대위가 그를 꼭 껴안아주며 위로해 주었다.
"너 왜 우느냐? 미국에 내 아이들이 셋이 있는데 그들이 울면 내 가슴이 아프다"
폴의 포옹이 그의 인생에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 폴에게 점점 인간적인 신뢰를 느낀 그는 최선을 다해 섬겼다. 무더운 여름날 찬물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그를 위해 3m 깊이나 되게 땅을 파고 그 속에 물통을 넣었다. 그러면 땅의 차가운 기운으로 물이 조금이라도 더 시원해질 것 같아서였다.
폴도 그를 신뢰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폴이 배움에 목마른 성실한 그에게 물었다. "너를 양자로 삼고 싶은데, 나를 따라 미국으로 갈 수 있겠냐?"고. 내심 그가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부산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타며 그는 한국 땅을 향해 침을 뱉었다. 가난과 배고픔과 절망뿐이었던 이 땅에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그때 그의 나이 18살이었다.
막상 미국에 갔지만 미국은 쉽게 새로운 삶을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18살이란 나이는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처럼 보였다. 미국에 있던 폴의 아내이자 그의 양어머니와 가족들도 그를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양어머니는 그의 입양을 반대했고, 형제들도 어머니의 편을 들었다. 특히 장남 필립은 장남의 자리를 난데없이 동양 사람에게 뺏기는데 분개했다는 전언이었다.
더구나 공부가 하고 싶어 미국으로 왔는데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그를 받아주는 학교는 없었다.
배움에 주리고 목말라
한국에서 정규교육을 전혀 받아보지 못한 그는, 19살 때까지 글자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아무리 미국이 기회의 나라라고 해도 이런 그에게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처음엔 초등학교에 입학하려고 갔어요. 그런데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안된다는 거에요. 중학교 역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부당했죠. 마지막으로 고등학교엘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이번엔 중학교를 안 나와서 안 된다는 거에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죠."
그가 펑펑 우는 것을 바라본 교장은 "왜 우느냐?"고 물었다. 그는 안되는 영어로 더듬거렸다.
"너무너무 공부가 하고 싶었는데, 그것을 거부당해 서러워 웁니다. 내 꿈이 조롱당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에 오면 나도 공부하는 길이 열리는구나. 또 다른 세상이 열리는구나하고 무지개꿈을 꾸었는데 그게 무너져 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가 울며불며 매달리자 한참 고개를 떨구고 듣다가 손수건을 내어주며 교장은 물었다.
"정말 그렇게 공부가 하고 싶은가?"
그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교장선생은 검정고시(GED)에 합격하면 대학에 갈 수 있으니 그걸 해보라며 권유했다. 원한다면 시간을 쪼개 그를 도와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다른 대안이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발견한 그 길에 그는 최선을 다했다. 새벽 7시면 학교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다 빈 수업시간을 이용해 영어를 배웠고, 오후엔 양부모님에게 생활비 부담을 주기 싫어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등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다시 밤 10시부터 2시간 동안 양아버지로부터 수학과 물리 등을 배웠다. 그리고 새벽 2시까지 복습을 하고, 다시 5시에 일어나 예습을 했다.
처음부터 영어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게다가 영어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몰라 영한사전을 찾아보아도 한글을 제대로 모르는 그가 사전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리도 없었다. 외우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도 무작정 파고들었다. 심지어 영어사전을 태워 재로 만든 후 물에 섞어 마시면 기억이 잘 될까 싶어 그렇게 해보기도 했다.
입술이 부르터 피가 나고, 하루에도 수없이 코피가 터졌다. 손수건으로는 부족해 항상 휴지를 가지고 다녀야 했다. 나중에는 얼굴까지 터져 피가 흘렀다. 말 그대로 '피 터지게' 공부했다. 그렇게 해서 1년 반 만에 검정고시 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미국이 그에게 대학에 입학할 자격을 허락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제도권 교육으로는 초등학교도 못 가본 그가 모든 제도권 학교를 건너뛰고 브리검 영 대학으로 입학하게 된 것이다. '공부의 한'을 풀은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돈을 아끼기 위해 학교 근처 월세 17불짜리 지하방에 세들었다. 커텐도 없이 침대보로 대충 창문을 가렸다. 주방시설도 안돼 있어 히터 파이프에 통조림을 올려놓고 나갔다 오면 그새 미지근해 있는 그 통조림에 뜨거운 물을 부어 빵과 함께 먹으며 돈과 시간을 아꼈다.
그 열악한 공간에서 그는 외교관의 꿈을 키웠다. 처음엔 떨어졌고, 두 번째는 붙었다. 합격의 기쁨보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성취감, 가능성에 대한 자신감이 더 좋았다. 그런데 국무성에서 날아온 편지가 그의 가슴을 철렁이게 했다.
"미안합니다. 외교관은 시민권을 얻은 후 9년 3개월이 지나야 자격이 주어집니다."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도저히 주저앉을 수 없어 그는 국무성에 편지를 썼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되었기에 그만큼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 저는 동서양을 모두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얼마 후 구구절절한 장문의 편지와는 대조적으로 짤막한 편지가 왔다.
"당신의 안타까운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미 정해진 법이 있으니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기간이 찰 때까지 공부를 더 하시겠다면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장학금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외교관을 양성한 피트버그 대학을 추천해 주었다. 등록금에 생활비까지 포함된 내셔널 디펜스 펠로십 장학금을 받아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늘 공부에 굶주려온 그에겐 전화위복이었다.
▲ 본지가 샛별전통예술단을 초청하여 개최한 `한국예술제'에서 사회를 맡은 신호범 박사 ©크리스찬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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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에서의 청혼
이때 쯤 그는 캠퍼스에서 피츠버그 출신으로 수업 시간 내내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항상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공부하는 한 여학생, 다나를 만났다. '엄마의 말에 따라' 항상 치마만 입는 여학생이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란 영화를 보고 그녀의 아파트 앞에 차를 세워놓고 용기를 내어 프로포즈를 했다.
"다나, 아무래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은 나와 결혼하고 싶다는 뜻인가요? 저도 생각해봤어요, 결혼할 수 없다고는 생각 안해요, 하지만 아직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언뜻 들으면 승낙인지 거절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같지만, 완곡한 거절이었다. 낙담한 그는 빨리 포기하려고 애썼는데, 몇주 후 먼저 전화가 왔다.
그는 지도를 펼쳐 공동묘지를 찾았다. 묘지는 그에게 항상 두려움을 없애주고 평안을 주는 곳이었다. 아마도 어린 거지시절 명절에 공동묘지에 성묘객이 남긴 음식을 먹으며 무덤 사이에서 포만감으로 잠자던 영향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그 여학생을 폭스바겐에 태우고 공동묘지로 몰았다.
"여긴 왜 오셨어요?"
"나는 묘지가 더 편안합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줘요, 괜찮으시면 그냥 여기서 이야기하죠."
"참 이상하시네요."
묘지 잔디밭에 앉아서 다나는 말했다.
"저도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처음에는 당신이 동양인이라서 더 친절하게 대해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하지만 우리 부모님이 반대하시면 할 수 없어요."
"어떻게 하면 허락을 받을 수 있을까요?"
흥분과 걱정으로 뒤범벅이 된 그들은 다나의 아파트 복도에서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야! 나, 결혼하고 싶은 사람 찾았어"
"그래? 어떤 사람인데?"
"폴신!"(신 박사의 영어이름)
"신? 신이라면.....?"
'신'이라는 동양계임을 눈치 챈 다나의 엄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바꿨고, 다나는 그에게 바꿔주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며, 왜 내 딸과 결혼하려는지 설명해 주겠소?"
"저는 브리감영 대학을 졸업하고 가을에 피츠버그 대학원에 들어갑니다. 따님을 사랑합니다.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내 딸을 먹여 살릴 자신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금은 대답할 수 없소, 이곳으로 온다니 그때 봅시다."
일단 시간을 번, 이들 청년 남녀는 서로를 보며 말했다.
"미국 사회가 아직 인종차별이 심한데 부모님이 허락해 주실까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동부는 이곳보다 동양인이 많아요, 더구나 우리 부모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분들이에요."
"부모님께 내가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을지 걱정스럽군요."
"우리 엄마가 더 힘들 거에요. 그리고 엄마는 옷을 단정하게 입는 사람을 좋아해요."
어릴 땐 주워입고, 미국에 온 이후에는 얻어 입고, 자립한 이후에는 구세군 창고에서 구제품을 사입던 그에게 좋은 옷이 있을리 없었다. 미래의 장인 장모 앞에 선을 보기 위해 거금을 들여 새양복을 준비하고, 폭스바겐에 짐을 싣고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로 향했다. 예비 장인의 심문이 시작됐다.
"대학원을 마치면 뭘할 건가?"
"외교관이 되려고 합니다."
"자네와 내 딸의 결혼문제는 더 두고 봐야겠네"
당장 반대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하숙집에서 학교에 다니고 주일이면 교회에서 다나의 가족들을 만났다. 가끔 식사 초대를 받기도 했다. 어느 주일 저녁 식사 중에 뜻밖의 제안을 했다.
"여기서도 다닐 만한데 아예 우리 집으로 들어오면 어떨까?"
"무슨 말씀인지?"
"우리 집으로 들어오라는 말일세. 당장 가서 짐을 챙겨오게나!"
서둘러 하숙집으로 가 짐을 싸들고 왔더니 다나가 쓰던 2층 방을 내주었다. 안정된 '예비처가살이' 덕분에 성적은 잘 나왔다. 그곳에서 '장래 사위'로서의 여러 가지 검증(?)을 거쳐 마침내 결혼허락이 떨어졌다. 당시 펜실베니아주 법으로는 국제결혼이 허락되지 않아 국제결혼을 허락하는 캘리포니아주로 10시간이나 달려 혼인신고를 하러 갔다. 이때 그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제까지 다나가 대학을 졸업한 성숙한 아가씨라고 생각해 왔는데,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월반을 해서 이제 겨우 열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스물 여덟 살이었던 저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이제 겨우 소녀티를 벗은 아가씨를 아내로 맞게 된 것이지요."
교회에서 가족들만 모인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교회 감독도 걱정이 깃들인 주례사를 했다.
"미국은 축복받은 나라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문제가 많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믿고 인내하며 하나님만 의지하여 모든 고난을 이겨내기 바랍니다."
이듬해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과정을 계속하자니 피츠버그 대학의 동양사 분야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결혼한 그는 직장도 구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브리감영대학 하와이대학에서 강의를 맡기로 했다. 그의 교수로서의 첫출발인 셈이다. 환상의 섬 하와이, 야자수와 철썩거리는 파도소리가 어우러진 교수 사택은 이들 부부에겐 가히 환상적이었다. 먼저 살던 사람이 두고간 자전거로 첫출근을 했다.
▲ 시드니제일교회 간증집회 후 당회원들과 떡볶이를 나눈 신호범 박사(왼쪽부터 이갑용 장로, 노정언 장로, 신호범 박사, 조삼열 목사, 지성택 장로 ©크리스찬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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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교수님
"배정받은 연구실로 들어서다가 문에 붙은 제 이름에 눈길이 닿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내가 교수라니...' 연구실 안에 들어가니 책장 안에는 주문해 놓았던 책들이 벌써 꽃혀 있었고, 참고서적들도 즐비했습니다. 창밖으로 책을 낀 학생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가슴이 뛰었습니다. '영어도 완벽하지 못한 내가 잘 가르칠 수 있을까? 80명 교수 중에 유일한 동양인인 나를 학생들이 잘 따라줄까?'를 생각하니 한편 두렵기도 했습니다."
순간, 그는 눈을 감았다.
`하나님, 당신의 지혜로 채워주시고, 용기로 입혀 주셔서 학생들을 잘 지도하게 하소서!'
하와이의 추억이라면 한국말과 관련한 것이었다. 대학 시절, 무작정 하와이 총영사에게 요청하여"나 이런 사람이니 한국 사람과 결혼하고 싶소. 한국 여성을 소개해 주시오"하여 소개받은 어느 유학생에게 청혼했다가 한국말을 몰라 거절당한 것이다.
그 이후 그는 '내 기어이 한국말을 배우고 말겠다'는 결심을 마음판에 새기고 그의 강의를 듣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물어 극복해가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에, 고국 떠난 지 11년만에 고향을 찾았다. 친아버지를 비롯하여 일가친척을 만났다. 백인 아내를 데리고 온 그를 대환영했다. 그는 처음 '엿사건' 때문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갔던 일을 생각하며, '복수용 엿'을 사갖고 갔다.
"그게 60년대 초반이에요. 신촌에서 용달차에 엿을 잔뜩 싣고 고향엘 찾아가 동네 꼬마들 수십 명에게 엿을 풀어줬더니 아주 좋아하더라구요. 외숙모와 사촌동생들에게는 엿이 아닌 집을 한 채 사드렸구요."
이후 계속하여 박사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시애틀 워싱톤 주립대학으로 갔다. 내심 입학허락이 난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었지만 주립대에 비해 학비가 5배나 되었다. 워싱톤주립대에서 그는 한국인 멘토를 만났다. 바로 한국학 교수인 서두수 박사였다.
"서 박사님은 연대 교수와 성군관대 학장을 지내고 하와이 대학에 한국학과를 세우신 분입니다. 그분의 첫마디가 바로 '신 군! 자네 한국말을 배워야겠네'였습니다. 그동안 한국말을 배우려고 애써왔지만 공부에 전혀 체계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어릴 때 쓰던 상스럽고 험한 말이어서 차라리 잊는 편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서 박사님에게 일 주일에 두 번씩 찾아가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한국말이 어느 정도 자리잡혀갈 무렵 그의 학과에 교환교수로 온 고병익 박사(서울대 인문대학장과 총장 역임)를 만났다. 그의 첫마디도 똑같았다.
"자네, 한국 사람 아닌가? 한국말 배우게!"
한국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가진 한국사학자인 고 박사로부터 한국 고대사와 현대사를 배우며 비로소 그는 한국을 이해하는 한국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동양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시애틀 근교 쇼라인 대학, 메릴랜드 대학에서 31년 동안 교수로 봉직했다.
꿈과 도전
"ABC도 모르는 놈이 초등과정 중등과정 고등학교과정을 14개월만에 통과하고 대학교에 입학했어요. 저는 그때부터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3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습니다."
이 한 마디는 그의 처절하고 치열한 삶이 묻어있다. 그러나 그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정계로 진출하기로 했다. 92년 워싱톤주 하원의원으로 출마했다. 그가 출마한 워싱턴주는 백인지역으로 유색인종의 진출자체가 원천적으로 막힌 것처럼 보이는 지역이었다.
"9개월 동안 매일 11시간씩 가가호호 방문했습니다. 발이 닳다가 터져서 피가 나기 시작했어요. '제가 워싱턴주 상원의원에 출마했습니다. 도와주십시오'하면서 말입니다. 문전박대도 만만찮았습니다. 한 번은 백인 노인이 욕설을 퍼붓고 나왔습니다. '너희들 동양인이 왜 미국에서 사느냐. 고 홈! 너희나라로 돌아가!' 개를 쫓듯 했습니다. 맞섰지요. 순간 하나님께서 참으라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나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곳이 나의 집입니다. 나는 이곳에 산 지 45년이 됐습니다. 나는 대학교수로 31년간 당신의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나는 미국군인으로 독일에서도 복무했습니다. 이동네 YMCA에서 수십 년간 봉사프로그램에 참여해 오고 있구요. 동네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세금도 45년간 꼬박꼬박 냈습니다. 이 나라는 이민의 나랍니다. 당신의 선조도 이민 왔지 않습니까? 당신의 선조가 나보다 먼저 이민 왔으니까 당신이 먼저 가십시오. 그러면 나도 따라 나가겠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이 엠 쏘리. 내가 너를 돕겠다' 그는 2달 동안 내 손을 잡고 집집마다 찾아다녔습니다. 정치헌금도 모아주었습니다. 70이 넘은 그분은 저를 `영 브라더'라고 형제로 불렀습니다. 저는 당선됐습니다."
그런데 상원의원으로 진출하여 96년 주지사에 출마하여 아슬아슬하게 0.8%(120만 유권자 중 5800표차)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엄청난 절망이 몰려왔다. 이때 그는 우리 민족사의 슬픈 현장을 찾았다.
"우리 민족의 비극의 현장인 우즈베키스탄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한임마누엘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사업가로 있다가 돈도 많이 버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62세 때에 암에 결렸다가 나머지 평생을 주님께 바친다는 마음으로 목사가 되어 선교사로 타쉬켄크에 가셔서 이것저것 많이 경험하신 분이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희생자들, 37년도에 러시아에 있던 한인 17만 명을 스탈린이 화물차에 실어 멀리 카작스탄에 보내어 버리려고 했지요. 그곳 우리 동포들인 고려인들이 그 참혹한 고통을 딛고 생존한 것이지요."
이곳에서 그는 잊지 못할 할머니를 만났다. 바로 '조선아' 할머니였다. 바로 일제시대 때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31년도에 일본이 만주를 침범하자 하바로프스크로 이주하여 '대한독립군'에 몸 담았던 독립운동가로 화가이자 시인인 '조명희 선생'의 딸이었다. 그 할머니의 말이 가슴에 저려왔다.
"37년도에 스탈린이 우리 민족을 다 모아 카작스탄에 던져버릴 때, 우리 아버지는 기차 안에서 스탈린 반대운등을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라가 없더라도 인간인데 어떻게 우리를 화물차에 실어 보냅니까?'하며 소련군의 총에 맞아 달려가는 기차 밖으로 던져졌습니다. 이름모를 벌판에 한줌 흙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고국 생각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부르고 싶어 내 이름을 `조선아'라고 지었습니다."
그 말 듣고 신 박사는 다시 용기를 얻었다. '그까짓 선거에 졌다고...아무리 어려워도 정글까지 끝까지 가보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뛰었다. 그에게 용기를 주었던 조선아 할머니는 2년 후 유명을 달리하여, 장례식에 가서 많이 울었다고 하였다.
▲ 시드니한인회관에서 열린 비전강연회에서 청년들과의 질의응답 시간 ©크리스찬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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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날, 아시안, 한국대사
그가 상원 부의장으로 된 것도 재미있다.
"부의장이 되려면 상원끼리 찍어줍니다. 15년 정도 봉사해야 인정하고 찍어줍니다. 그런데 저는 3년 만에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어느 상원의원이 의회 개회 때나 법률을 제출할 때 의사당에서 미리 기도하는데, 미국에서는 종교와 정치를 구분하는데, 기도는 기독교이기 때문에 비헌법이니 기도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기도를 폐지하고 그 대신 음악이나 시낭독으로 바꾸자는 법률을 제출했습니다. 제가 그것을 이런 요지로 반대했습니다.
'미국은 이민의 나라이다. 세계 방방곡곡에서 이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께서 축복해서 이렇게 되었다. 어떻게 나라의 지도자로서 기도를 못드리는가? 기도는 해야 한다. 음악도, 시도 하고 싶으면 해도 좋다. 그렇지만 기도 먼저 한 다음 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투표를 했습니다. 제가 제출한 법이 2표로 이겼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기도하고 회의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2주일 후에 어느 상원위원이 일어서서 '의장님, 저는 폴 신을 부의장으로 추천합니다'해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추천한 사람은 공화당, 저는 민주당입니다. 반대당이 추천한 케이스는 없었습니다. 저보다 더 놀란 사람은 공화당 의장입니다. '당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표정이었지요. 한 시간 이상 모임을 한 다음, 의장이 '당신 그것 취소하지 않으면 정치 못하게 할 것'이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5표로 이겨, 부의장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하도 궁금해서 '왜 반대당인 나를 추천해줬는지?' 찾아가 물어봤습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오' 정말 간단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이런 것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참 놀라왔습니다."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다음 그는 법률을 하나씩 하나씩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통과시킨 법률은 1903년 인천 제물포를 한인 102명(57명이 기독교인)이 떠나 하와이 도착하여, 한인들의 미국 이민이 시작된 1월 13일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하루 16시간씩 일하면서 하루 96센트 벌면서 교회 헌금하고, 독립운동 자금으로 이승만, 안창호 선생을 지원해온 눈물겨운 이민사가 서린 날이다.
"그래서 2003년부터 미국 교민들은 매년 1월 13일은 한인의 날로 지켰습니다. 200만 동포가 우리 선조를 생각하며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이렇게 잘살고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1월 15일을 마틴 루터 킹 날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키는 한인의 날을 연방정부에서 한인의 날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조상들과 과거를 생각하고, 장래를 위한 날이 되도록 말입니다. 특별히 한인 후손들을 생각하여 정해진 날입니다.
한국 정부에서도 알고 '해외동포의 날'로 정하려 하자 일본, 중국 동포들이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10월 5일로 정해졌습니다. 마침 10월 3일은 개천절로 해외동포들이 모일 수 있는 날이 되어 연방정부와 한국정부의 큰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가 상원 당선되자마자 또 하나 제출한 법률은 '오리엔탈'이란 용어를 '아시안'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16세기 영국 사전을 보면, 런던의 동쪽을 오리엔탈이라 했는데, 인도, 파키스탄, 동남아, 중국, 한국 일본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리엔탈은 '코가 넙적하고, 눈이 생선처럼 작고, 키가 작고, 머리가 동그랗고, 까맣고, 신비스럽고 믿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정의를 했어요. 한마디로 15세기 식민지문화를 약화시키기 위해 오리엔탈이란 용어가 나온 것입니다. 그 사전을 복사하여 제출했더니, 그 단어변경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나라에서 연락왔습니다. 이제까지 의미도 모르고 사용하던 단어가 바뀐 것입니다.
미국서 흑인들을 '니그로' 하던 것을 63년도에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니그로'는 '노예'란 말인데 우리는 자유민이다 하여 그 단어를 못쓰게 바꾸도록 한 것과 똑같습니다. 오리엔탈을 아시안으로 바꾼 그날,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셋째 아들이 전화로 '우리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제일 먼저 당신에게 감사드릴 것입니다. 이번에 오리엔탈을 없앤 것은 우리 아버지가 한 일과 똑같습니다'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지금도 흑인보고 '니그로'라 하거나, 동양인 보고 '오리엔탈'이라고 하면 법의 제재를 받습니다. 동양계 많은 사람들이 고마워했습니다. 이런 얼굴이 정계에 들어가니 이런 법을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법이 통과되고 상원의원에 당선되니 한인사회에서 굉장히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정치장학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앞으로 미국의 50주에 적어도 한 명의 정치인을 배출하는 것이 목적이다.
"한민족이 나그네로 미국에 이민 왔지만 21세기엔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며, 30년 안에 미국에 한인 대통령이 나오는 것이 목적입니다. 호주나 미국이나 민주주의 국가로 선거권이 있으면 피선거권도 있습니다. 호주에서도 열심히 하여 30년 안에 호주 수상이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는 그런 가능성을, 93년도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홍콩에서 만났을 때 확신했다고 한다.
"악수라도 했으면 했는데, 그분이 점심까지 쏘셨습니다. 그분이 '미국 역사를 보면 300년 역사에 아일랜드 민족은 천주교를 소개했고, 프랑스 사람들은 아름다운 미술을 소개했고, 독일 사람들은 기술을 소개했고, 중국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소개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미국에 와서 교회를 짓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립니다. 21세기에 미국이 도덕적으로 망할 때 한민족은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해 줄 나라이고, 지도자가 될 나랍니다'라고 해요.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지금 미국에 한인교회 4천 개입니다. 미국 이민 사회에서 교회가는 민족 가운데 한국 사람들이 제일 많습니다. 한국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지도자가 되어야 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날을 우리는 준비해야 합니다."
클린턴 전 대통령 시절 그가 주한대사 물망에 올랐다.
"96년도입니다. 26명이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신청도 안했는데, 신청서가 배달되어 왔습니다. 뜯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미국 역사를 보면 대사에는 이민 1세가 모국으로 간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한테 그런 편지가 왔습니다. 그래서 써보냈습니다. 26명 중에서 3명을 뽑아 대통령에게 제출하고 면접을 합니다. 인터뷰 때 한미관계, 무역관계, 교육관계, 정치관계, 핵무기 관계, 남북관계 등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성실하게 대답했습니다.
마지막 국무성 담당자가 질문했습니다. '신 박사, 만약 당신이 주한대사가 됐다고 합시다. 그럴 때 한국과 미국이 전쟁이 일어났다면 때 누구 편을 들겠소?' 하도 기가 막힌 질문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질문은 개인적인 질문이므로 가슴 아팠습니다. 그 답은 어려운 것이지요, 눈을 감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당신 질문 고맙습니다. 내가 이 답은 준비한 것도 연습한 것도 아닙니다. 내 가슴속에서 말씀드립니다. 미국은 나의 아버지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 사랑을 받았고, 가족을 얻었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그 대신 한국은 어머니 나라입니다. 나를 낳아 주었고, 길러 주었고, 문화를 준 나라입니다. 내가 얼굴색을 바꾸려고 몇만 번 목욕을 해도 바꿔지지 않습니다. 지금 당신 질문은 '엄마와 아빠가 싸우면 누구 편을 들겠느냐?'고 하는 것인데. 당신은 누구편을 들겠습니까 하니, 그가 당황하며 얼굴이 빨개지더군요, 그래서 그랬습니다. '나의 편은 나의 엄마 아빠가 화목하여 평화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내 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제가 대사가 안된 이유는 이민 1세가 모국으로 대사가 안된다는 원칙 때문입니다. 그걸 깰 뻔했지요. 지금도 여전히 안됩니다."
▲ 한국예술제공연이 끝난 후 본지 김명동 편집인과 송기태 편집국장이 신호범 박사와 최지연 단장에게 꽃다발을 증정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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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대한 오해와 진실
신 박사에 대하여 몰몬교 신자라는 오해가 많이 있다. 그것은 그의 양부모의 신앙 때문에 상당기간 몰몬교에 몸담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개종한 상태이다.
"저를 입양해주신 양부모님은 참으로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아무 것도 아닌, 거지였던 제가 오늘 이런 모습으로 있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신앙이 뭔지도 모른 시절 그분들 따라 몰몬교에 나갔습니다. 종교라는 건 개인적인데, 성경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고, 성경에 다 있는데 몰몬경이 왜 나왔을까? 성경이 우리에게 어긋나는 것이 있는가? 목사님들 몇분 모시면서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여쭸습니다.
유명한 동화작가인 안성진 목사님을 친구로 만났습니다. 6.25 때 피난하면서 형성된 그 분의 삶과 신앙이 너무너무 존경스럽습니다. 제가 대학에 있을 때 섬머 스쿨 학생들 데리고 목사님 내외분과 함께 중국이나 유럽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분 말씀이 '개인적인 친구로서, 목사로 충고한다. 몰몬에서 나와 개종하라'고 하셨어요. 그분의 권면도 있고, 개종할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1997년부터 시애틀 베나니 교회로 나가 세례받고 지금은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몰몬교도들은 지도자급이 나간다니 걱정도 하고 질투도 했지만 한국의 여러 이단처럼 죽인다는 협박같은 것은 없었다고 했다.
그는 그 자신이 입양아이듯이 아이들도 백인과 한국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을 입양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인 입양아들과 그들의 양부모들을 위한 단체를 조직해 입양아들이 미국 속의 한국인으로 바로 자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아이를 입양한 한 미국인이 저에게 편지를 했어요. 자신들은 정말 잘 해주고 있는데도 아이가 방황하고 있다며 절더러 도와달라는 거에요. 그래서 그 아이에게 갔죠."
처음엔 아이가 농구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았다. 아이도 백인들만 있는 마을에 얼굴 모양이 같은 동양인이 나타나니까 관심을 보였다. 둘은 금세 친해졌다. 그는 아이에게 자신도 입양아 출신이라며 힘들지 않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꺼냈다.
“아이가 그러는 거에요. 양부모님은 다른 백인 아들이 잘못하면 때리는데, 자기가 잘못하면 안 때린다는 거에요. 그건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손님으로 생각하는 증거라고. 자기는 정말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겁니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며 잠시 말이 끊겼다. 그 눈물의 의미를 모두 이해하기란 불가능했지만 낯선 이국 땅에서 혼자 고립되어 살아야 하는 입양아들의 고뇌와 고통이 그의 눈물 속에 묻어 있다는 것은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처음 입양아들로 구성된 샛별 예술단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斂?있다.
교수, 박사 출신, 상원 부의장인 그는 '거지생활', '하우스보이', '입양아' 등 인간의 가장 극단적인 경험을 했다. 극도의 결핍과 외로움 가운데서 '존재의 의미'를 처절하게 질문하며, 끝없이 달려왔다. 그의 말처럼 '별을 세다 별이 된 인물'이었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선교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