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나환자들의 친구’ 매견시 목사 자서전-4

부산, 때 묻지 않은 어린이들 (2)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8/27 [17:19]
나환자 수송위한 병원선 운영

부산의 「나환자의 집」은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부산의 도심에서 바로 바다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도심에서 한 시간 정도의 도보거리였다. 이곳에 입소를 원하는 사람은 매일 있었는데 정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입소할 방이 준비되는 대로 입소허가증을 발급하여 입소시켰다. 그들 중에는 걸을 수 없는 사람뿐 아니라 기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의 집」으로 오는 길은 해변을 따라 항구를 돌아 3마일이나 되었다. 이런 환자들의 수송을 위하여 병원선을 운영하여 그들의 하늘 가는 마지막 길을 도와 주었다. 나는 어느 날 병원선의 상륙지점에서 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거기서 일어난 일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나병을 앓고 있는 한 어린 소녀를 내 발 앞에 내려놓았는데 그 어린 것이 나뭇잎사귀 떨듯 떨면서 얼굴을 들고 나에게 물었다.

“그들은 나를 죽일 것입니까?” 하였는데 사연인 즉 한 부인 선교사가 건너편 길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길을 건너갔다. 그 여자 선교사는 그곳에서 한 어린 소녀가 길 가운데서 손과 무릎으로 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어린 소녀는 흰털 장갑과 구두 한 켤레를 가슴에 꼭 안고 있었다. 정말 눈으로 볼 수 없는 가련한 장면이었다. 그 여자 선교사는 인부 한 사람을 고용하여 우리의 병원선에 태워 「우리의 집」에 입소시키기 위하여 내 앞에 데리고 온 것이다.

나는 며칠 후에 그 소녀를 다시 만났는데 어떻게나 많이 변했는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그 소녀는 깨끗한 흰 옷을 입고 잘 빗은 단정한 머리에 미소를 짓고 있는 행복한 아이로 변해있어 며칠 전의 불쌍한 애원자가 아니었다.

우리들의 병원선은 정말 유용한 재산이었다. 초기에는 배에서 상륙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우리의 집」에 머물고 있는 많은 나병 노동자들이 약 50m 길이의 부두를 직접 건설함으로써 하선하는데 아주 편리하게 되었다.

우리들이 「나환자의 집」을 시작한 초기에는 정부의 원조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관계 관리들은 점차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일찍이 눈을 뜨게 되었다. 경상남도 도지사의 개인적인 방문과 관리들과의 만남의 의해서 「우리의 집」에 대한 실질적인 도움을 간청하고 또한 나환자들을 위해서 집행해야 할 추가적인 일들을 재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들이 나환자들을 위해서 여러 방면에 걸쳐 실시한 일에 대하여 관리들은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후원의 손길들

부산에서 뿐만 아니라 순천과 대구에서도 행정관리들의 감사표시가 있었다. 순천과 대구에서도 미국의 「장로교 선교회」에서 나병에 대한 사업을 성공적으로 실시하고 있었다. 부산의 「나환자의 집」에서는 매년 21,000엔(약 2,100파운드)의 보조금을 정부로부터 받았다. 이러한 큰 보조는 당시의 조선 총독 사이또 해군대장의 덕택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나환자에 대해서 행한 일내 항상 감사를 표시하였고 또한「조선총독부」의 세입부문에서 우리 사업을 도와줄 것을 승인하도록 일본 본토 정부에 요청하였다. 후에 사이또는 일본 수상이 되었으며 일본 천황의 수석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그와 그의 내각은 장차 닥쳐올 일본의 파멸을 예견하고 이것을 막기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군인당은 하루 저녁에 육해군 장병들을 시켜서 사이또를 포함한 대부분의 내각을 살해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의 파멸이 시작되었다.

일본 황실은 한국 내의 모든 「나환자의 집」에 대한 실제적 동정은 관대하였다. 사이또의 추천에 따라서 일본 천황은 일 년에 100엔을 그리고 천황의 어머니는 500엔의 돈을 「나환자의 집」에 기부하였다.

새 천황의 대관식에서 순천의 윌슨(Wilson)의사, 대구의 플렛처(Fletcher)의사 그리고 부산의 필자 등 나병사업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을 택하여 파란색 리본의 훈장을 수여하였다. 그밖에 더 많은 혜택을 받았는데 천황의 어머니로부터 1,500엔의 특별선물을 받았다. 그 돈으로 라디오, 재소자들이 연주할 수 있는 브라스밴드 기기, 테니스, 축구, 탁구 등 운동기구를 사들였다. 이 운동기두들은 환자들의 회복을 위해서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맥켄지 부인은 「나환자의 집」뿐만 아니라 인근 시골 교회에서 주일학교와 성경학교를 개교하여 아이들과 주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떤 주일 아침 시골에서 예배가 끝난 후에 정말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일이 일어났다. 맥켄지 부인의 말을 그대로 전하면 다음과 같다. 

제임스 노블 맥켄지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자료사진

나병 걸린 한 소녀 

주일 아침 예배가 시작된지 얼마 안되어 교회 창문 밖에 앉아있는 어린 소녀 하나가 나의 주의를 끌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교회의 부인들이 평소와 같이 다정하게 선교사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하여 앞으로 밀고 나왔습니다. 그때 그 중의 한 여인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부인 여기에 동네에서 온 한 소녀가 있습니다. 부인에게 이야기하고 싶어합니다.”해서 나는 그 여인을 따라가 한 소녀를 만났는데 바로 예배시간에 창문 밖에 앉아있던 소녀였습니다. 그 소녀는 한국에서 어른을 만났을 때 통상적으로 하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 일어나 서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그 소녀를 자세히 바라보니 나에게 무엇인가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내가 바로 옆에 있어서 그런지 겁이 많고 신경이 예민한 아이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소녀 옆에 앉아서 그의 떨고 있는 손을 잡고 그를 안심시키면서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너를 만나서 반갑다.어디서 왔느냐? 나를 아느냐?”

그 소녀는, “아니요, 나는 부인을 모릅니다. 전에 만난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웃에 사는 친구가 어제 주일학교의 부인반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돌아와서 나에게 정말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부인은 내 친구에게 구세주께서 문둥병을 고쳐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어젯 밤 한숨도 자지 못하고 그 놀라운 소식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어머니를 졸라서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오! 부인! 나에게 말씀해 주세요. 부인의 구세주가 정말 나를 고쳐 줄 수가 있습니까?”

그 소녀는 말이 끝나자 그의 손을 내 손 앞에 들여 올렸습니다. 그의 손은 벌써 뒤틀려 있었고 몇 개의 관절이 손가락부터 떨어져 있었으며 손목에는 궤양성의 흠집이 나있었습니다.

아! 슬프게도 나는 한눈으로 그 소녀는 나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 불쌍한 그 모습이여! 무서운 병과 싸우면서 아픔과 괴로움이 그 어린 나이 어린 희생자의 얼굴에 완연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내 얼굴에 그려진 비탄과 고민을 잘 알지 못하는 그 소녀는 다시 외쳤습니다.

“오! 부인! 나는 너무 늦은 것이 아닙니까? 그 구세주는 나를 고쳐 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무 늦어버린 것입니까?”

나는 “얘야! 아니야 늦은 것이 아니야”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쉬운 말로 주님의 구원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고 그 구세주가 세상에 계실 때 너와 같은 사람을 고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슬픔이 있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었으며 우리에게 자기의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이심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열중해서 내 말을 듣는 사람을 본 일이 없었습니다. 내가 말을 멈췄을 때 그 소녀는 “오! 이 말씀은 참으로 훌륭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소녀는 글을 읽을 수가 있어서 나는 성경을 선물하고 전도사는 찬송책을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 소녀의 기쁨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부인이 떠나고 없을 때에 성경을 읽으면 구세주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물론 이해할 수 있지. 하나님을 항상 너와 함께 계신단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께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소녀는 다시 나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물을 때 내 말을 들어 주실까요?” 그리고 “나는 기도를 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기도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주었더니 “오! 훌륭하다 훌륭한 은총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소녀는 불쌍한 그의 몸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구세주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 소녀는 자기의 불멸의 영혼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미칠 듯이 기뻐하며 모든 육체적인 요구는 잊어버린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이 나환자 소녀는 진정 믿음이 깊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그의 어머니와 남동생 등 모든 식구가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소녀는 최근 병이 악화되어 걸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올 때에는 들것에 실려야 하는데 그는 교회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되었습니다. 

맥켄지 목사 부부와 헬렌 그리고 케서린  ⓒLucy Lane

어린이의 집 개소

나병은 유전성이 아니다. 나병 환자들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가장 슬프게 하는 일 중의 하나는 많은 건강한 아이들이 나병에 걸린 친척들과 계속 접촉함으로서 나병을 옮겨 받는다는 사실이다. 건강한 갓난아기를 가슴에 안고 「나환자의 집」으로 찾아오는 나병 어머니들은 만일 그 아이를 나환자와 격리하여 건강한 분위기 속에서 양육할 수 있다면 수용소에 자진 입소하겠다고 거듭해서 말한다.

「나환자의 집」이 생긴 초기에는 건강한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함께 「나환자의 집」으로 찾아오는 어머니들은 대부분이 자기 아이들에 대한 병의 전염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되돌아 가버린다. 이와 같이 나병 부모를 가졌으나 아직까지 건강한 어린아이들을 분리 수용할 전용시설의 필요성에 대해서 맥켄지 부인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휴가를 얻어 호주로 갔을 때 여러 번 이 문제에 대해서 원조를 호소하였는데 그 결과 600파운드의 기부금이 건강한 아이들의 전용시설을 위해 모였다. 거기에다 그곳에 수용할 어린아이 개개인에 대한 지원비도 기부자들로부터 약속을 받았다. 

호주에서 보내 온 선교 우편물을 개봉하는 맥켄지 선교사와 자녀들(1923년) ⓒLucy Lane

우리는 휴가를 끝내고 부산으로 돌아와서 아주 적절한 어린아이 전용 가옥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드디어 1919년 7명의 어린아이를 받아 들여 개소식을 거행하였다.

우리는 「어린이의 집」의 규정을 엄격하게 만들었는데 나병 부모의 친척이나 친구들 중에 어린아이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을 때에 입주할 수 있게 하였다. 입주한 아이들의 부모 역할을 맡은 사람은 한국 교회의 장로들과 그들의 부인들이었다. 그들은 정말 효율적으로 깊은 믿음과 참된 사랑으로 수년 동안 불우한 아이들의 부모 역할에 책임을 다하였다.

「어린이의 집」을 개소한 후 2년이 지났을 무렵 그곳에일곱 명의 남자 아이와 여섯 명의 여자아이가 수용되었다. 그 중 한 아이는 나병이 완전히 치유된 어머니를 따라 그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어린이의 집」에서 받은 교육과 훈련의 덕택으로 자기들 스스로의 힘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힘이 있는 젊은이들은 밖으로 나가서 직업을 구하기 시작하였다. 또 이들은 학교 입학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부산의 공립학교들은 「우리의 집」아이들에게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리의 집」아이들은 완전히 건강한데도 불구하고 나환자인 그들의 부모와의 접촉을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산에 있는 사립학교들은 「우리의 집」아이들에게 입학을 허가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선교부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오히려 아무 대가도 없이 일을 한다고 크게 감사를 표시하였다.〠 <계속> 
 
제임스 노블 맥켄지
번역 지응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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