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개신교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개신교가 타 종교에 비해 신뢰를 잃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로부터 지탄과 냉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갈수록 신도수도 줄고 있다. 그밖에도 개신교의 위기를 나타내는 징표는 널려 있다. 참된 빛과 소금이 필요한 때다. 학자이자, 개신교계 지도자이자, 사회운동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 손봉호 장로(76․ 고신대 석좌교수)를 만나 한국 교회와 사회가 처한 현실,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해 들어 봤다. 그는 3월 시드니에서 개최될 성시화대회 주강사다. 기준이 없는 시대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시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는 시대이다. 그만큼 거짓과 위선이 세상을 뒤집어엎으려고 한다. 시대의 기준이 사라지고, 따를 만한 사표(師表)가 증발되어 가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한국 교회의 영적 거인(?)들이 풀잎처럼 쓰러지는 시대이다. 홍수에 맑은 물이 귀하듯, 홍수처럼 넘치는 일만 스승이지만 정작 따를 만한 사표가 귀한 시대이다. 이 달에 리뷰초대석으로 모신 손봉호 장로, 그는 한경직 목사 이후 한국 교회의 ‘기준’이라고 할 만하다. 각종 사회 문제에 그가 점지하는 점은 정확한 기준이다. 도덕교과서요, 기독교 윤리의 정확한 잣대이다. 지난 군사정권 시절, 월간 <빛과 소금>에서 가장 민감한 정치 사회문제의 고정 필자가 손 장로였다. 편집실에선 그의 날카로운 펜 끝에 전율하고 탄복했다. 쉽게 읽히면서 콕콕 찌르는 핵심이 분명했다. 시사 논평의 특성상 급하게 청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바쁘기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분주한 그에게 어느 날 전화로 원고청탁하면서 나눴던 대화 한 토막 “이번 달엔 바빠서 못쓰겠는데요.” “교수님 쉽게 잘 쓰시잖아요. 잠깐이면 될텐데요.” “쉽게 쓰기 위해 늘 그것만 생각해야 합니다.”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내는 탁월한 글 감각이 그저 나오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대학가에서 당시 4ㆍ13호헌 철폐 서명이 전개되었다. 각 대학 교수들이 해직을 무릅쓰고 서명하던 때였다. 당시 편집부에서는 우려반 기대반으로 몇몇 기독교인 교수를 주목했다. 그들이 서명하면 당시 서슬퍼런 정권의 기세로 보아 해직은 필수코스처럼 보였기에 우려했고, 평소 그들의 정론직필이라면 당연히 서명할 것이란 기대를 했다. 드디어 서울대 교수들의 서명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우리는 손봉호 교수의 이름을 발견하고 환호했다. 그 이후 우리는 그를 ‘글만 쓰는 서생’이 아닌 ‘행동하는 지성’으로 흠모했다. 민주화의 봇물이 터지고,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의 활동영역은 더욱 다채로워졌다. 특히 그가 주도한 경실련(경제정의실천연합)은 한국에 본격적인 시민운동의 첫 페이지를 기록한다. 그 이후 경실련과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통한 한국사회의 변화에 자극을 준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런 시민운동을 통해 부정선거의 온상이었던 군부재자 투표를 영외에서 하게 해 부정선거의 시비를 없애게 했으며, 대통령 직선제 이후 세대결의 군중집회를 TV 토론으로 대처하게 하여 엄청난 사회적 낭비를 줄이게 한 것이라든가, 금융실명제 도입에 일정부분 역할을 한 것은 시민운동을 통해 이룬 쾌거로 기록될 수 있는 업적들이다. 특히 그는 정치인도, 법조인도, 심지어 언론인도 건드리기 꺼려하며 이미 성역화된 교회문제, 기독교문제를 성역 없이 지적하며 교회의 자정을 촉구하는 한국 교회의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계시의 종교, 논리가 아니다 그는 “교회의 도덕적 수준이 사회의 일반적인 도덕적 수준보다 낮은 나라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개신교 역사상 지금의 한국 교회보다 더 타락한 교회는 없었을 것 같다. 교회사 학자 몇 분에게 물어봐도 그런 예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한국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없습니다. 1+1=2란 것은 논리적으로 설득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 그것을 주장하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기꾼이 1+1=라 주장한다 하여 그 사실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1=3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보통의 상식이나 지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계시의 종교는 마치 1+1=3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3위 1체, 예수님의 양성, 부활, 동정녀 탄생 같은 것은 모두 1+1=3이란 것과 같이, 이론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2세기 교부 터툴리아누스는 ‘말이 안되기 때문에 믿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요.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믿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계시의 종교를 전파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는데는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아주 중요합니다. 거짓말을 잘하고 이기적이라서 믿을 수 없는 사람인지, 아니면 ‘충성된 증인’ 즉 ‘믿을 만한’ 증인인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 이었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들이었으며 모든 신자들도 믿을 만한 증인이 되어야 복음을 올바로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믿음을 얻지 못하는 교회와 교인은 계시에 근거한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믿을 수 없는 ‘증인’들의 증언에 귀 기울여 주지 않으니 한국 교회 교인수가 줄어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가 아파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의 낙관주의와 승리주의가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그는 또 한국교회는 지금 그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으며, 한국 교회가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지 못하면 다시 일어설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진단했다. “지금 한국교회는 일제시대의 신사참배나 6.25 전쟁 때 공산군의 핍박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과거의 위기는 외부의 핍박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오히려 교회와 신앙을 정화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가 맞고 있는 위기는 교회 내부에서 부패로 인한 것이고 성경적인 신앙이 변질되는 것이기 때문에 회복을 매우 어렵게 하는 성질의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우상, ‘우리 교회’ 교회의 타락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우상숭배로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했을 때는 주위 이방민족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다. 지금 한국교회가 ‘의식하지 못하는 우상’을 그는 날카롭게 지적했다. “한국 교회 대부분은 ‘우리 교회’란 우상을 섬깁니다. 개교회주의가 정도를 넘어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해가 되더라도 ‘우리 교회’ 성장이나 명예에 이익이 되면 감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높이는 것이라도 ‘우리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습니다. 다른 교회 교인들이 오는 것을 환영하는 것은 누가 봐도 비신사적이고, 하나님나라 확장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양 훔치기’(sheep snatching)나 대형버스가 온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교인 실어 나르는 것을 보고 ‘교회 장사’한다고 비웃습니다. 하나님 영광이 이렇게 더럽혀지고 교회 전체의 사역이 큰 방해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버젓이 자행합니다. 하나님 영광이나 교회의 명예보다 ‘우리 교회’의 성장과 영광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착각하지만, 주객이 전도되어 하나님 사랑이 교회 사랑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수억 원의 돈을 부정하게 쓰면서 총회장이 되거나 기독교 단체의 대표가 되는 것, 교회를 자식에게 세습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지적했다. 그것이 공정하지 못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며, 이에 대해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냉소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 비난과 냉소는 정당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당사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나 교회를 오해해서 그것을 비판한다고 주장합니다. 궤변 중에 궤변이지요. 하나님 영광과 전체 교회의 명예와 신임도에 큰 해가 되는 것이 자명한데도 그것을 감행하는 것은 자신의 명예와 재물이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전파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인데도 그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세습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우상숭배고, 옛날의 신사참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우상숭배입니다. 신사참배는 외부 세력의 강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천황을 신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아무 압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직을 매매하며 세습을 감행하는 것은 자발적인 우상숭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 교회, 성직 매매, 교회 세습 등의 배후에 작용하는 것은 ‘탐심의 우상’이라고 했다. 한국 교회가 섬기는 우상은 대부분 한국 사회가 섬기는 돈, 명예, 권력의 우상과 같다고도 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울처럼 세상적인 이익이나 특권을 배설물로 치부한다면 탐심의 우상숭배가 생겨날 수가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돈, 돈, 돈 그는 여기서 한국인의 의식 깊은 곳에 새겨진 우상인 ‘돈’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역사상 어느 다른 시대에도 오늘에만큼 돈이 모든 가치를 주도하고 모든 가치의 표준으로 등극하지는 않았습니다. 돈은 오늘날 생물학적 생존을 보장해주고 생활의 편의를 제공하는 정도를 넘어 정치적 권력, 사회적 명예, 학문적 성취, 예술적 창조, 운동경기의 승리, 심지어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것까지 도와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가문, 명예, 존경, 사랑, 인기 등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돈 그 자체를 얻는 것이 사람을 즐겁게 합니다. 그래서 돈은 마침내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찬양하는 하나님 자리를 거뜬히 차지했습니다. 오늘날 돈만큼 숭배하고 믿는 우상은 역사상 존재해 본 일이 없습니다. 한국인이 삶에 불만이 많은 것도 돈을 좋아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돈은 공유불가능(zero-sum)한 하급가치의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경쟁심이 유달리 강한 한국인을 더 경쟁적이 되게 하고 질투와 갈등을 더욱 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랑, 지혜, 지식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다른 사람이 그 때문에 적게 가져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질투와 경쟁을 유발하지 않습니다. 이런 공유 가능한 가치는 고급 가치입니다. 반면에 돈, 권력, 명성 같이 공유 불가능한 가치들은 하급가치입니다. 그런 가치들은 사람을 경쟁적으로 만들고 질투심과 갈등을 조장하며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최근에는 물질주의의 심각성을 비판하고 경고하는 설교가 강단에서 거의 사라졌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기도, 봉사, 헌금이 물질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수단으로 이해하는 설교자와 교인이 한둘이 아닙니다. 교회가 돈의 우상을 섬기는데 어떻게 돈의 우상을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현실 속에 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공헌은 우리 사회가 걸려 있는 돈 중독을 조금이라도 해독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회가 돈의 우상 때문에 빈부 격차가 커지고 양극화가 심각해지며,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자포자기하며 냉소적이 됩니다. 한국이 OECD 국가가운데 네 번째로 갈등지수가 높고 그 때문에 연간 약 300조 원의 돈이 낭비됩니다. 돈의 우상숭배를 제거하거나 약화하지 않고 치열한 경쟁이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고는 행복한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약화된 이유는 한마디로 윤리적 실패 때문입니다. 윤리적 실패란 무엇입니까? 성경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는데, 성경대로 행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하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을 율법 혹은 의로 구원받는 이단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윤리를 강조하는 사람을 자유주의자로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강조해야지, 윤리적인 것을 의로 구원을 받는 것은 기독교의 구원론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갖 문제를 일으킨 사람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 때문에 누구나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근본적으로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왜 잘못 이해합니까? 잘못 이해하면 편하기 때문입니다. 잘못 이해하면 돈 벌기도 편하고, 교회 신앙생활하기도 편하고, 모든 면에서 편합니다. 말씀대로 살라고 하면 사람들이 교회에 오겠습니까? 부자들이 교회에 오겠습니까? 한국의 상황에서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과거에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 돈 벌기가 힘들었습니다. 돈을 뿌리지 않으면 정치 지도자가 되기도 힘들었습니다. 온갖 부정을 저질러야만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목사님이 잘못했다고 하면 교회에 오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하려면 아 그거 괜찮다. 하나님은 다 용서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회개라는 것을 성경적으로 근본적으로 오해해서 말만 가지고 ‘잘못했습니다’ 하고 회개하면 죄가 용서받는 것처럼 가르쳐 놓아 오늘날 돈과 명예와 권력을 너무 좋아하게 되었지요. 성경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면 예수처럼 돈을 못 벌고, 예수님처럼 명예도 얻지 못하고, 예수님처럼 권력도 누리지 못하고 핍박을 받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십자가의 종교인데, 그것은 완전히 없어져 버렸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건강하고, 돈 잘 벌고, 출세하고 권력을 누리고 된다는 것만 계속 강조하고 그걸 강조하니까 교인들이 구름 떼 같이 몰려들고, 하거든요. 이런 상황이 오늘날 한국교회를 이런 지경으로 몰고 왔습니다.” 물론 한국의 모든 교회, 모든 지도자가 ‘돈 우상’을 섬기는 것은 아니고, 아직도 성경의 가르침에 철저히 충실하여 올바로 믿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교회와 교역자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다만, 정말 타락한 교회와 지도자들이 가장 먼저 나서서 자신들이 바로 그런 예외라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참된 믿음, 삶과 행동 당연히 기독교는 윤리만 강조하는 종교가 아닌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선한 행위가 아니라 참된 믿음만이 구원의 수단임을 가르친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반드시 올바른 삶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윤리적이라야 성경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매우 윤리적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반드시 윤리적이 되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마치 반드시 비가 와야 길이 젖는 것은 아닙니다. 비 이외의 다른 이유로도 길이 젖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가 오면 반드시 길이 젖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셨습니다. 이민교회를 포함하여 한국 교회가 시대적 소명을 조금이라도 감당하려면 가난해져야 합니다. 스스로 가난해지지 않고는 물질주의를 비판할 수 없으며, 돈의 우상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바울사도도, 위대한 믿음의 용장들도 모두 가난했습니다. 돈이 있다면 선교와 구제를 위하여 써버려야 합니다. 지금도 전 세계 인구의 거의 절반이 하루에 2천 원 이하로 생활하고 있고, 수많은 어린이들이 굶어 죽고 있습니다. 그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과소비하고 사치하게 사는 것은 죄악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의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했다. “영국이나 독일 등 북유럽 국가들에서 음식 맛이 유난히 없는 것도 맛있게 먹는 ‘탐식’을 죄악시하는 전통 때문입니다. 탐식은 중세 교회의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에 속합니다. 흔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가 미덕이라 주장하지만, 오늘날 그렇게 절제하는 독일과 네덜란드의 경제는 비교적 건전하지만, 사치하고 과소비하는 이태리나 스페인의 경제는 심각하게 병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북유럽국가들도 점점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고 있고 그들을 그렇게 강하게 만들었던 종교개혁의 전통에서 빠른 속도로 벗어나고 있습니다. 독일도, 네덜란드도 사치와 쾌락에 서서히 탐닉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쾌락의 자본주의란 말을 타고 쾌락의 미끼만 바라보고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의 경고는 말의 귀를 스쳐 지나가는 동쪽바람(馬耳東風)에 불과합니다.” 그가 안타까워하는 부분도 이처럼 ‘맛없는 음식’의 전통과 일맥상통했다. “사람이나 기관이나 어떤 문제를 취급하는 방식을 보며 재미있습니다. 어떤 개인이 흠도 있고, 잘못도 있고, 약점도 있지만, 그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으면 함부로 욕을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욕할 때 사회 분위기가 그게 무슨 소리냐 이렇게 말하면 욕하는 사람이 이상한 취급을 받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못합니다. 한때 우리 기독교가 그랬습니다. 기독교가 사회에서 압도적으로 존경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라고 해서 왜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당시에는 사람들이 터놓고 기독교 비판을 못했습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큰 일을 했는데 기독교인이 우리 사회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을 했는데...’라고 하면 감히 기독교에 대해서 말을 못했습니다.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한국교회가 그렇게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상당할 정도로 잘 감당했습니다. 비록 교회가 분명하게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노력하지는 않았더라도 한국교회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사명을 비교적 잘 감당했으며, 한국 역사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한국 사회에 없었거나 약했던 평등사상, 민주주의, 인권 사상을 도입하는데 크게 이바지 했습니다. 또 새벽예배도 다른 나라에는 없는 한국교회에만 있는 제도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정말 열심히 기도도, 헌금도 많이 합니다. 교인들이 헌금하는 금액을 따져보면 수입의 거의 25% 정도에 이릅니다. 이런 부분은 한국교회가 지켜가야 할 좋은 유산입니다. 사회 지도층을 보면 판사와 검사의 상당수가 기독인이고, 국회의원도 3분의 1 이상이 기독교인입니다. 우리인구의 19%가 개신교인인데, 국회의원의 3분의 1이 기독교인이라면 지식층일수록, 또 사회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경제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기독교인이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종교는 기독교라고 말해도 될 정도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기독교의 성장이 수적으로 후퇴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하는 데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의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떤 상황입니까? 이런 말을 하면 그렇지만, 지금은 기독교가 ‘동네 개’처럼 되었습니다. 주인 없는 개가 동네를 돌아다니면 아무나 걷어차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사람들이 마음 놓고 기독교를 욕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열심히 보고, 전도도 열심히 하고, 교세도 부흥하고, 성공한 것 같은데도, 윤리적으로 실패한 이유에 대한 그의 의견은 이랬다. “우리가 흔히 복음의 수평적 혹은 수직적 관계에 대해 말하는데,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는 문제가 없는데, 사회 혹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는 완전히 실패한 것입니다.”
세상을 치유하는 교회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우상과 더불어 싸우는 종교이다. 한국 교회가 진정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영적으로 민감한 눈으로 자신과 이 시대를 관찰하면 세상이 섬기는 우상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겠지만 교회 자체가 우상을 섬기고 있으면 그것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누구도 우상인 줄 알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상이 아닌 줄 알고 섬기기 때문에 우상이 되는 것이지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우리 시대의 잠언이었다. 또 이런 말도 했다. “인류는 긴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너무나 많은 쓰레기와 찌꺼기를 생산해 놓아서 질식할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가 감당해야 할 주 활동은 창조적(creative)인 것이 아니라 치유적(curative)인 것입니다. 인류가 섬기는 우상을 폭로하고 제거함으로 병든 세상을 치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의 시대적 소명도 사회에 무슨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입니다. 사회가 섬기는 우상을 폭로하고 제거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와 현대의 우상에 대해 신랄하게 지적했지만, 한국교회에 대한 장점과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국교회가 사회봉사를 잘 합니다. 3대 종교 가운데 가장 잘합니다. 이것은 불신자들도 인정합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사회지도층 인물도 많이 길렀습니다. 앞으로 걸출한 기독교 인물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리고 호주 교민들을 향해서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넸다. “부디 우리 교민들이 호주사회에 존경받는 시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것을 성취하지 못해도 세속적으로 윤리적으로 고상하게 살아야만 그게 존경받는 길입니다. 성취는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이고, 경쟁적입니다. 그러나 윤리적인 것은 경쟁이 되지 않으므로 진정한 존경의 길입니다.” 목회자들에게는 스펄전과 존 웨슬리,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의 책들을 권장도서로 추천했다. 모두가 군 면제를 받으려 하는데, 그는 군입대 신체검사에서 몸무게가 1㎏ 미달이었지만 군의관에게 청탁(?)해 1kg 늘여서 현역 입대할 정도로 ‘순간의 선택’ 때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했다. 고입 체육시험과 대입 시험 때 수험표를 나눠주는 날이 주일이라 주일 성수를 위해 ‘순교를 각오하고’ 참석하지 않았지만, 합격의 영광은 비켜가지 않은 그의 삶의 에피소트는 그의 삶에 기막힌 삽화이다. 황혼에 더욱 아름답게 꽃 피우는 노학자의 잠언을 들을 수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축복이었다.〠 손봉호 장로는 1938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영문학과를 나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 화란어과․철학과 교수를 거쳐, 서울대 사대 사회교육과 교수를 지냈으며 한성학원 이사장과 동덕여대 총장을 지냈다. 사회활동으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공동대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시민운동연합 공동대표,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상임공동대표 등을 지냈다. 봉사직으로도 활발히 활동해 세종문화회관 이사장과 KBS시청자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 대검 감찰위원장과 (사)나눔국민운동본부 대표로 봉사하고 있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강민석|국민일보 사진부 선임기자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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