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신앙과 학문이 만났다!

아시아법연구소장 권오승 장로 (서울대학교 법학과 교수)

송기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1/04 [14:15]

필자는 25년 전, 월간 '빛과소금' 창간 당시부터 여러 해 동안 '나의 학문과 신앙'이란 시리즈물을 맡아, 한국 학계의 각 분야를 대표하는 석학들 가운데 신실한 크리스찬들을 추적하여 만나며 그들의 학문과 신앙세계를 소개한 적이 있다. 
 

▲ 서울대 법학과 교수로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권오승 장로는 어느 기준으로 보든 `나의 신앙과 학문'을 밝힐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크리스찬리뷰    

 
신앙과 학문의 만남에서 튀어나오는 지성들의 환희와 한숨, 갈등과 희열의 숨결을 들으며 기독교 신앙은 결코 반지성적인 것도 아니며, 반지식운동도 아니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확인했다. 어떠한 학문이든 그 속에는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가 관류(貫流)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달에 만난 권오승 장로(서울대 법학과 교수, 전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는 어느 기준으로 보든 관련 학문에서 '나의 신앙과 학문'을 밝힐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신앙과 학문은 갈등과 회의의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맺어진 결정체이다.
 
"교수는 연구, 교육 및 사회봉사를 하게 됩니다. 따라서 제가 경제법 교수로서 하고 있는 역할도 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역할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재정립해 보기로 했습니다.
 
제 전공인 전공 경제법은 바람직한 경제질서를 형성하기 위해 국가가 경제활동을 규제하는 법입니다. 키워드는 '바람직한 경제질서'이지요. 문제의 핵심은 '바람직한 경제질서'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저 자신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판단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바람직한 경제질서'의 모습을 찾기 위하여, 다른 나라의 법과 제도를 우리나라의 것과 비교 연구하는 비교법적인 연구방萱?주로 사용해 왔습니다.
 
먼저 미국과 EU, 독일 및 일본 등을 중심으로 선진국의 경제질서를 비교 연구하고, 그것을 우리나라의 여건과 환경에 비추어 수정, 보완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바람직한 경제질서의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고쳐 나가며, 그 방안은 무엇인가를 제시하기 위하기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뒤에는 그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선진국 등과 비교한 세상적인 기준, 엄격하게는 저의 기준, 저의 가치관이었는데, 그게 바뀌었습니다.
 
그 이후는 `내가(사람이) 보기에 바람직한 경제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경제질서'를 형성하기 위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로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학문관이 바뀌자 학생들을 가르치는 목적과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학생들을 세상적인 차원에서 전문적인 지식과 정의감을 갖춘 유능한 인재로 키우기 위하여 노력했지만, 그 뒤부터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나라,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데 헌신할 수 있는 일꾼을 양성하기 위하여 노력하게 되었다.
 
"모든 게 바뀌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사람이 보기에 적합한 수단이나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여해주신 소질과 능력을 가장 잘 개발할 수 있는 수단이나 방법을 사용하기 위하여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학문관의 변화는 그가 사회봉사에 참여하는 자세나 태도도 바뀌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뒤에는 그의 지식과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주어진 일을 감당하고 이웃을 섬기는 일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혼신의 정열을 쏟아부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그에게 학문적인 업적도 한국 최고의 경제법 학자로 세워주셨다. 그런데 '한국 경제질서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경제질서로 발전시키는 데는 대학에서 연구와 교육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직접 법의 집행과 정책의 수립에 참여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소망을 갖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2006년부터 2년간 중앙행정기관이자 준사법기관으로 소위 '경제검찰'이라는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돼 한국 경제질서의 기본인 시장경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여부를 감시하는 파수꾼으로 세워주기도 하셨다. 
 
"그 자리는 우리나라 경제질서의 기본인 시장경제 시스템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하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으로서 2년간 우리나라 경제질서의 기본법인 독점규제법과 공정거래관련법들을 집행하고 경쟁정책과 소비자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하는 일을 총괄하면서, 저는 우리나라 경제질서를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과 학문의 절묘한 일치, 신앙과 학문의 막강한 사회기여'라는 결실을 맺기까지 그의 신앙과 학문의 편력을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낙동강 너머의 꿈
 
안동 권씨 집안의 35대손, 8남매 중 셋째로 출생한 그는 어린 가슴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을 경험했다.
 
'안동 권씨'라는 네 글자가 주는 중후함은 '명문 양반가의 전통적인 유교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6살 난 오승 군은 집 앞에 있는 이천교회에 다니기 시작해도 아무런 집안의 반대가 없었다는 게 신기했다.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보낸 여러 가지 추억 가운데 특별히 따뜻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주일학교 생활과 관련된 것들이라고 하였다.
 
"여섯 살 때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주일학교에서 성경말씀을 배우고 있다가 갑자기 하나님이 남자인지 여자인지가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성경말씀을 가르치던 전도사님에게 물어봤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의외의 질문을 받고서 잠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고 하며, 다음 주일에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그 분은 '하나님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초월적인 존재'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남성 쪽에 더 가까운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에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지,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다니던 이천교회는 교인들이 모두 30~40명 정도밖에 안되는 작은 교회였다. 교인들 대부분은 송씨 집안의 사람들이었고, 다른 성을 가진 교인은 몇 사람 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하루는 송씨 성을 가지고 있는 친구의 어머니가 주일 예배시간에 어린이들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시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 아버지, 여기에 모여 있는 어린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이들 중에서 장차 목사도 나오고, 장관도 나오게 해 주세요."
 
그는 어린 나이에 그 기도를 들으면서, '기도를 저렇게 해도 되는가? 하나님께서 과연 저런 기도를 들어 주실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50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 보니,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몇 안 되는 어린아이들 중에서 실제로 목사도 나오고, 장관도 나왔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기도의 위력을 실감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신앙생활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는 매우 순조롭게 유지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안동중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그의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는 약 12km나 되었다. 그 길을 매일 자전거로 통학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왕복 2시간이었다. 당시 그 곳에 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매일 아침 그는 나룻배로 낙동강을 건너야 했다. 그런데 여름철 홍수가 나 낙동강이 범람하면, 나룻배로는 강을 건널 수 없었기 때문에, 20km가 훨씬 넘는 험한 산길을 돌아가야 했다. 학교에 지각하지 않고 도착하려면, 늦어도 새벽 6시에는 집을 나서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3년간 하루도 결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산길로 돌아가다가 개울이 넘치고 도로가 끊겨서, 9시 30분쯤 학교에 도착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담임선생님이 첫째 시간에 들어오셔서 출석을 부르다가 내가 보이지 않자, '오늘은 비가 많이 와서 오승이가 먼 길을 돌아오느라고 좀 늦는가 보다'고 하면서 출석부에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고 기다려 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이 낙동강을 매일같이 무심코 건너던 그는 어느 날 낙동강 너머 바다의 꿈을 키우는 생애 첫도전을 받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 어머니가 제가 새벽 일찍 일어나 공부하는 것을 칭찬하자, 그 친구 아버지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오승이나 늦잠을 자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나 모두 안동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될 터인데, 무엇이 다르겠느냐?'하시는 거예요. 그 분은 아마 무심코 하셨을 테지만, 저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아, 그런가. 그것이 현실인가? 만약 그게 현실이라면, 나는 결코 그러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겠다. 반드시 그 현실을 극복해야겠다!"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낙동강 너머의 꿈은 중3 겨울방학 때 상경하여, 용산고등학교에 합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집안 형편으로 서울 유학은 너무나 큰 산처럼 다가왔다.
 
"아버지께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에,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한마디로 일희일비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말씀을 하시던 아버지의 표정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좋은 고등학교에 합격한 것은 기쁘지만, 장차 학비를 마련할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태산 같으셨던 모양입니다."
 

▲ 권오승 장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뒤에 그의 기준과 가치관이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크리스찬리뷰    


시련과 극복
 
서울에서 낙동강 너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방 한 칸을 얻어 자취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연탄가스 중독으로 고생도 했다. 다음 학기부터 담임교사 소개로 용산중학교 1학년 학생 집에 들어가 입주과외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가정교사 생활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한 동안 같은 반 학생의 집에 들어가서 친구 겸 가정교사도 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친구가 함께 기거하기 시작한지 겨우 두 달 만에 반에서 58등 하던 그 학생의 성적이 30등으로 껑충 뛰어 올랐다는 점이다. 그러한 여건과 환경에서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전교에서 1-2등을 다툴 정도로 성적도 아주 좋았다. 반장도 계속했다. 낙동강 너머의 꿈을 이루는 데는 장애물도 만만찮았다.
 
고3 때도 여전히 계속된 입주과외는 그의 성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매달 추락하고 있는 석차를 바라보면서, 대학입시를 눈앞에 두고 오로지 입시준비에만 열중할 수 없는 처지가 매우 안타까웠다. 방과 후 저녁 9시까지는 지도하던 학생을 가르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몇 달 동안 안절부절 불안해하고 있다가, 궁여지책을 냈습니다. 밤 10시쯤 조용히 집을 나와 24시간 영업하고 있던 사립독서실에서 밤새워 공부하고 새벽에 집으로 가 아침식사를 하고 학교로 갔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학생의 어머니가 불러서 갔더니, '밤에 어린애를 혼자 집에 놔두고 저만 혼자 공부하러 나가는 그런 철없는 선생이 어디에 있느냐'면서 막 꾸짖는 거예요. 조용히 앉아서 그 꾸지람을 들었지만 야속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음 날 그는 아침 이삿짐을 싸들고 나와, 학교 근처에 하숙집을 정해 놓고, 오로지 입시 공부에만 전념했다. 불과 두 달 만에 다시 원 위치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동안 모아놓았던 돈은 불과 2개월분의 하숙비밖에 안되었기 때문이다. 두 달 뒤의 하숙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숙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학교 정문 앞에서 그 학생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그 분은 저를 보자마자 반색을 하시면서 다시 자기 집으로 들어와서 생활하라고 권유하셨어요. 제가 나온 뒤에 다른 사람을 가정교사로 모셨는데, 그 집 아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저를 다시 집으로 오게 하지 않으면 공부를 하지 않겠다면서 집을 나가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분은 자기 아들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저를 다시 찾아왔다는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아들을 위한 가정교사를 한 사람 더 둘 터이니, 저는 그 집에서 그 아들과 함께 살면서 생활지도만 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마침 하숙비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던 터라, 못이기는 척하고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서울대 법대에 응시했다가 아쉽게 낙방하고 말았다.
 
"재수하는 일 년이라는 기간은 저에게 그야말로 질곡의 시간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여건은 나아진 것이 전혀 없는데다가 심리적으로는 실패자라고 하는 열등감을 극복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친구들도 만나지 않고 가능한 한 혼자서 조용히 지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한 상태로 몇 달을 버티다가, 그 상황을 탈출하기 위하여 5급 공무원시험(현 7급 공무원) 통계직에 응시하여 합격했습니다. 합격자 발표를 보고도 어떻게 할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길은 제가 갈 길이 아닌 것 같아서 합격자들을 위한 신체검사장에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만남
 
다음해에 서울대 법대에 합격하여 입학하고 나서 보니, 대학생활이 기대했던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더구나 1학년 학생들이 모두 교양과정부에 편입되어 전공과 상관없이 교양교육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 교양과정의 내용이나 방법에 있어서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당시 대학가는 부정선거나 교련반대 데모, 위수령 발동, 10월 유신 등으로 이어지면서 대학이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었다.
 
"대학 3학년 때에는 위수령으로 인하여 대학이 문을 닫게 되었고, 군사정부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과정에서, 거기에 걸림돌이 되고 있던 학생들의 데모를 막기 위하여 대학에는 휴교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던 학생들을 제적하여 군대로 끌고 갔습니다. 저와 함께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친구들이 군대로 끌려갔고, 저도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4학년 때에는 이른바 '10월 유신'으로 인하여 법질서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헌법이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법학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고 법학공부를 아예 그만 두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그는 법대의 다양한 학회 활동 중 선배의 권유로 '농촌법학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학기 중에는 주로 사회과학에 대한 학습과 토론을 하면서 사회를 보는 안목을 키우고, 방학 중에는 농촌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였다.
 
대학 1학년 때, 그는 친구의 소개로 이화여대 법대 1학년이던 우일강 양과의 '특별한 만남'을 가졌다. 처음 보는 순간, `참 예쁘고 순수하구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 후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서 서로의 대학생활과 취미나 관심분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친해졌다.
 
"당시는 요즘처럼 핸드폰이나 이메일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로 편지로 연정을 나눴습니다. 편지의 경우에는 수신인에게 바로 전달되지 않거나 통신의 비밀이 보장되지 않을 우려가 많지 않습니까? 부모님이 남자에게서 온 편지라는 이유로 그녀에게 전달하지 않거나 검열을 할 위험성이 많았지요, 그래서 그런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발신인의 이름을 '권오승'이라고 정확하게 기재하지 않고, 한 글자씩 바꾸어서 때로는 '권오숙' 이나 '권오순'이라고 쓰기도 하고, 때로는 '오승희'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특별하게 만나온' 그녀에게는 이미 중매가 들어오기 시작하였을 정도로 결혼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 사람을 잡을 것인가, 보낼 것인가? 보내기에는 정이 너무 깊이 들었고, 잡자니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농촌운동가로서 농촌의 개혁에 헌신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길은 아주 멀고도 험한 고난의 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농촌 실정은 전혀 모를 뿐만 아니라 고생을 전혀 모르고 자라났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잘 감당해 낼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
 
이 문제를 놓고 며칠 동안 고민하던 그는 학회활동을 통하여 알게 된 2년 선배 여학생을 만나서 그러한 사정을 솔직히 털어 놓고 조언을 구했다. 그런데 그 선배가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내가 네 입장 잘 이해하고 또 열심히 도와줄 테니, 나와 결혼할 생각있느냐?'는 황당한 말을 들어야 했다.
 
"그것을 계기로 제가 우일강이라는 여인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있는 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잡아야겠다는 결심을 단단히 했습니다. 그녀를 만나서 잠시 우리들의 결혼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뒤에, 단도직입적으로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해 줄 터이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나와 결혼합시다. 당신이 나와 결혼하게 되면 당신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겠지만, 만약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당신도 불행하고 그러한 당신과 사는 사람도 불행하게 될 것이므로, 그것은 불행을 확산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73년 2월 26일 졸업식 날(서로 다른 학교에 다녔지만, 그 해 두 학교의 졸업식이 우연히 같은 날이었다) 저녁 양가 부모님들을 모신 자리에서 약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해 10월 3일 개천절에 우 양이 다니던 영락교회에서 백년가약을 맺고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신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내가 임신을 하였고, 1년 만에 첫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만 25세에 아빠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내는 첫 아이를 순산하지 못하고 제왕절개 수술로 낳았기 때문에, 갑자기 경제적인 어려움에 봉착하였습니다. 아내가 만삭인 상태로 정기검진을 받기 위하여 세브란스 병원에 갔다가, 주치의로부터 임신중독이라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 쓰러져서 갑자기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단 결과 그대로 두면 산모가 위험하다고 하여 제왕절개 수술로 첫 아이를 예상보다 빨리 출산하게 되었는데, 그 아이가 미숙아인 상태로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2주 동안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의료보험이 없었기 때문에 입원비와 치료비가 엄청 많이 나왔습니다. 그 비용은 당시 우리 부부가 살고 있던 집 전세보증금에 상당할 정도로 많아서 저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이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 선배들에 상당한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오순도순 신혼부부는 잘도 이겨나갔다.

▲ 권오승 장로 부부는 코스타가 열린 머루수양관을 본지 송기태 편집국장(오른쪽)과 산책하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크리스찬리뷰    


열정의 젊은 교수
 
사실 그는 대학시절 법학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의 법학교육이 저의 관심을 끌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저의 관심이 농촌문제나 사회문제에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법학 과목보다는 경제학이나 정치사와 같은 다른 분야의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규 강의보다는 학회활동과 같은 과외활동에 더 많은 관심과 시간을 할애한 셈이지요. 그러다가 대학 2학년 때에는 아예 경제학과로 전과를 하여 경제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도 했습니다."
 
석사과정을 마친 후에 곧바로 박사과정에 진학했지만, 그는 이미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었고 군복무를 필하지 않은 가장이었다. 사관학교의 교관으로 지원하여, 육군 제3사관학교에서 법학 교관으로 3년간 사관생도들에게 법학개론과 군법 등을 가르쳤으며, 가끔씩 대구에 있는 계명대학교를 비롯한 몇몇 대학에 나가서 민법과 상법 강의도 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그를 법학 교수로 훈련시킨 과정이었다. 육군대위로 전역한 그는 박사과정에 복학하여 법대 조교로 근무했다.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거나 아니면 지방대학에 교수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희대 법대에 근무하던 고 구연창 교수가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민법담당 교수를 찾고 있는데 내려 갈 의향이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29세 때인 1979년 3월 1일부터 동아대학교 정법대학에서 법학교수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8월에는 서울에 있는 경희대학교로 옮겨 주로 민법총칙과 채권법을 가르쳤으며, 경제법 강의는 일 년에 한 강좌 선택과목으로 가르쳤다.
 
"강의는 준비를 많이 한다고 해서 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의 시행착오를 거쳐 가면서 민법교수로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강의 준비를 열심히 해서 학생들에게 알기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학생들의 성적은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졸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하게 평가했습니다. 그 결과, 학생들 중에는 '권 교수님은 다 좋은데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불평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저한테 민법총칙을 여섯 번씩이나 들었다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학생들에게는 그가 '피도 눈물도 없는 원칙주의자'로 비쳤던 모양이었다. 1982년 가을, 학생들을 인솔하여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학생들과 함께 설악산 등반을 마친 뒤에 깊은 산 속에서 흐르는 물에 발을 담구고 시원한 음료수를 한잔씩 마시면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학생들 중에서 갑자기 '선생님, 선생님, 석고상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소리치는 거예요.
 
저는 설악산에 있는 어느 석불에서 그러한 현상이 발생했다는 줄로 알고서,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어디?'라고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했고, 한 학생이 제 이마를 가리키며 '여기요'하는 겁니다. 저는 그때에야 비로소 학생들이 이제까지 저를 피도 눈물도 없는 석고상같은 교수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따뜻한 가슴을 소유하고 있는 교수라는 것을 확인하고, 너무 기뻐 그렇게 소리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학생들이 저를 부르는 호칭도 '교수님'에서 '선생님'으로 바뀌었습니다."
 
경제법 그리고 신앙과의 새로운 만남
 
한국 최초의 경제법 담당 전임교수로서, 그 학문 덕분에 공정거래위원장까지 지낸 그에게 경제법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해 준 이는 대학원 지도교수였던 황적인 교수였다.
 
"1977년 초, 황 교수님께서 부르셔서 찾아 뵈웠더니 저에게 경제법 교과서를 함께 집필하자고 제안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저는 경제법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선뜻 승낙하지 못하고 있다가, 황 교수님의 거듭된 권유를 받고서 경제법 교과서를 저술하는 작업에 동참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교과서를 준비하면서, 서서히 경제법에 대하여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일 년 이상의 준비를 거쳐 1978년에 황 교수님과 공저로 법문사에서 경제법 교과서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이 국내 최초의 경제법 교과서로 그 후에 계속 수정, 보완되어 오다가, 1988년에는 이를 전면적으로 개정하여 저의 단독 명의로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에서 경제법에 관한 대표적인 교과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9년에 중국에서 '한국경제법'이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경제법을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에 독일로 유학 가서 프리츠 리트너교수를 만나면서부터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대륙법계에 속하는 나라들 중에서 경제법이 가장 발달한 나라가 독일이이기 때문에, 저는 독일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1983년에 독일 훔볼트 재단에서 장학금 지원을 받아 1984년 6월부터 1986년 7월까지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경제법연구소에서 리트너 교수의 지도로 독일과 유럽의 경제법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학문적으로는 완숙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어릴 적 주일학교부터 가진 신앙은 교수생활 10년 동안 소위 '선데이 크리스찬'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지내오던 그는 1991년 여름, 그가 출석하던 주님의교회 전교인 수련회에 참가해 소그룹 팀장으로 섬기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놀라운 체험을 하는 결정적인 전환을 하게 된다.
 
특히 수련회가 열리는 기간에 지방에서 학회 심포지엄 일정이 잡혀 있어서 수련회의 참가는 아예 고려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다가 6월 마지막 금요일 구역모임을 마무리하는 종강파티에 참가했는데, 구역장이 또 여름수련회의 참가신청을 마감하는 날이니, 신청하지 않은 분은 꼭 신청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구역장이 구역모임을 마치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하나님께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기도를 드리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에 따라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하기 시작하는데, 그 순간, 그의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야, 이 녀석아, 네가 하나님이라면 너의 기도를 들어 주겠니?'
 
"눈을 감고 조용히 상황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저에게 3박4일간 실시하는 수련회에 참가하라는 초청을 하고 있는데, 저는 그러한 하나님의 초청에는 응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당시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경제법 교수를 뽑는데, 저를 보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 저의 이기적인 모습이 뚜렷하게 부각되어 왔습니다."
 
그 수련회에 가기로 결정한 다음날 새벽, 이재철 담임목사는 그에게 전화로 부탁할 일이 있다고 하였다. 전교인수련회의 일정 중에 각 팀별로 진행하는 5번의 성경공부가 있는데, 그 팀의 리더가 되어서 성경공부를 인도해 달라고 부탁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때까지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그는 한마디로 '그것은 말도 안 된다'면서 거절했다.
 
"그런데 목사님은 저에게 팀장들을 위한 교육을 별도로 시켜줄 터이니 그것은 걱정하지 말고 팀장을 맡아달라고 간청하셨습니다. 저는 팀장들을 위한 교육을 따로 시켜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그래도 교수를 10년 이상 해 왔으며 나름대로 가르치는 능력은 있는데, 배워서 가르치는 것이야 하지 못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목사님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다음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간 새벽기도를 마친 뒤에 6시부터 1시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수련회 주제는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는 것이었으며, 성경공부도 그 주제를 중심으로 다섯 번에 걸쳐 단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시간에 다루어야 할 주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주제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받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서로 간증으로 나누어 보라'는 것이었다. 특히 간증하는 순서는 팀장이 제일 먼저 하고, 그 다음에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설명을 듣는 순간, 그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음성
 
"그 순간부터 저는 마지막 시간에 간증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저에게도 은혜를 좀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해온 일들 중에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 별로 없으니 큰 은혜는 아예 바라지도 않고 작은 은혜라도 좀 주시라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으셨습니다.
 
여름수련회가 시작되고, 진행되는 동안에도 늘 그것이 걱정되어서 새벽부터 밤늦게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시간이 있을 때마다 계속 같은 기도를 반복하였다.
 
"하나님 아버지, 제발 저에게도 은혜를 좀 주십시오. 작은 은혜라도 좋으니 저도 은혜를 받았다고 간증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초조한 마음으로 제 3일째 되는 날 아침에도 새벽기도 시간을 이용하여 똑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리기 시작하였다.
 
"뭐, 은혜 받은 것이 없다고? 이 녀석아, 너는 어찌 그리도 미련하냐? 네가 태어나서 여태까지 살아 온 것이 모두 다 나의 은혜일 터인데, 뭐, 은혜 받은 것이 전혀 없다고?"
 
그 순간, 그는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갑자기 지난 40여 년간의 삶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가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통하여 지난 날 그의 삶 고비 고비마다 때로는 '운이 좋았다' 혹은 '정말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며 지나쳤던 사건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깨닫고, 그는 하나님 앞에 통곡했다. 한참 동안 울면서 하나님께 회개기도를 드리고 나서 겨우 정신을 차려 보니,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서 마룻바닥까지 이어진 상태로 큰 강당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은혜와 변화는 그의 인생에 또 하나의 큰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바로 수련회 마친 후 서울대 법학과 경제법 교수로 임용된 것이다. 그런데 그 여름 그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뒤에, 그는 전공과 직업에 대하여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그 전에는 하루 종일 전공서적을 읽고 있어도 지루한 줄을 몰랐는데, 그 이후에는 한동안 전공서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루 종일 성경책만 읽고 있거나 간증집이나 신앙관련 서적들만 읽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과 갈등은 몇 년간 지속되었다.
 
"은혜를 한참 받고 보니 성경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가득 담고 있는데 비해, 법학서적들은 시간이 지나고 법이 바뀌면 다 바뀌어서 쓸모없는, 유한하고 무익한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법을 계속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에 대해 깊은 회의가 들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주위의 여러 분들과 상담도 해 보고 자문도 구해 보았으나, 어느 누구로부터도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강구하던 중에 로마서 5장 8절의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는 말씀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이 말씀을 제 삶에 적용해보니, '아,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훨씬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계셨다는 의미구나! 그렇다면 내가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법학 교수로 경제법을 전공하게 된 것과 서울대 법대에서 경제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결과라는 의미가 된다. 내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이자 축복의 결과이고 또 하나님의 사랑으로 빚어진 걸작품이라는 의미이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오랜 세월 고민과 갈등을 한꺼번에 말끔히 씻어주는 아주 놀라운 깨달음이었습니다."
 
그의 이 발견은 마치 장님이 눈을 뜬 것과 같은 큰 사건이었고,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목욕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원리를 발견해 '유레카'라고 외친 사건과 같았다.

▲ 머루수양관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잡은 권오승 장로 부부 Ⓒ크리스찬리뷰    


학문과 신앙의 통합
 
이제 그는 학문의 완숙뿐만 아니라 신앙의 완숙에 이르렀고, 학문과 신앙이 완벽하게 통합된 길을 걷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시아법연구소 설립이다.
 
"그동안 제가 법학의 연구와 교육 및 사회봉사를 통하여 얻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이웃나라를 지원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2003년 겨울 방학 때 미국 센트 루이스 와싱턴대학에 가서 2개월간 미국의 독점금지법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체류하는 동안, 나는 현지에 있는 한인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담임목사님이 저에게 주일예배 때 기독청년들에게 도전이 될 수 있는 말씀을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사야서를 읽고 있다가,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사 58:12)라는 말씀에서 가슴이 뛰는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말씀에서 저는 장차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감당해야 할 소명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말씀 중에서 가장 크게 부각되어 왔던 부분은 '오래 황폐된 곳들'과 '역대의 파괴된 기초'라는 부분입니다. 그 부분을 읽는 순간, 전자는 체제전환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고 후자는 법과 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 때에 저는 오래 황폐된 곳, 즉 체제전환국에서 역대의 파괴된 기초, 즉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일을 지원하고 법률가의 양성과 교류를 촉진하기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 장차 제가 감당해야 할 소명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거기에 헌신함으로써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가 되기로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소명을 감당하고,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 2004년 여름, 뜻을 같이하는 법률가, 즉 변호사, 판사, 검사 및 교수들과 함께 사단법인 아시아법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 연구소는 같은 해 6월 18일에 이용훈 변호사(현 대법원장)을 초대 이사장으로, 권 교수가 초대 소장이 되어서 이웃나라의 법과 제도를 연구하고 그들의 법과 제도의 정비와 법률가의 양성을 지원하는 활동을 열심히 전개해 오고 있다.
 
"저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제 전공과 직업을 통하여 얻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던 중에, 제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국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에도 있고, 국경을 넘어 이웃 나라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나라들을 돕기 위하여 뜻을 같이하는 여러 법률가들과 함께 중국이나 베트남, 몽골, 캄보디아와 같이 시장경제를 새롭게 도입하여 시행하고 있는 나라에서 시장경제가 하루 속히 연착륙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거기에 필요한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또 그러한 법제를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법률가를 양성하는 것을 돕고 지원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추진하면서 이런 지원이나 협력이 직접적으로는 이웃나라를 돕는 일이 되지만, 그것을 통하여 북한의 개혁과 개방을 유도하는 동시에 북한이 장차 개혁과 개방을 시작할 때에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준비작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업은 간접적으로 남북통일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가 전공과 직업으로써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경제질서를 형성하는데 기여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하자, 하나님은 그의 관심분야와 활동의 지경을 넓혀주셔서, 이제 그 활동무대가 이웃 나라들을 비롯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포함한 지구촌으로 넓어져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법을 통한 선교'란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여, 선교사를 도우며 KOSTA를 비롯한 각종 컨퍼런스에서 후학들에게 그가 체험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권 박사는 진정 신앙과 학문을 통합하는 참지성인이었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선교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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