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전설, 아서 스테이스(Arthur Stace)

영원의 울림이 영혼의 울림으로 영원이란 별명을 가진 사나이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입력 : 2015/08/25 [10:11]
▲  9월호 표지   © 크리스찬리뷰

 
2015년 8월 4일 '캔버라 국립박물관'을 찾았다. 차에서 내리기 싫을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캔버라 국립박물관은 2001년 3월 연방 100주년 기념으로 건립되었다. 건축 양식은 기능보다 디자인에 중점을 둔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영원 전시관'(Eternity Exhibition)이 있다. 지금까지 호주에 살았던  사람들을 대표할 수 있는 50명을 선정하여, 10개의 주제로 분리하여 설명하는 전시관이다.
 
상상하여 보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호주에 살았는지! 2002년의 박물관 자료는 1788년 전과 후를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788년 이후부터 2002년까지 약 3천2백만 명, 그 전에는 약 16억 명 이상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늘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지나온 역사는 ‘영원’(Eternity)과 같다. 그래서 전시관의 이름을 '영원'이라고 했을까?
 
전시관 입구에 그 이유를 설명하는 사진이 있다. '영원'(Eternity)의 주인공인 '아서 말콤 스테이스' (Arthur Malcolm Stace)이다. 사진 안에는  쪼그려 앉아 'Eternity'를 쓰는 사진과 그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글이 있었다. "Mr. Eternity는 35년 동안, 50만 번 이상  'Eternity'를 시드니 보도블록에 썼다. 간단하고 지속적인 그의 메시지는 아직도 길을 가다 멈춰서, 생각하고, 느끼게 한다."

▲ 타운홀 스퀘어 뉴욕 메트로 카페(지하층) 안에 알루미늄으로 설치되어 있는 아서 스테이스의 Eternity.     © 크리스찬리뷰


불행한 어린 시절
 
아서 스테이스는 1885년 2월 9일 레드펀(Redfern)의 슬럼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우드 스테이스(William Wood Stace)와 어머니 로라(Laura)는 모두 알코올 중독자였고, 두 명의 형제, 두 명의 누이들 역시 모두 알코올 중독자였다. 누이들은 포주이기도 했다. 그들은 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
 
아서는 술 취한 아버지의 폭력을 피하여 집 마루 밑에서 자기도 했다. 그는 정규교육이란 것을 받아보지 못했는데 12살 때 남쪽 해안의 석탄 광산에서  일을 해서 받은 첫 번 봉급을 그날 모두 술집에서 사용하였다. 그 역시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는 15살에 감옥에도 갔다. 20살에는 써리힐로 이사하여 호텔에서  누이가 운영하는 창녀촌에 술을 배달하였다. 갱들과 연관되어 망보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는 키가 작아 망을 보기에 아주 적당하였다. 아서는 어린 시절을 실패자, 알코올 중독자, 문맹자로 시드니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 캔버라국립박물관 내부     © NMA


도피처로 군대
 
1914년 일차대전이 발발하자 지원병을 모집하였다. 아무나 군에 입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정한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입대가 불가능했다. 1915년 갈리폴리 전투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면서, 호주는 지원병의 자격기준을 낮추었다. 덕분에 아서는 키가 160센티이고 전과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대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는 입대 당시 전과 기록을 말하지 않았고, 나이가 32살임에도 불구하고 26살이라고 했으며, 태어난 곳도 레드펀이 아닌 코가라(Kogarah)라고 했다.
 
드디어 아서는 1916년 3월 18일 19대대 자원 보병으로 입대했다. 아서는 프랑스 전선에서 부상병을 나르는 '들것 운반병'으로, 복무하면서 동료들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하였다.
 
전쟁 역사가 '챨스 빈'(Charles Bean)은 "일차대전 후 '들것 운반병' 중에 '빅토리아 철십자 훈장'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병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보직이었습니다."라고 했다.
 
1917년 4월 중순에 아서는 바로 옆에서 터진 가스포탄의 폭발 때 파편으로 눈에 부상을 입고 한쪽 눈이 부분적으로 실명하게 되었다. 그는 1919년 2월 호주로 돌아와 의가사 제대를 했다.
 
다시 시드니로 돌아온 아서는 정신적, 신체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폭음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때쯤 불어온 경제 공항은 그의 인생을 최악의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평생을 정신병원에 수용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 캔버라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아서 스테이스가 백묵으로 쓴 친필 Eternity.     © NMA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1930년 시드니 중앙법정에서 판사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롱베이 감옥’에 보낼 수도 있고, 자유롭게도 할 수 있는 힘(Power)이 있다."
 
나는 예라고 대답을 했지만 기억나는  것은  Power라는 단어였습니다. 내가 필요한 것은 금주할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저는 가까운 경찰서로 갔습니다.
 
"경사님 저를 차라리 감옥에 쳐 넣어서 술을 못 마시게 해 주세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때뿐이지 다시 술을 마시게 됩니다."
 
중독이란 그 무엇이 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다. 아서는 술을 끊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해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구세군에 알코올 중독자 치료센터가 있다. 그곳에서는 해독을 위한 12단계의 교육을 한다.  만약 3단계까지만 간다면 그 다음은 어렵지 않다고 한다. 1단계는 자기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단계, 2단계는 자기 힘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단계, 3단계는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도움을 구하는 단계이다.
 
아서는 끊고는 싶었지만 혼자 힘으로 술을 끊을 수 없는 2단계 수준이었다.

▲ 아서 스테이스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6년 3월 18일 군입대 할 때 기록한 신상 기록 카드.     © NRM

  
인생의 방향전환
 
1930년 8월 6일 수요일 무료 식사를 제공하는 브로드웨이 성 바나바(St. Barnabas) 교회에서 아서는 하몬드(Hammond)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그날 3백여 명의 걸인이 참석했다. 모두가 무료 식사를 위하여  한 시간 반이나 되는 지루한 예배를 참고 기다려야만 했다. 남루하고 더러운 옷을 입은 3백 명과는 다르게, 앞좌석에 말쑥하게 옷을 입은 6명이 앉아 있었다.
 
함께 간 친구에게  누구인지를 물었다.
 
"아마 크리스찬인 것 같은데" 아서는 그들과 비교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여 부끄러웠다. 말씀을 듣는 중에 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아서는 예배 후 교회 길 건너 빅토리아 공원의 나무 아래 앉아, 예수를 믿고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드리겠다고 고백했다.
 
죄란 헬라어로 '하마르티아'로 '목표에서 빗나가다'(To Miss the Mark)란 뜻이고, 회개란 '메타노이아'로 '방향을 바꾸다'라는 뜻이다. 그날 아서는 삶의 시위를 힘있게 당겨 하나님에게 정조준하였다.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중심이동을 한 것이다.
 
삶이 바뀌자 사람들도 그를 다르게 대하였다.
 
"제가 주 안에서 나를 인정하게 되자 다른 사람들도 저를 정중하게 대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아서 스테이스와 군생활 자료 사진     © NRM

 
영원의 울림(Echoes of Eternity)
 
1932년 11월 14일 아서는 달링허스트(Darlinghust)의 버튼 스트리트에 있는 ‘장막침례교회’에서 존 리들리(John Ridley)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된다. 리들리 목사는 호주의 빌리 그래함과 같은 인물이다. 그는 일차대전의 참전용사로서 1917년 Bullecourt 전투에서 혁혁한 공적을 세워 십자성 훈장도 받았다.
 
그날 리들리 목사는 이사야 57장 15절을 말씀을 본문으로 ‘영원의 울림(Echoes of Eternity)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였다. 타자기로 쓴 그의 설교문은  'Eternity'로 시작된다. 
 
"영원, 외로운 산 정상에 홀로 서 고독 속에 있는 것처럼, 오늘 밤 본문은 마치 내가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있는 듯 한 느낌을 줍니다."
 
8페이지나 되는 설교문은 마치 장엄한 서사시와 같았다. 그는 '영원의 울림'을 강하고 부드럽게 거듭 강조 하였다.

▲ 존 리들리 목사     © NRM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Eternity)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그날 리들리 목사는 3가지 '영원의 울림'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첫째 '창조물의 영원의 울림’, 둘째 '크리스찬의 영원의 울림’, 셋째 '십자가의 영원의 울림’. 지금도 "하나님은 창조물을 통하여, 크리스찬을 통하여, 십자가를 통하여 '영원의 울림'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갑자기 그는 준비한 설교 원고를 옆에 두고, 훈련된 병사와 같이 큰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영원, 영원, 나는 이 말씀을 시드니 거리의 모든 사람들에게 외치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영원을 어디에서 보내실 것입니까?"
 
그날 리들리 목사의 설교는 아서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구원은 받았지만 무엇을 할지 몰랐던 아서는 사명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은 세 번 태어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첫째는 육으로, 둘째는 영으로,  마지막은 사명으로. 그날 아서는 사명으로 거듭났다. 
 
"머리에서 영원이란 단어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교회를 나왔습니다.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주머니에 있는 백묵을 꺼내어 쭈그려 앉아 '영원'이란 단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나는 이름도 잘 쓰지 못했습니다. 교육을 받지 않아서 영원이란 스펠링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름다운 서체로 eternity를 쓰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날 이후 아서는 35년 동안 50만 번 이상 'Eternity' 단어를 시드니의 길과 벽에 쓰기 시작했다.

▲ 존 리들리 목사의 ‘영원의 울림’설교 원고 원본. 총 8장으로 되어있는 이 설교는 아서 스테이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 NRM

 
피터 라메 목사 (Pastor Peter Rahme)

지난 8월 10일, 시드니에서 아서의 자료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피터 라메'(Peter Rahme)목사를 만났다. 그는 아서에 관한 자료와 함께,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CD도 선물로 주었다. 지금은 타스마니아에 살고 있는 리들리 목사의 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품들을 피터 목사에게 주었다.
 
유품 중에는 아서의 삶을 바꾸었던 그날 설교 원고도 있다. 놀랍게도 원고에는 리들리 목사가 외쳤던    "영원. 영원, 나는 이 소리를 시드니 거리의 모든 사람들에게 외치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영원을 어디에서 보내실 것입니까?"란 구절은 없었다.
 
그날 리들리 목사는 성령의 인도함으로 말씀을 전했고, 아서는 말씀에 순종하여 거리로 나갔다
 
피터 목사는 레바논 출신으로 1970년, 15살 때 호주에 이민 왔다. 당시 그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G'day Mate'라고 하기에, ‘호주 사람들은 ‘Mike’란 이름이 참 많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카톨릭 교회를 다녔지만 구원의 확신은 없었다. 하이스쿨을 졸업하고 음악에 관심이 있어 음악가로 활동했다. 1976년 어느 날 연습 중에 스텐이란 사람이 연습실에 찾아와 복음을 전해 주었다.

▲ 타운홀 스퀘어에 인공폭포 앞 길바닥에 설치되어 있는 아서 스테이스의 Eternity.     

 
그날 피터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였다. 피터는 그 이후 'To, In, Through' 세 단어로 자신의 삶을 표현했다.
 
"하나님은 나에게(To) 오셔서, 내 안에서(In) 성숙하게 하시고, 나를 통하여(Through) 새로운 역사를 이루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나로 만드셨습니다. 누구와 비교한 상대적인 내가 아니라 절대적인 나를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의 책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존 뉴턴'의 일대기인 'Amazing Grace'의 저자이다. 
 
존 뉴턴은 아프리카 흑인을 매매하는 노예선 선장이었다. 그는 폭풍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목사가 되어 노예제도를 폐지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가사는 자신의 신앙고백이다. 하나님은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죄인을 위한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신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찬양이다.
 
피터 목사는 Y-Jesus란 책도 썼다. 이 책을 통하여 ‘백만 명 영혼구원’ 운동을 하고 있다. 22페이지로 되어 있는 책은 다원주의, 상대주의가 대세인 시대에 '왜 예수인가'에 대한 간단하고 명료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피터는 아서와 관련하여 'The Life and Legacy of Mr. Eternity'란 책도 썼다.
 
피터가  아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0년 새해 불꽃놀이 때였다. 새천년을 시작하는 하버브리지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Eternity'란 황금색 글자가 새겨졌다. 그때부터 피터는 Eternity의 주인공인 아서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아서에게 영향을 끼쳤던 리들리 목사는 피터에게는 맨토와 같은 사람이다. 리들리 목사 사후에 딸은 아버지의 모든 유품을 피터 목사에게 주었다. 그녀가 가지고 온 가방 안에는 수많은 설교 원고와 육성 테이프 그리고 사진 등 귀중한 자료들이 담겨 있었다.

▲ 시드니에서 아서 스테이스의 각종 자료들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피터 라메 목사     © 크리스찬리뷰

 
아서를 세상에 알린 사람
 
1956년 아서는 리스틀 톰슨(Listle Thomson) 목사에 의해서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톰슨 목사는 아서가 백묵을 꺼내 보도블록에 Eternity라고 쓰는 것을 보았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아서의  삶을 글로 쓴 후, 1956년 6월 24일 '시드니 선데이 텔레그래프'와 인터뷰를 했다.
 
당시의 신문을 찾아 인터뷰 내용을  보았다. 부인과 함께  활짝 웃는 모습의 사진이 있었다. 큰 타이틀로 '시드니가 알고 싶었던 그 사람, 매일 새벽 거리에 노란 백묵으로 도전했던 그 사람.' 그는 25년 동안 시드니 보도블록과 벽에  '영원'이란 ‘한 단어의 설교’를 했다. 그렇게 미스터리의 인물인 아서 스테이스는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그는 11년 동안이나 '한마디 설교'를 했다.
 
아서는 '영원'이란 단어를 쓰는 것 외에도 토요일 저녁 교회 근처에서 노방전도를 했다. 처음에는 교회 맞은편에서만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전도용 차량에 확성기와 발전기를 설치하여 순회전도도 했다.
 
그는 '성 바나바 교회'의 정식 멤버로서 1946년 해몬드(Hammond) 목사가 소천했을 때, 대표로 조사를 한 다섯 명 중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성 바나바교회는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 2000년 새해 뷸꽃놀이에 하버 브리지를 황금색 글자로 새긴 Eternity.     © Peter Rahme

 
죽음을 넘어 영원으로
 
1967년 7월 30일 주일 저녁, 그는 하몬드빌 요양원에서 뇌출혈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시신은 시드니 의대에 보내졌고, 기부금은 교회와 선교단체에 기증됐다. 그의 유해는 2년이 지나서야 부인과 합장할 수 있었다.
 
1969년 10월 7일 ‘스튜워트 미첼’(Stewart Mitchell)  목사가 장례식을 집례했다. 보타니 공동묘지에서 거행된 장례식 설교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서 스테이스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85년 전 발메인의 작은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서는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정식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술 때문에 마을과 마을, 직업과 직업, 감옥과 감옥을 전전했습니다.
 
하지만 아서는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일차대전에 자원병으로 참전하였다가, 부상으로 제대를 했습니다. 제대 후 그의 삶은 재난과도 같았습니다. 인생은 엉망진창이 되고 탈출구가 없었습니다."

▲ 아서 스테이스     © 크리스찬리뷰

 
그러던 그의 삶은 예수를 만나고 반전되었다. 미첼 목사는 설교 중 톰슨 목사의 말을 인용했다.
 
"아서의 이야기는 지옥 근처까지 갔다가 돌아온,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 중의 하나입니다." 
 
톰슨 목사의 부인은 시드니 대학에 있던 아서의 유해를 보타니 공동묘지로 옮겨 부인과 합장할 수 있게  힘썼던 사람이다. 미첼 목사는 이렇게 설교를 마무리했다.
 
"저는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영원을 어디서 보내실 것입니까?'  대답해 보지 않겠습니까? 영원, 영원, 그 영원을 어디서 보내시겠습니까?" 
 
타이핑으로 친 3페이지의 짧은 설교는 필자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 아서 스테이스의 부인 펄(Fllen Esther Pearl Stace)     © 크리스찬리뷰

 
Eternity가 있는 곳
 
아서의 사후에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나 기념판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가 죽고 10년이 지나서야 신문지 한장 크기의 알루미늄으로 만든 'Eternity'가 ‘Town Hall Square’ 안쪽 보도블록에 새겨졌다. 그 외에도 Eastern Suburbs Memorial Park의 무덤 끝 대리석에 Eternity가 새겨져 있다. 친필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시드니 우체국의 시계탑이다.
 
나는 글씨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타운홀'과 '성엔드류 성당' 사이에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갔다. 몇 번을 돌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곳에 있는 몇몇 사람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몰랐다. 우연히 인공폭포수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그 앞에 'Eternity'가 써있는 것을 발견했다.

▲ 스튜워트 미첼 목사가 집례한 아서 스테이스의 장례식에서 말씀을 전한 설교문 원본. 총 3장으로 되어 있다.     © 크리스찬리뷰

 
그곳은 ‘New York Metro Cafe’ 안이다. Eternity를 보기 위해서는 Cafe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라 팔로스’(La Perouse) 근처에 있는 그의 무덤을 찾았다. 현재 이름은 'Eastern Suburbs Memorial Park'으로 경치가 아름답고 한적한 곳이다. 아내와 합장된 묘비에는 이름과 죽은 날짜가 기록되었다.
 
아내인 Pearl Stace는 1961년 7월 12일 66세, Arthur Stace 1967년 7월 30일 83세,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름 옆에는 Mr. Eternity라고 쓰여 있다. 그가 죽고 사람들은 그를 Mr. Eternity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비문에는 '하나님 임제 안에서 상급을 받고 기뻐할 것‘이라고 쓰여 있다. 아내에 대한 별다른 기록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결혼증명서에 1942년 1월 22일 결혼. 아서의 나이는 57세, 펄의 나이는 47세로 기록되어 있다.

▲ 아서 스테이스의 Eternity는 시드니우체국 종탑 안, 타운홀 스퀘어, 보타니 공원묘지 등에 새겨져있다.                       © 크리스찬리뷰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아서의 삶을 돌아보면 배후에 3명의 목사가 있었다. 그를 회개시켰던 하몬드 목사, 사명을 깨닫게 한 리들리 목사, 그를 세상에 알린 톰슨 목사이다. 그리고 목사들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27-28) 〠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한인사역(Korean Ministry)
              및 수용소 담당관(Chaplian, Detention Centre)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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