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악해진 착한 일과 이악해진 세상

서을식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3/04/17 [09:55]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립보서 1:6 )

 

뜨악(선뜻 마음이 가지 않아 서먹하거나 꺼림칙한)해진 착한 일

 

어린아이나 애완동물에게 우리는 자주 ‘참 착하다’고 한다. 만약 어른에게 ‘참 착하십니다!’ 하면, 아마도 화부터 버럭 내지 않을까 싶다. 누구에게 평가받는 느낌이 들어서 일수도 있겠으나, 혹 착하기를 거부하는 진심이 담겨있지는 않을까?

 

영악한 고객은 ‘호갱’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고, 영악한 시민은 ‘호구’가 되지 않으려 기를 쓴다. 소위 ‘당하지도 발리지도 않으면서’ 자기 이익을 지키고, ‘괜히 남을 유익하게 할 필요 없다’는 태도다. 이렇게 훈련하다 보면, 착한 일도 뜨악하게 낯선 일이 될 수밖에 없다.

 

무엇이 착한 것일까? 이렇게 정의해본다. “착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해 감사하는 태도와 삶으로, 하나님 앞에서 올곧음을 추구하고, 사람과의 상호작용에서 남을 존중, 배려하는 자비와 양선, 곧 섬김과 사랑을 실천하는 도덕적인 선택이다.”

 

문제는 착함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착한 마음에서 시작한 선행도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불편하고 상처받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착한 행동을 할 때는 미칠 영향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선한 의도와 달리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생기고 의외의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실상은 흔하다. 인풋과 아웃풋이 달라, 낙담하여 선행을 멈춘 이들도 많다.

 

이악(이익을 위해 아득바득 지나친)해진 세상

 

세상살이에 눈뜬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공통되는 점이 있다. 착하다는 말을 들으면, “어~, 내가 만만한가? 지금 내가 바보짓 했나? 나 손해 본 것 맞지! 그러니 나에게 착하다고 하지!”라는 생각의 선을 따라 사고한다. 숙달되다 보면, 지나친 깍쟁이로 이악하게 살게 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되다 보면, 아~, 참 삭막한 세상이여! 따리꾼(알랑거리면서 남의 비위를 맞추며 살살 꾀어내기를 잘하는 사람)의 표리부동이 멀지 않다.

 

착한 사람은 이용당하기 쉽다. 타인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쉽게 거절하지 못해 어려운 부탁을 받아들인다. 또 가능하면 실례하지 않으려 하고 갈등을 피하려고 한다.

 

이런 예의 바른 선의와 품격을 역이용하는 착하지 못한 사람은 늘 있었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해, 선량하다는 약점(?)을 이용 남의 시간, 노력, 자원을 마치 자기 것처럼 사용하려고 사람을 교묘히 세뇌하고 길들여 노예화까지 한다.

 

따라서 착한 사람은 마냥 착하지만 말고, ‘인식-마음-감정-편견 조작’에 유의해야 한다.

 

특히 탈선한 종교단체 등에서 정서적 학대로 지배력을 강화하는 가스라이팅이나 친밀감을 토대로 성적으로 착취하는 그루밍의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경계를 분명히 설정하고 매사에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표현하며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자신의 가치를 보호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다.

 

희나리(마른 장작) 터지는 소리 들리는 두메산골의 부뚜막이 그립다. 등잔불 가까이 앉은 할머니의 뜨개질, 방 한편에 놓인 할아버지의 화롯불이 그립다. 이웃과 옹기종기 둘러앉아 동치미에 군고구마 먹으며 나눈 대화, 공감한 표정, 섞인 체취가 그립다. 뜨막(왕래나 소식 따위가 자주 있지 않은)한 착한 사람들이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가을이다.

 

딱깍발이(신을 신이 없어 맑은 날에도 나막신을 신는다는 뜻으로, 가난한 선비를 낮잡아 이르는 말)로 드난(임시로 남의 집 행랑에 붙어 지내며 그 집의 부엌일을 도와주는 고용살이)을 살더라도, 이심전심할 수 있는 사람과 어울려 살 수 있다면 행복하리. 순수한 어린이 또는 동심을 가진 어른을 삶에 격하게 환영하여 함께 부르고픈 노래가 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서을식|시드니소명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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