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지만 ‘희망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네

글/김명동 사진/권순형·김신일 | 입력 : 2023/12/22 [14:28]

▲  33년 동안 세브란스병원에서 임상병리사로 근무했던 조인주 선교사는 현재 헤브론의료원 혈액검사실 책임자로 헌신하고 있다.©크리스찬리뷰      

 

아침나절인데도 햇살은 따가웠다. 하지만 캄보디아 전역에서 몰려든 수백 명의 환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료 순서를 기다렸다.

 

건강검진센터 앞에도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근로자나 국제결혼을 하는 사람들은 건강검진을 거쳐야 하는데 헤브론의료원이 이를 담당하고 있다. 

  

캄보디아에서 해외근로자 송출 업무가 본격 시작된 것은 지난 2007년부터다. 다른 외국 송출 국가들보다 시작은 다소 늦었지만 이웃나라인 베트남이나 태국, 인도네시아보다 그 숫자가 오히려 더 많다. 총 15개 송출국가 중 제일 많다. 

  

현재 한국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근로자 수는 4만 7천여 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처럼 캄보디아 근로자들의 송출 비율이 높은 이유는 캄보디아 근로자들의 성실성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국 고용주들의 선호도도 매우 높고 상대적으로 불법체류 율도 낮다고 한다.

  

문득 과거 1970년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독일로 떠났던 우리네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떠올랐다. 그들도 같은 마음으로 한국에 가길 간절히 원할 것이다. 그들이 소망하는 코리안 드림이 이뤄지길 기도하면서 발길을 옮겼다.

  

검사실 안정화가 꿈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반가이 손님을 맞는 조인주(65) 선교사. 그는 헤브론의료원 혈액검사실 책임자다.

  

조 선교사는 33년을 세브란스병원에서 임상병리사로 일했다. 2006년 제27차 세계임상병리사연맹 총회및 학술대회에서 포스터 부문 경영관리분야에서 최우수상을 받을 만큼 이 분야의 권위자다. 

  

그런 명성에 현재의 삶이 썩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다. 조그만 방,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

   

조 선교사는 “처음에는 힘들고 보이지 않은 어려움이 많았다”며 “하지만 고생한 만큼 보람도 많다.”고 말한다.

  

“처음에 와보니까 현지 직원들이 4명이 있었는데 3년을 전공했으면서도 이것도 모르나 싶을 정도로 너무 기초가 안 돼 있는 거예요. 일하면서 짬짬이 가르쳤는데 알만하면 떠나고 또 채용해서 가르쳐 놓으면 떠나고, 가지마라 할 수도 없어요. 

  

사실 월급이 두 배 이상 차이가 나니까요. 이달 말에도 두 명이 또 이직을 해요. 그래서 광고를 내서 신규 채용을 해야 되는데 지금 이런 현실이 참 힘들어요. 

  

게다가 평소 저희가 하는 일이 두 배나 늘었어요. 보통 하루 채혈 건수가 100여 건 되는데 요즘은 한국이주 노동자의 채혈 건수도 늘어 80여 건이나 돼요. 그러니까 하루에 180여 건을 검사해야 돼요. 여기에 옛날에는 정말 필요한 검사만 했거든요. 

  

간 기능검사, 당뇨검사 이렇게 처방이 나왔는데 요즘은 한 사람 채혈하면 당뇨, 심장, 간, 지방콜레스테롤 이렇게 많은 처방이 나와요. 그런데 저희가 가진 장비들이 그렇게 사양이 높은 장비들이 아니라 좀 벅차죠.”

 

조 선교사의 목소리에는 아이 같은 설렘과 묘한 떨림이 동시에 묻어났다.

  

“지금처럼 갑자기 또 그만두면 새로운 신규 직원이 오겠죠. 경력자는 오기 힘들어요. 그렇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훈련을 시키고 또 시켜서 좋은 직원으로 키워야죠. 물론 너무 일이 버겁고 직원들이 때때로 사고도 치니까 그때마다 예민해 지는 걸 느끼거든요. 그럴 때마다 무슨 생각이 드느냐면 내가 이곳에 섬기러왔고 이 사람들을 사랑하러 왔는데 그 마음이 떠나간다면 내가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있어요.”  

  

▲ 건강검진을 위해 채혈하고 있는 조인주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이제는 편안하게 노후를 즐길 수 있는 그가 질병과 빈곤으로 고통 받는 척박한 이 나라를 찾아오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조인주 선교사가 일산 제자성광교회 파송으로 캄보디아에 온 것은 2020년 6월이다.

 

 “제가 주님을 만나면서 앞으로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막 이런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세브란스병원에 몸담고 있으면서 항상 외국인 선교사들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죠. 그러니까 초창기에 병원을 지어주신 언더우드 이런 분들이 계시잖아요. 

  

그리고 제가 87년도 입사할 당시만 해도 캐나다에서 오신 외국인 여자 선교사님이 계셨어요. 이런 선교사님들의 삶을 떠올리면서 언젠가는 나도 그분들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조 선교사는 이 마음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선교 쪽으로 마음을 주시더라고요. 전문인들하고 의논을 해야겠다. 그래서 세브란스 의료선교 팀에다 의뢰를 했어요. 적당한 병원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 처음에는 아프리카와 몽골에 있는 병원을 소개해 주었지만 마음이 안내키더라고요. 다시 요청을 드렸죠. 

  

▲ 조인주 선교사. 채혈실 안팎으로 많은 환자들이 검사와 진료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크리스찬리뷰     

 

그때 헤브론병원을 소개해 주셨어요. 그리고 김우정 원장님이 한국에 계셔서 만났죠. 그랬는데 검사실이 있고 장비들도 있는데 책임자가 없다는 거예요.”

 

조 선교사는 “김우정 원장을 만나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는데 아, 이것이 소명이란거구나 결코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가족 이야기를 꺼내자 조 선교사는 이내 눈물을 보였다. 그는 “사실 그것이 가장 큰 영적 전쟁이었다”며 “정말 혼자 와서 사역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갈등도 많이 했다”고 토로했다.

  

조 선교사는 지난 2022년 5월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다. 

  

“남편은 IT 사업을 했었거든요. 그 일을 놓기 싫어했어요. 봉사하고 싶으면 한국에서 하지 왜 남의 나라까지 가서 하려고 하느냐는 거예요. 한국은 이미 인프라가 많고 지식이 있는 사람들도 많고 공부한 사람도 많은데 거기는 그렇지 않으니까 우리가 필요하다. 제가 고집을 피웠죠. 

  

그래도 할 일이 많다며 들은 척도 안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작은 회사들은 사람 구하기도 힘들고 재택근무를 많이 하다보니까 힘이 들었던 거예요. 

  

설득했죠. 여기는 당신이 필요하다. 할 일이 너무 많다. 병원 전산이 낙후되었다. 계속 설득하니까 기도를 하던 중 사업을 마무리하기로 했어요. 그런 후 위드 헤브론 진 국장을 만나 2-3명을 채용해서 그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로 계획을 세웠어요. 굉장히 좋아했어요.”

  

▲ 임상병리과 직원들과 함께 한 조인주 선교사(중) ©크리스찬리뷰     

 

조 선교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질병이 있었어요. 부정맥 진단을 받았죠. 이곳에 오려고 비행기 티켓도 알아봤거든요.”

  

“돌아가시고 오겠다는 마음이 있었나요? 마음이 굉장히 어려웠을 텐데요.”

  

“처음에는 갈등을 많이 했어요. 주위에서도 가는 걸 반대했고요. 그런데 딸이 엄마 선택대로 하라는 거예요. 자기는 뭐든지 엄마를 지지한다면서요. 하나님이 딱 말씀해주시면 좋겠는데 조용하세요. 그때 헤브론병원에 있는 직원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르는 거예요. 

  

경력자가 없는데, 내가 훈련을 시켜야 하는데, 아, 하나님이 어서 와서 일하라고 부르시는 것 같았어요”

  

조 선교사는 “하나님은 내가 아는 것, 경험한 것, 값진 것을 다 들어 쓰시려고 이 나이에도 늦었다 아니하시고 나를 쓰시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조 선교사는 지금까지 교회를 떠나본 적이 없다. 

  

“모태신앙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셨나 봐요.”

  

“별로 그렇지 않아요. 아빠가 군인이셔서 계속 이사를 다녔으니까요. 그래서 우리 가족 모두 군인교회에 다녔거든요. 그러니까 어릴 때 학생부 이런 것이 없었으니까 신앙이 자라질 못했죠. 성령의 역사가 뭔지도 몰랐고요. 그런데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열심히 다녔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죠.”

  

조 선교사는 “처음 이곳으로 올 때는 꿈을 많이 가지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왔었다”며 “그런데 2년이 지나 돌이켜보면 이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사람들을 통해서 많이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관계에서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 제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알게 됐어요. 할 수 있어도 기다려 주는 것,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잘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필요한 일을 최선을 다해 하는 것, 또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웠습니다.” 

  

조 선교사는 김우정 원장을 처음 만난 날의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김우정 원장님이 관계에 대해 많이 말씀을 하셨죠. ‘이곳은 연합하는 곳입니다. 사람들의 관계가 참 중요합니다.’ 한없이 가슴이 설렜어요.”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사역을 계속하겠다고 말한다. 혹시 사역하는데 짐이 되면 모를까. 

  

‘로타’를 만나자 이상한 감동이

  

병원 3층 복도를 지나가는데 멀리 김우정 선교사와 캄보디아 소년 옥 로타(Ork Rotha. 14)의 모습이 보였다.

 

 “로타다.”

 

 2022년 11월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캄보디아를 방문했던 김건희 여사가 두 팔로 안고 있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던 바로 그 소년이다. 

  

로타는 선천성 심장병 소년이었다. 2018년 헤브론의료원에서 한국에서 온 의료진에게 심장수술을 받은 후 상태가 호전되었지만 수술 후 살고 있는 집을 찾을 수 없어 후속치료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런 후 2021년 연말 로타가 가족에 이끌려 헤브론의료원을 찾아왔을 때는 치료를 제대로 못 받아 상태가 악화됐을 때다. 그런 로타를 헤브론의료원은 CAP(Care After Program 선천성 심질환 아동지원사업)의 수혜대상으로 지정하고 로타의 건강과 영양상태를 살피며 치료의 기회를 찾았다. 

  

그런데 2022년 8월 한국의료진이 헤브론의료원을 방문하여 수술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코로나 재 확산으로 한국의 의료진 방문 일정이 무산되어 수술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런 후 11월 김건희 여사가 헤브론의료원을 방문하였고, 이날  헤브론의료원은 김건희 여사에게 CAP를 소개하였다. 10여 명의 CAP 아동과 보호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참석하지 못한 심장병 어린이 ‘로타’의 이야기를 들은 김 여사는 로타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김 여사의 헤브론의료원 방문과 로타의 가정 방문이 언론에 보도된 후 의료진을 비롯한 많은 후원자들의 협력으로 로타는 12월 한국으로 건너가 서울아산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느닷없는 오드리 헵번의 이름이 정치판에 등장했다. 작년 윤석열 대통령의 순방에 동행한 김건희 여사가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로타를 안고 있는 사진이 공개되면서였다. 세계적 영화배우이자 자선사업가인 오드리 헵번을 따라했다는 주장이 야당 진영에서 제기된 것이다. 

  

특히 민주당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김 여사가 로타의 집을 찾아가 찍은 몇 장의 사진이었다. 오드리 헵번을 따라하면서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하여 조명을 별도로 장치하고 쇼를 했다는 것이었다. 

  

김 여사가 로타를 안아 든 모습에 복장, 시선, 분위기 모두 1992년 오드리 헵번이 소말리아에서 영양실조 아동을 안고 찍은 사진과 흡사하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면서 김건희 여사의 ‘빈곤 포르노’ 화보촬영이 논란이 된다고 주장했다. 

  

‘빈곤포르노’란 모금이나 후원 유도를 위해 가난을 적극적으로 묘사해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영상이나 사진을 의미한 비판적 의미를 담은 용어다. 

  

다행히 로타의 모습은 밝았다. 3개월 전의 모습과는 달랐다. 김 여사의 팔에 안겨있던 로타는 앙상한 모습에 힘든 표정이었다. 하지만 심장병 수술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후 지금의 로타는 밝은 모습이다. 

  

김우정 선교사가 거들었다.

  

“한국에서 수술 후 이곳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으면서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해서 많이 좋아졌습니다. 로타가 다시 걷고 뛸 만큼 많이 회복되어 너무 기쁩니다.”

  

▲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로타 군이 한국에서 수술을 받고 돌아와 회복 치료를 위해 헤브론의료원에 입원했다.©크리스찬리뷰     

 

사실 로타는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병 때문에 갈 수 없었다. 때문에 글씨 쓸 줄도 모른다.

  

그를 끌어안았다. 순간 참으로 이상한 감동이 가슴 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것이었다. 기도의 마음은 인종이나 나라를 초월해 하나가 되는 것일까. 

   

로타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로타의 집 형편이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로타의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거동도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헤브론교회 삐셋 전도사가 운전을 했다.

  

“멀지 않습니다. 가까워요.”

  

헤브론의료원에서 자동차를 타고 30여 분을 덜컹거리며 매연과 흙먼지 속을 달리던 차가 멈춘 곳은 녹슨 함석으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건물이 즐비한 빈민가였다. 대낮인데도 우중층한 분위기. 오랜 세월 태양의 열기와 습기로 인해 썩을 대로 썩은 벽과 벌어진 틈새들. 문 입구에는 빨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 회복 치료를 위해 입원한 로타 군을 간호사들이 돌보고 있으며, 로타는 주일예배에도 참석했다(위). 본지 편집진들과 기념촬영한 로타와 영어공부중인 로타(중).열악한 환경 속에 있는 로타 군의 집 내부. 엄마와 형수를 만날 수 있었다.(하) ©크리스찬리뷰     

 

삐셋 전도사가 노크를 했다.

  

“누구세요?”

  

 “로타 집이지요?”

   

문이 열리자 바로 방이다.

  

로타의 형수 문다른(41) 씨가 부끄러움을 타면서 얼굴을 내밀었다.

 

 “로타 어머니(칻잔티, 61)를 뵈러 왔습니다.”

  

“로타 엄마는 아프셔서 말도 거동도 제대로 못해요.”

  

방은 어둡고 냄새가 났다. 서너 평 남짓한 방 한 칸에 모든 세간이 다 놓여 있었다. 이 작은 공간에서 8명의 식구가 산다니. 가슴이 시렸다.

  

어른 세 명이 들어가니 서로 얼굴이 맞닿을 지경이었다. 방안 한쪽 낮은 선반 위에는 밥통이 있었지만 쓸 만한 그릇 하나 보이지 않았고 그 흔한 밥상도 없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로타가 좋아한다는 크레용 박스가 벽에 걸려있고, 방 위로 조그만 다락방이 있었는데 로타와 형제들이 자는 곳이라고 했다. 

  

“로타 어머니는 10여 년 전 남편을 잃은 뒤 청소부로 일하며 홀로 자녀를 키워왔죠.”

  

울컥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왜 그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할까.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렇게 어렵게 살고 있는 이들을 어떻게 알아내 헤브론이 이 구석까지 구제의 손길을 뻗쳤을까 하는 것이었다. 

  

“한국 대통령 부인도 왔었지요?”

 

 “네, 도움을 많이 줘서 로타가 수술할 수 있었습니다.” 

  

‘찰칵찰칵’

  

권순형 발행인이 눈을 빛내며 셔터를 연신 누른다.

   

“그나저나 그 사람들이 조명을 썼을까요?”

   

권 발행인에게 속삭이듯이 물었다.

   

권 발행인은 웃음으로 답했다. 한숨을 삼키면서.

 

우리는 헤어지면서 작은 선물을 건넸다. 

   

“이제 로타가 공부를 잘하고 건강하게 자라서 이웃을 돌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눈자위가 붉어졌다. 형수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자는 이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깊은 위로와 만지심이 있기를 기도했다.

  

로타는 헤브론의료원에서 4주간의 입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퇴원하기 전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CAP센터에 들려 편지를 썼다고 한다.

  

“제 이름은 로타입니다. 수술 후에는 많이 걸을 수 있고, 건강도 많이 좋아졌고, 예전만큼 피곤하지도 않아요. 수술 전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학교 가기’였어요. 

 

저를 도와주신 한국의 의료진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어요. 한국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눈’을 봤을 때랑 대통령과 영부인을 만났을 때예요. 

 

저를 안아주셨을 때, 행복한 기분이 들었어요. 헤브론병원에 머무는 동안 의료진과 대화도 하고 영어도 배우고 CAP사무실도 놀러가서 재미있었어요.집에 돌아가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옷을 빨고 집을 청소하는 거예요.”

  

떠나세요

  

기자는 이번 선교여행에서 인간 내면의 순수함을 자주 목격했다. 한 가지 한 가지마다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지만 그 중 감동적인 것은 캄보디아인들이 저희들을 찾아준 은인, 한국인 선교사들에 대하여 그토록 지극하게 존경을 나타내주는 그 자세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캄보디아 의료진들과 직원들은 물론 환자들도 마주치면 활짝 웃는 얼굴의 반가운 인사, 누가 되었던 그들은 활짝 웃었고, 두 손을 합장하며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저희들에게 인술을 베풀어주는 한국선교사들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읽혔다.

  

희망도 보았다. 젊은이들과 현지인 의료진 또한, 믿음의 토양 속에서 뿌리가 제대로 내리고 있었다. 이들은 민족과 나라를 포용할 깊이와 넓이로 크고 있었다. 이웃을 향한 사랑도 이들의 생명 속에서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들은 큐티와 예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삶에 대한 신비를 더 알고자 하여 눈을 빛내고 있었다. 박수를 치고 기도하며 아멘을 소리쳐 외치고 그들은 감동에 인색하지 않았다. 

  

감동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기쁜 수확이다. 그들은 수확을 놓치지 않았다.

  

물론 서로 간의 갈등도 보였다. 사실 이 땅에, 오늘날과 같은 믿음의 터 밭이 조성되기까지 어떤 부작용인들 없었겠으며 신앙의 위태로움과 불미스러움은 없었겠는가. 

  

어차피 성장의 조건 속에는 방해와 질병, 모순들이 있게 마련, 한 분 한 분에게서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할 때마다 그것이 흠으로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친근감으로 가까이 왔다. 

  

본지 연재를 통해 선교 여정을 다시 돌아본다. 

  

여행 중 쓴 일기와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그때 느꼈던 복음의 진리대로 살고 있는가, 되묻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선교 여정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사랑을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 CAP 팀이 로타 군의 가정을 방문, 건강을 점검하고 선물을 전달했다. 2023년 2월에 만났던 로타를 7월에 다시 만났는데 건강도 좋아졌고,환경이 좋은 거처로 이사도 했다. 사진은 헤브론의료원 원목 전덕영 목사와 CAP 담당 직원 싸디 씨.©크리스찬리뷰     

 

세상의 가치에 굴복하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지켜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가난과 무지와 질병으로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곳에 헤브론의료원이 세워진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란 생각이 매번 들었다. 

  

기실 이곳에 와서 눈으로 보기 전에는 한국에도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해외까지 돕는다는 게 타당한 것인가 하는 의아심을 품기도 하겠지만 얼마나 잘못된 민족 이기주의인가를 묵상했다. 

  

선교 여행을 통해 익숙한 자리를 벗어나길 권하고 싶다. 선교 여행을 통하여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에베소서 5장 10절 말씀을 시험해 볼 수 있다. 그곳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재료로 성경의 말씀을 실험해볼 수 있다.

  

기자가 경험한 교훈이다.

  

복음으로 변화될 이 땅에 사랑의 예수님이 함께하기를. 그리고 은혜로 또 만날 수 있기를.〠 <끝>

 

김명동|본지 편집인

권순형|본지 발행인  김신일 본지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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