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마태복음 6:19-20)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4/01/26 [12:03]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물질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청빈한 사람도 돈 한푼 없이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신학자 자끄 엘룰은 이렇게 말했다.

 

“돈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람은 돈 없이 살 수 없으며 누구에게나 돈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문제는 돈을 대하는 태도다.

 

인간의 욕심

 

돈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아무리 채워도 끝이 없고 만족할 줄 모른다. 실제로 좀 더 큰 집에서 살고 싶고, 좀더 고급스러운 자동차를 타고 싶고, 좀 더 화려한 옷을 입고 싶은 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하지만 그 본성대로 끌려가다 보면, 우리는 결국 돈의 노예가 되고 만다. 돈에 욕심을 부리면 감사하지 못하고 자꾸 불평과 불만만 늘어간다.

 

결국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돈을 더 의지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예수님은 보물을 땅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신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구체적인 행위는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을 위해 내 몸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헌금에 대한 이해

 

우리의 예배, 사역, 봉사, 헌금, 구제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 중에서도 “보물”이 물질을 가리키기에 이 말씀은 무엇보다 ‘헌금’과 관련되어 있다.

 

신앙의 길을 순례하는데 있어서 헌금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헌금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헌금은 자선을 위한 기부금이 아니다. 또 교회에 내는 회비나 찬조금도 아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제단 앞에 구별하여 드리는 ‘예물’이다.

 

따라서 헌금은 세속적인 재물이 아니라 거룩한 예물이다. 특히 하나님을 예배할 때 거룩한 예물을 준비해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은 신앙의 의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신 16:16).‘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은 ‘교회’이고 ‘여호와를 뵈옵는 것’은 ‘예배’다.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빈손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구약 시대에는 소와 양을 잡아 희생 제사를 드렸다. 때론 곡식과 기름으로도 드렸다. 그때 그 예물을 준비하는 사람은 제사장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 성도들이었다. 성도 각자가 제사를 드리러 나올 때, 하나님이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예물을 준비해 나왔다.

 

다시 말하면 헌금은 예배의 필수 요소다. 빈 손으로 하나님을 뵐 수 없다. 우리가 집안의 어른이나 스승을 찾아뵐 때에도 빈 손으로 가지 않는다. 하물며 하나님을 예배할 때 빈 손으로 나올 수 있겠는가? 헌금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 아니다. 헌금은 예배의 필수이며, 헌금하는 태도는 신앙의 척도다.

 

그래서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은 “그 사람의 영적 수준과 믿음을 알려면 그의 헌금생활을 보라”고 했다. 이것은 헌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얼마나 바르게 또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맞게 헌금을 드리는가?를 강조하는 것이다.

 

올바른 헌금생활이 올바른 신앙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또 요한 웨슬레는 “나는 주머니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의 회심을 믿지 않는다”라는 말까지 했다. 회심의 증거, 예수 믿는 증거가 헌금에 달려 있다는 의미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장로교 신학의 토대를 놓은 존 칼빈, 그리고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까지 모두 헌금을 강조했다. 그만큼 헌금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헌금 생활

 

헌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올바른 헌금 생활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첫째, 헌금은 자원하여 드린다.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출 35:5).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였다. 그때 모세가 예물을 할당해 주거나 종류를 정해준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각자가 자기들 소유 중에서 자유롭게 택해서 드리라고 했다. 그래서 누구는 금을 가져오고, 누구는 은을 가져오고, 누구는 천을, 누구는 가죽을 드렸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원하여 드렸다.

 

이처럼 헌금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헌금의 액수나 종류를 정하는 것도, 내 소유 중에서 내가 정해서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누가 강요해서 드리는 게 아니다.

 

또 억지로 내서도 안된다. 인색해서도 안된다. 자원하여, 기꺼이, 넉넉한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둘째, 헌금은 미리 준비하여 정성스럽게 드린다. 구약 시대에 희생 제물은 흠이 있거나 상처가 있으면 제물로 드릴 수 없었다. 만일 흠이 있다면 하나님이 진노하신다. 그래서 정결하고 온전한 제물을 미리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하나님께 드렸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헌금도 마찬가지다.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후 9:5).

 

셋째, 헌금의 기본은 십일조다. 십일조가 헌금의 완성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 십일조는 헌금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신앙의 기본이 두 가지가 있는데, 주일성수와 십일조다. 주일성수는 일주일 중에 하루를 거룩하게 구별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시간의 주인이시고, 물질의 주인이심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다.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을 가로챈 후에 도망하던 중에 하나님을 만났다. 그때 야곱은 대단히 중요한 이치를 깨닫게 되는데, 십일조에 대한 이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 28:22). 십일조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으면 내가 번 돈에서 즉, 내 돈에서 십분의 일을 떼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한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야곱은 비록 자기 힘으로 일을 하고, 자기가 땀 흘려서 모은 소유도,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십일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을 주셨는데, 그 열 중에 아홉은 나를 위해 쓰고 하나만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다.

 

내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되돌려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십일조를 포함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결과적으로 누구를 위한 헌금인가?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고, 교회를 위한 것도 아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순전히 우리를 위한 예물이다. 우리를 위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라면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준비해서 즐거이 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샬롬! 〠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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