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 문화적 크리스찬

이명구/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4/02/23 [17:23]

 

내가 즐겨 듣는 유튜브 시사평론가가 있다.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에 빠져 있었던 그는 말하기를 원래 마르크스주의에는 종교성이 있다고 한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목숨을 불사하는 마르크스 혁명에 반드시 가담하게 되는데, 그것은 거의 종교적인 차원을 갖는다고 한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목숨을 걸고 혁명을 하려는 종교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걸 뒤집어서 말하면, 마르크스주의적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혁명에 목숨을 안 거는 사람, 즉 그런 종교성이 없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그 유튜버는 요즘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에 목숨을 걸고 혁명하는 사람들이 요즘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요즘의 좌파운동가들에게 당신은 마르크스주의자인가 라고 물으면 펄쩍 뛰면서 자기는 아니라고 잡아떼면서, 자기들은 그저 공정과 정의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들을 일컫자면 그저 쿨하게 보이는 것 때문에 좌파에 서는 사람들로서, 소위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결코 목숨을 걸고 혁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쿨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어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데 관심이 있다.

 

그렇다면, 세상은 이제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에 물드는 일은 없어질 것인가? 그 유튜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어쩌면 문화적 마르크스주의가 더 파괴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은 무엇이든지 해체한다는 것이다.

 

모든 기준을 다 무너뜨리고 다 해체해 버린다. 도덕적인 규범은 물론 인륜도 중요하지 않게 본다는 것이다. 심지어 원래의 마르크스주의가 이루려는 계급타파도 관심 없고 자신까지도 해체하는 길로 간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들은 그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오직 나만이 모든 것의 중심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쿨하게 보이기만 하면 된다. 그걸 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은 다 타도 대상이다. 이런 끔찍한 정신이 왜 남의 얘기로만 들리지 않는 것일까?

 

예수께서 마귀에게 받으신 두 번째 시험에는 놀라운 점이 있다. 마귀가 “기록되었으되”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용하면서 도전해온 것이다. 마귀가 사람들을 유혹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기까지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가 하는 성경에 대한 해석이다.

 

마귀는 예수를 높은 성전 꼭대기로 데려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거기서 떨어지라고 한다. 그러면, 시편에 “기록되었으되”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를 발에 땅에 부딪히지 않도록 받아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깊은 유혹이다. 간단히 말하면, 믿음을 이용해서 자기가 영광을 취하라는 유혹이다.

 

이 유혹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항상 커다란 유혹이 되지만, 특히 현대인들이 더 많이 빠지기 쉬운 차원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과 위치를 사용해서 특혜 또는 인기, 인정, 박수를 받아보라는 것이다. 즉,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으라는 유혹이다.

 

무엇이 중헌디? 돈을 가지는 것도 네가 영광 받는 곳으로 데려다 주지 않으면 의미가 별로 없다. 다 필요 없다. 규범이니 인륜이니 다 필요 없다. 네가 영광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람들의 박수가 전부다. 사람들이 열광할 때 그대는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다 라는 것이다.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귀가 예수께 던진 두 번째 시험이 주는 미끼를 덥석 물고 있는 자들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미끼를 던지고 있는 자들이 아닐까?

 

그런데 이 문화적 마르크스주의 문제는 그들에게서만 끝나지 않는다. 기독교적 영성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얼마든지 일어난다. 목숨을 걸지 않는 종교라는 것이 어디 있으랴마는 기독교는 더욱 그러한 종교가 아닌가?

 

기독교는 십자가로 가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의 가르침에는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 있다. 문제는 십자가를 바이패스하고 부활로 가려는 유혹이 교회 역사 내내 있어 왔으며, 그것이야말로 기독교의 부패의 근원이 늘 되어 온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현대로 오면 올수록 마르크스주의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목숨을 거는 일은 희미해져 간다. 그런 면에서 현대인들이 옛날 사람들보다 영성이 더 좋아졌다고 말하긴 어렵다. 이전의 사람들은 그것이 종교든, 주장이든, 사상이든 그것이 관철되게 하는데 기꺼이 목숨을 거는 일이 많았다.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란 용어가 가능하다면 문화적 크리스찬이란 용어도 가능하지 않을까? 문화적 크리스찬들이란 기독교 종교는 갖고 있으나, 믿음의 대상이신 그 분이 걸으신 길은 잘 따라가지는 않는, 한국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나이롱신자들을 넘어, 지금까지의 논조로 말하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기까지 하는 마음은 없이 그저 사람들에게 쿨하게 보이기를 힘쓰는 자기 중심적 크리스찬들이라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크리스찬들은 믿음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어 희생하면서 지켜온 복음과 진리의 열매를 먹고 있다. 지금의 크리스찬들이 문화적 크리스찬으로 남아 있길 원한다면 다음 세대 크리스찬들에게 무슨 열매를 남겨줄 수 있을까?〠

 

이명구|시드니영락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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