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은퇴기념 에세이집에 펴낸 글 가운데 ‘부활절과 부활의 실체’를 다시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한다.
해마다 부활절이 오면 교회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며 영원한 소망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부활은 교회가 기념하는 가장 뜻깊은 명절이다. 많은 교회들이 한곳에 모여 연합예배를 드리며, 그리스도의 개선을 찬미하기도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 밖에 영원한 소망이 없음을 온 세상에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자랑이요 영광이다. 그러나 부활절이 해마다 한 번씩 지키는 하나의 절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부활절이 아니라 부활, 그 자체이다. 사실상 부활의 축제는 매주일마다 행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천지창조를 완성하신 하나님이 창조를 기념하며 토요일을 신약시대에 와서는 타락된 세상을 재창조하시고 구속사업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점을 두게 되면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일요일을 주일(主日)로 지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일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며 부활생명을 누리면서 감격에 넘친 예배 (축제)를 드리고 있다. 이러한 의미가 담긴 부활절이 되어야 한다.
어쨌든 부활이란 단어는 기독교만의 전통적인 용어이다. 다른 종교에는 부활절이 없다. 있을 수도 없다. 그들에게는 부활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이다. 모든 것을 모방할 수는 있어도 부활만은 흉내낼 수는 없다. 그들 교조들의 무덤이 그 점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기독교는 무덤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루살렘에 가보면 예수께서 묻혔던 곳이 빈무덤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아직 기독교를 받아드리지 않는 유대인들이 빈 무덤을 지키고 관광객을 맞고 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부활은 다시 일어나고 살아나는 생명 그 자체이다. 다시 살아나야 할 생명이기에 성경은 죽음을 가리켜서 "잠을 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잠자는 자를 깨우듯이 예수님은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소녀는 잠에서 벌떡 일어나듯이 살아났다. 심지어 무덤에 장사되어 나흘이나 된 사람을 그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자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걸어 나왔다.
나흘이면 시체가 썩는 상태이다. 시체가 썩어 흙이 된들 창조주의 명령 앞에서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그런 예수가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으셨지만 무덤에 갇혀 있을 분이시겠는가?
만일 예수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인류의 백과사전에 "부활"이란 낱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예언하고, 그 자신이 여러 번 확인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할렐루야!
교회를 생명의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몸이기 때문이다. 그 몸의 지체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하늘과 새땅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이번 부활절을 맞는 우리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부활신앙을 확고히 하고, 사람들을 멸망에서 구출하는 일에 함께 일어서야 할 것이다. 이것이 부활 공동체인 교회에 맡겨진 사명이다.〠
홍관표 본지 편집고문 시드니중앙장로교회 원로목사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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