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주는 물을 마시는 예배자

“내가 주는 물은”(요한복음 4:13~14)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2/27 [12:27]

우리 몸의 70- 80%가 물로 이루어져 있다. 무게가 나가는 뇌하고 뼈를 빼고 나면 우리 몸은 대부분이 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물이 조금만 부족해도 금방 갈증을 느끼게 된다. 한 연구자료에 따르면, 갈증이 나면 두뇌 회전이 떨어지고 집중력이 분산된다. 몸에 물이 부족하면 뼈 마디, 관절들이 딱딱해져서 부드럽게 움직일 수 없으며 땀샘에서 땀을 내지못하게 되어 몸에 열이 많아진다고 한다. 그리고 세포가 성장하려면 혈액에 수분이 풍부해야 한다.

이처럼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물이다. 그러나 아무 물이나 마실 수 없다. 바닷물이 아무리 깊고 넓어도 그 물을 마실 수는 없다. 목이 마르다고 해서 바닷물을 마시면 더 갈증이 날 뿐이다.  제대로 된 물을 마셔야 한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영혼도 제대로 된 물을 마셔야 한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을 신봉하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요 4:13)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물은” 야곱의 우물이다. 야곱의 우물은 나의 만족을 위해, 나의 욕망을 위해 세상에서 찾는 물이다. 제대로 된 물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이 주는 물을 마시는 자마다, 예외없이 “다시 목마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세상이 주는 물에도 기쁨과 만족이 있을 수 있다. 돈을 많이 벌게 되고 명예가 높아지고 권력을 쥐게 되면 만족감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물질과 명예 그리고 권력도 우리의 목마름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다.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막 8:36-37)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세상보다 크다. 온 천하보다도 소중한 것이 우리 사람이다. 사람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사람은 하늘보다도 높고 땅끝보다도 넓고 바다보다도 깊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온 천하보다 크고 넓고 깊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크기는 측량할 수가 없다. 반면에 눈에 보이는 세계는 유한하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영혼을 채울 수 없는 이치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주는 물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우리의 영혼은 늘 목이 마른 법이다.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충만히 채우실 수가 있다.

 
소유보다 큰 존재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 4:14)라고 하셨다. 세상이 주는 물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는 물이 제대로 된 물이다. 그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주님이 주는 물이 아니라 여전히 세상이 주는 물을 찾고 있다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유명한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존재와 소유>라는 책을 통해 인간의 행복의 조건이 존재인가 아니면 소유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돈을 모으고, 행복지기 위해 권력을 추구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명예를 쌓는다. 물질과 권력과 명예는 모두 소유에 속하는 것이다. 소유를 통해 인간은 행복해지려 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더 많은 소유를 소유하려고 한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은, 소유를 행복의 조건으로 여기며 끝없이 소유를 추구했던 서구 사회가 오히려 정신적으로 황폐해졌다고 지적했다. 소유가 곧 행복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 소유하려고만 한다. 만일 소유가 행복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내가 남보다 적게 소유하고 있을 때 그것은 곧 불행이 된다. 내가 남보다 단 1불이라도 적은 소유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남보다 행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아무리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더 많은 소유를 생각할 때마다 불안해지고, 또 불안하기 때문에 더 많은 소유에 집착하게 된다고 했다. 소유와 불안의 악순환이다. 아무리 많은 소유를 지녀도 목이 마르기 때문이다.

잊지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존재는 우리의 소유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소유보다 더 크고 더 깊고 더 넓다. 아무리 소유가 적어도 우리의 존재가 소중하고, 그 존재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소유에 집착할 때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에는 일제치하에서 가난하고 억압받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해방이 되어서도 6.25전쟁으로 가난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찾았다.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갈 돈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로 달려가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다. 너무 가난해서 기댈 곳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 배가 고파요. 좀 먹고 살게 해 주세요. 하나님 공부를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요’라며 애타게 기도했다.

그때에는 정말 간절히 주님을 찾으며 주님이 주시는 물을 받아 마시며 살았다. 목사도 성도도 하나님께 매달리며 하나님이 주는 물로 살아갔다. 그리고 그때에는 교회도 예수님의 이름도 높임을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의 형편이 너무도 형편 없어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이 주는 물이 아니면 살 수 없었던 그 시절이었지만, 그때에는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가 존중을 받았다.

하나님이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 결과 한국의 경제는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한국 교회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크게 성장을 했고 대형교회 건물들이 한국 도처에 웅장한 자태를 뽐내게 되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소유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그런데 소유가 많아지자 더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전에는 그토록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건만 이제는 세상을 더 찾아다닌다. 하나님의 존재보다 자기의 소유를 더 신봉하게 되었다. 말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데, 삶으로는 우리의 소유를 더 믿는 것이 현실이다. 입술로는 수없이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며 찬양하는데, 우리의 눈은 세상이 주는 물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더 많은 소유를 얻기 위해 하늘이 아니라 땅을 바라보고 살아간다. 왜냐하면 소유에 집착할수록 더더욱 목마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소유에 집착한 교회의 추문은 더이상 놀랄만한 뉴스가 되지 못하고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주님의 이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땅에 떨어졌다.

 
내가 주는 물을 

그리스도인이 주님이 주는 물을 마시지 못하고 이 세상에 집착한다면 언제나 목마를 수밖에 없다. 교회가 주님이 주는 물을 마시지 못하고 소유에 집착한다면 더이상 존중받는 교회가 될 수 없고 예수님의 이름도 높임을 받을 수가 없다. 예수님은 분명이 말씀하셨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받아 마셔야 한다.

예배는 세상을 더 많이 소유하려는 삶에서 떠나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시간이다. 예배는 우리의 존재가 우리의 소유보다 더 크고, 우리의 영혼이 온 천하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다. 그리고 예배는 세상이 주는 물을 끊고 주님이 주는 물을 받아 마시는 시간이다.

우리 모두 날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예배자가 되자. 천하보다 더 소중한 영혼에 주님이 주시는 물로 채우자. 그때부터 우리의 영혼은 만족감을 누리며, 우리의 행복은 아무리 짧은 시간일지라도 영원으로 이어질 것이다.〠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blog.daum.net/goodseed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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