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위대한 스승 ‘아우구스티누스’ (2)

기획연재|복음의 불꽃이 되어

원광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08/30 [17:34]
히포의 감독으로 사역
 
388년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로 돌아왔다. 이 당시 그는 고향 타가스테에 자기와 동료들을 위하여 일종의 수도원을 세우고 독신과 청빈의 공동체 생활을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 총명하던 아들 아데오다투스가 갑자기 사망하여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

그는 결국 더 큰 도시인 히포(Hippo)로 거주지를 옮겼고, 거기서 수도원의 생활을 시작하려했다. 히포를 택한 것은 거기에는 이미 다른 감독이 있었으므로 자신이 감독의 일을 하게 될 염려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그곳의 교인들의 환호와 끈질긴 요청 끝에 391년 그는 어쩔 수 없이 사제(司祭)가 되었고, 395년에는 42세의 나이로 히포의 감독이 되었고, 43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히포의 감독으로 사역하였다.

훗날의 한 설교에서 그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종이 주인을 거역할 수는 없나 봅니다. 저는 이곳 히포에 한 친구를 만나러 왔었습니다. 그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수도원에서 우리와 함께 살게 하려는 생각이었지요. 저는 안심했었습니다. 이곳에는 이미 감독이 계셨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사제가 되었고 결국 여러분의 감독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감독이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당의 뜰에 수도원을 세우고 근 사십 년 동안 성경 말씀에 사로잡힌 사제들과 감독들을 키워냈고, 이들이 아프리카 전역으로 흩어져 교회를 새롭게 하는 역할들을 감당하였다. 그는 스스로 철저한 채식과 청빈과 순결을 지키며 생활하였다.

히포의 감독으로서 그는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갖가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교회원들의 영적인 치리와 감독은 물론, 법적인 문젯거리들을 해결하며, 감옥을 방문하며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학대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도 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 임무는 설교와 가르침이었다. 그의 설교는 결코 현학적이거나 난해하지 않았다. 회중이 거의 어부나 농민, 아니면 상업에 종사하는 평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구어체의 단순한 표현들을 사용하였고, 설교 간간이 박수로 화답하기도 하고 심지어 질문을 하기도 했다. 성경적인 진리들을 청중의 상태에 맞추어 전하는 데에 큰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교인들이 나의 말을 오해하도록 말을 어렵게 하느니 차라리 문법학자들에게 꼬투리를 잡히는 편이 훨씬 낫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히포의 감독이 되게 하신 것은 그 이후의 교회 전체를 향하신 그의 은혜의 섭리였다. 왜냐하면 그는 히포의 감독으로서 교회 전체의 신학적인 논쟁에 직접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과정에서 후대의 교회들이 성경적인 사상 위에 견고히 세워지는 데에 결코 사라지지 않을 크나큰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회는 초대 교회 때부터 수없이 박해를 받았고, 특히 로마 제국에서는 혹독한 박해들로 인해서 교회가 엄청난 고초들을 겪었다.

특히 로마 황제 데키우스(Decius)와 디오클레시안(Diocletian)의 치세에 불어 닥친 박해로 인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환난을 당하고 피를 흘렸다. 이런 박해들로 인해서 교회 내에 적지 않은 어려움들이 생겨났다. 곧, 이런 박해 때에 신앙을 버렸다가 후에 다시 돌아온 교회 지도자들로 인한 문제였다. 일부의 사람들이 배교(背敎)했다가 돌아온 사제들을 비난하였다.

그들이 배교한 자들이므로 그들이 베푸는 세례도 부정한 것이요 그들이 주는 성찬의 떡도 부정한 것이라고 하며 거부하면서, 별도로 분리된 교회를 세워 혼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 주동자는 도나투스(Donatus)였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이들을 도나티스트들(Donatists)이라 불렀다.
 
명확한 신학원리 제시
 
아우구스티누스 당시에 북아프리카에는 도나티스트 교회들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여 전체 교회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명확한 신학적인 원리를 제시하여 교회와 성례에 대한 분명한 기초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그는 세례와 성찬에서 얻는 은혜는 성찬을 집례하는 성직자에게서가 아니라 오로지 거룩하신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며, 성직자는 그저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례를 시행하는 성직자가 부정하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성례가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하수구를 통과하여 비친다고 해서 태양 빛이 더럽혀지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405년경 펠라기우스(Pelagius)라는 수도사가 로마에 당도하여 당시 교회의 도덕적 해의와 불순종을 질타하였다. 그는 이런 현상의 원인을 궁리하던 중,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 교리를 공박하기 시작하였다. 주권적인 은혜의 교리가 사람을 나태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 자신에게 거룩해지고 순결해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명령하신 것은(벧전 1:16) 인간에게 스스로 거룩해질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며, 비단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도 사람이 자기의 의지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선택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란 인간이 순종하기를 선택할 때에 말씀으로 밝혀주는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원죄(原罪)도 부인하였다. 아담이 지은 죄는 아담 개인의 죄일 뿐 후손에게는 전가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하여 부패한 상태로 세상에 나지만, 이는 부모들과 동료들에게서 나쁜 영향을 받는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가 함께 공조하여 구원을 이루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선택을 망가뜨리며 결국 구원의 역사를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단적인 사상일 수밖에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에 대응하면서 인간의 죄와 부패성의 전가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관한 강력한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로마서 5장의 논지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인류가 아담의 죄의 죄책을 지며 따라서 영원히 정죄 받을 처지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인류가 이처럼 죄악성을 물려받아 부패한 상태에 있으므로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를 짓는 일 외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강변하였다. 아담의 타락 이후 온 인류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non posse non peccare)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인간 자신으로서 어쩔 수 없는 죄악된 상태에서 구원받을 길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는 길밖에는 없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에게 주권적인 은혜로 그 사람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역사하사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시고 믿고 신뢰하게 하는 의지를 주시고, 그 의지를 통해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에게 참된 선한 결단이나 행동이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은혜의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시니, 이는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하시는 바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언제나 믿음을 율법보다 앞세운다.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힘을 얻지 않고서는 우리 스스로는 율법이 명하는 바를 도무지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도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인간이 자기 의지로 하나님의 의를 행할 수 있다면, 결국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본성으로는 절대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지극히 의로운 진노에서도 속량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회개와 기도로 생애 마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외에도 갖가지 문제들에 관여하였고,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고백록],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 [기독교 교리](De Doctrina Christiana), [삼위일체론], 그리고 [창세기 주석], [시편 주석], [로마서 주석] 등이 있고, 그 외에도 많은 설교문들과 편지 등을 남겼다.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이시도레 세빌레(Isidore Seville)라는 한 스페인의 신학자는 그의 저작을 모두 모아놓은 서고 위에다 “이 모든 것을 다 읽었다고 주장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다”라는 현판을 걸어놓았다고 전하기까지 한다.

430년 8만 명의 반달족이 막강한 세력으로 히포를 침입하였다. 두 사람의 다른 감독들이 이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동료들이 “다른 동네로 피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그에게 피신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그는 대답하기를, “그 누구도 우리 배를 그렇게 값싸게 손쉽게 차지할 꿈을 꾸게 할 수는 없다.

이처럼 위급한 때에는 선원들도 배를 버려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선장이 어떻게 배를 버리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해 8월 28일, 아우구스티누스는 86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서, 다윗의 회개의 시편(시 51편)을 벽에 걸어놓게 하여 그것을 계속 읽으면서, 기도와 회개로 남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원광연|시드니영락교회 EM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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