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트다운인’ 화석 사기사건

배용찬/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4/03/24 [11:25]

1912년 영국 이스트 서섹스주 필트다운이라는 마을에 지질학자 도우슨(C. Dawson)은 몇 개의 뼈 조각을 캐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인류의 진화과정을 밝힐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를 동료 지질학자였던 대영박물관의 우드워즈(A. Woodworth)에게 알렸고 그는 이 뼈 조각들이 현생인류와 유인원 사이의 중간화석이라고 인정함으로써 희대의 사기극은 막이 올랐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913년 영국의 킹스 칼리지의 워터스턴(D. Waterstern)은 과학 잡지 ‘내이쳐’지에 인간의 머리뼈와 유인원의 아래턱뼈를 붙인 조작임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프랑스와 미국의 동물학자들도 이에 동조함으로써 조작설이 부각되었으나 1915년 도우슨은 같은 지역에서 두 번째 필트다운인의 유골을 발견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이 조작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우드워드는 현생인류에 가까운 머리뼈와 유인원과 유사한 아래 턱뼈로 이루어 진 점으로 보아 유인원이 인간으로 진화하는 연결고리의 화석이라고 주장했으며 왕립 외과 의사였던 케이스 교수(A. Keith)는 머리뼈의 크기를 복원하여 호모 필트다운인(Homo Piltdownensis)으로 명명까지 하였다.

이로서 당시에는 유인원과 인류의 진화과정을 연결해 주는 ‘잃어버린 연결고리’로 확실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화석은 최초 발견자였던 찰스 도우슨이 평생을 통해 만들어 낸 위조품 중 최고의 걸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학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다가 그 후 이 화석이 가짜 화석임이 밝혀지기까지는 40년 동안이나 학계에서 인정받아 왔다. 결국 1953년 11월호 타임지는 이 화석이 중세 인간의 머리뼈와 500년 전 보르네오 섬에 살았던 오랑우탄의 아래턱뼈를 맞추고 침판지의 송곳니로 조합한 조작된 화석임을 밝혀내게 되었다.

조작된 화석이 한동안이나마 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진화론자들이 그렇게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던 중간 연결고리 즉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를 유인원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형태의 화석으로 찾았다는데 환호하면서 이를 맹신한 결과였던 것이다.

당시 과학계에는 인간의 섭취음식이 변하면서 턱과 두개골의 진화가 먼저 오고 팔과 다리의 진화가 그 후에 온다는 가정이 정확히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이 화석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소홀히 했던 것이다.

인류는 직립보행을 먼저 하면서 손과 발이 변하고 그 후에 머리가 커진다는 진화 이론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이 필트다운인의 화석은 인류 진화에 중요한 화석으로 인정받으며 관련 논문도 250여 편이나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비슷한 화석이 북미에서도 나와 원시인류가 북미에서도 살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네브라스카인이라고 명명한 적도 있다.

또 다른 조작의 이유로는 국가주의 과학이념이 순수과학 이념을 우선했기 때문이었다. 인류의 화석이 풍부하게 발견된 유럽대륙에 비하여 관련 화석이 전무했던 영국은 이 필트다운인 화석의 발견을 국가적 성과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조작을 부추긴 점도 무시할 수 없는 한 이유가 되었다.

과학이 국가주의에 예속되어 국가가 파탄된 예는 1,2차 세계대전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운 진화론적 과학을 독일 국가가 이용하다보니 독일 국민은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여 순수혈통을 지켜야 한다는 국가의 그릇된 인도로 유태인 6백만이 처형되는 세기의 비극이 일어났고 진화론이념을 바탕으로 한 우생학적 인종주의로 무장된 스탈린은 공산주의를 내세워 몇천만 명의 인명이 희생된 것을 보아도 국가가 허구의 과학인 진화론을 통치이념으로 활용하면 인류의 비극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이런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배용찬|멜본한인교회 은퇴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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