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고 주려고

서을식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01/27 [11:06]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왜 사냐건 / 웃지요”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의 마지막 부분이다. “왜 사느냐?”라고 묻는데 “왜 웃을까?”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몰라서? 알아서? 그냥 답하기 곤란해서?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서? 숨기고 싶어서?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이라서? 너무 나이가 어려서? 너무 나이가 들어서?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어서? 아니면, 이유가 너무 많아서? 확실히 모르겠다. 그러나, 극히 중요한 질문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단지 “왜 사는지”가 아니고 “왜 살아야 하는지” 그 목적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식을 알고 산다면 무척 행복한 사람이리라.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분이셨고 오늘 성구는 이 점을 분명히 밝힌다.

 

복음서에 81회나 사용된 “인자”(人子, the Son of Man)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일컫는 말이다. ‘온 것은’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옮겨온 삶이니, 예수님께서 지금 자신의 생의 목적, 목표를 밝히려고 하심이 분명하다. 사뭇 비장하다. 실제로 치열하게 비장하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이 죽기 위해서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이루는 방법은 섬김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은 죽음이었다. 사람뿐 아니고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살기 위해 태어난다. 또한, 생존을 위해 필요한 본능이나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다. 생명 가진 모든 것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고 살기 위해 태어났기에 죽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며 오히려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특히 생명의 초기 단계나 한창 왕성한 성장을 구가하는 시기에는 더욱더 그렇다.

 

생의 마지막인 죽음을 잃어버리고 살기는 어찌나 쉬운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오는 성공률 100%인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는데도, 우리는 죽음을 너무 불확실한 것으로 남겨두고 살려고 무던히 노력한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고사하고 상상조차 하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생의 끝을 현재 삶의 중심으로 가져와서 ‘바로 이것을 위해 내가 죽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고 말씀하신다.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드리는 “자기 목숨”이기에 정당성이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말씀 그대로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태복음 1:21)로 오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로마서 5:15).

 

예수님께서 죽기 위해 사는 역설적인 삶의 구체적 방식으로 택한 것은 섬김이었다. 철저한 부정과 긍정이 있어야 제대로 섬길 수 있다.

 

“나는 섬김을 받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섬기기 위해서 왔다”라는 말씀 속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삶의 여행, 그 어떤 지점에서 누구에게도 나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고 도리어 섬김을 베풀기 위해서 왔다”라는 종 된 메시아의 결연함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누구에게 어떤 형태의 섬김도 받지 않겠다는 독선적 결의는 아니다. 선언적으로, 실천적으로 적어도 ‘나는 이렇게 살리라’는 태도로 임해야 철저히 대접받는 삶을 거절하고 철저히 섬기는 종의 삶을 살 수 있다.

 

이제 섬김은 주는 것으로, 자기 목숨을 주는 것으로 발전한다. 섬긴다고 하면서 주지 않고, 주되 자기를 주지 않고 자기의 목숨을 주지 않으면 자기 만족이다. 기만이다. 그렇기에 섬김의 수준은 항상 최고여야 한다.

 

최고의 섬김은 단순한 자기 부인을 넘어 자기 목숨으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드리는 한 사람의 목숨은 얼마나 소중한 값어치를 지녀야 할까? 하나님의 외아들, 독생자의 목숨이라면 가능하고 충분하며 오히려 남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목숨으로 대접하는 섬김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15)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자.

 

그리고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려고 사람을 섬기고 목숨을 주는 사람으로 살자.〠

 

서을식|시드니소명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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