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 3:1-16)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02/28 [14:48]

도종환 시인의 [새의 사랑]이란 시에서 어미새의 사랑을 알 수 있다.

 

나뭇가지 위에 지은 제 둥지에 앉아

처연히 비를 맞고 있는 새를 본 적이 있습니다

새끼들이 비에 젖을세라 두 날개로 꼭 품어안고

저는 쏟아지는 비를 다 맞고 있었습니다

 

둥지에 앉아서 쏟아지는 비를 아무렇지도 않게 맞고 있는 새, 그는 이유 없이 비를 맞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둥지 안에 있는 새끼들이 비에 젖을까 두 날개로 둥지를 품고서 쏟아지는 비를 홀로 맞고 있었던 것이다. 어미새의 사랑도 이렇게 지극할 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일까!

 

밤에 예수께 와서

 

니고데모는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바리새인이었고, 최고의 권력을 지닌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으며, 백성을 가르치는 율법 교사, 또한 많은 재물을 소유한 큰 부자였다.

그는 존경, 권력, 지성, 그리고 부까지 지닌,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 당대 최고의 유대인이었다. 이 정도면 남부러울 게 없고, 걱정도 근심도 없을 것 같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때가 밤이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요 3:2)

 

최고의 유대인이었던 그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밤을 택한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가 ‘밤의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그에 반해 예수님은 빛이시다(요 1:4, 5, 9; 8:12). 밤의 사람이었던 니고데모가 빛이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왜? 니고데모 자신도 밤의 인생, 어둠의 인생이었음을 알았던 것이다. 지위와 존경과 권력과 부를 한 손에 쥐고 있었지만, 그의 속 사람은 캄캄하고 어둡고 공허했다. 그의 영혼은 목마르고 갈급했다. 그래서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거듭난 사람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셨다. 아무리 세상에서 존경받는 바리새인이고 최고의 권력을 쥔 공회원이라고 해도 또 율법에 정통한 선생이요 큰 부를 소유했다고 해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이다.

 

니고데모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불안하고 어둡고 목말라 했던 것은 바로 저 영원한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만 있다면 그렇게 불안하지 않을 텐데, 영생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그 영혼이 목마르지 않을 텐데,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엉뚱한 질문을 한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 ‘거듭난다’는 말은 물론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그러나 니고데모가 이해한 것처럼 육체적으로, 모태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말 ‘거듭’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아노텐’(anoten)의 첫 번째 뜻은 ‘위로부터’다. 그리고 두번째 뜻이 ‘다시’다. 그래서 ‘거듭난다’는 것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위로부터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저 세상,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곧 영생하는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영생의 구원은 오직 ‘위로부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거듭된 말씀에도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소유가 그렇게 많고, 지위와 권력이 그렇게 높아도, 그리고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였으면서도 그는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령도 모르고, 또 하나님의 나라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도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 교회는 오래 다녀서 존경도 받고 직분도 받았는데, 정작 성령을 모른다. 성령의 감동도 받지 못하고, 성령의 임재도 누리지 못한다. 당연히 성령의 권능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다. 그리고 그의 삶이 새로워지지도 않는다.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는 것은 지식 때문도 아니고, 명예 때문도 아니다. 권력도 소유도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할 수 없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날 때에만 새로워진다. 성령으로 거듭날 때 진정으로 다시 태어나고, 성령으로 거듭날 때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를 믿는 자마다

 

니고데모가 성령으로의 거듭남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복음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셨다. 광야에서 놋뱀을 들라고 하신 것이 이스라엘을 살리시기 위함인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야 하는 것도 그를 믿는 자마다 영원히 살리시기 위함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십자가의 복음, 구원의 복음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영원히 사는 것은 우리의 지식이나 권력이나 소유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한다. 그때 영생을 얻게 된다.

 

이처럼 사랑하사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이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꼽으라면 이 한 절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예수님도 니고데모에게 이 한 절을 전하시려고 ‘네가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그것은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인자가 들려야 한다’고 긴 이야기를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도 이 한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니고데모가 그렇게 많은 것을 소유하고 율법에 정통했으면서도 그의 인생이 공허하고 영혼이 메말랐던 것은 이 한절의 말씀, 곧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소유도, 권력도, 지식도 헛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삶은 공허하고 영혼은 메말라 간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르면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울리는 꾕과리일 뿐이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놀라운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시는 사랑이다.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뿐인 아들도 주셨다.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처럼’은 ‘this much 이만큼’이란 뜻이다.

 

어느 무명의 작가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린 성화가 있다. 그 성화에 이런 질문이 있다.

 

“God, how much do you love me?, 하나님 나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밑에 이렇게 답을 했다.

 

“This much, 이만큼”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만큼,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꾸실 만큼, 아니 하나님이 대신 죽으실 만큼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처럼 큰 사랑은 없다. 이처럼 아름답고 이처럼 숭고한 사랑은 없다.

 

연인이 사랑하면 행복하고, 가정이 사랑하면 평안하고, 교회가 사랑하면 부흥한다. 우리의 사랑도 이럴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의 사랑을 안다면 어떻게 될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고 불평할 때에도 모세가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을 모세는 알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온 지중해 세계를 누비며 복음을 전할 때, 외롭고 힘들었지만 그의 달려갈 길을 멈추지 않았던 것도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가 알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승에 따르면, 한밤중에 예수님을 만난 니고데모 역시 성령으로 거듭난 후에 유대 땅에서 예수님을 전하다가, 유대인들 손에 순교를 당했다. 니고데모 역시 하나님이 자기를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믿었고,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며 기꺼이 순교를 맞이할 수 있었다.

 

우리도 이 사랑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경험해야 한다. 그러면 희망이 생기고, 생기가 넘치고, 하나님의 나라도 볼 수 있고, 죽기까지 헌신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으로 충만하게 된다.

 

샬롬! 〠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