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한 걸음 디딜 때마다 ‘그 분들’의 향기(4)

두 번째 길을 떠나다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10/07/26 [14:52]

통영 답사에는 이인식 장로가 동행해 주었다. 기독교 IPTV 경남 창립준비 위원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였지만 흔쾌히 우리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문학박사인 그에게서는 권위주의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소박한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다. 어쨌든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 아름다운 충무항이 내려다 보이는 호주 선교사들이 거주했던 선교사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30년 동안 밭터로 사용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통영시에 처음 교회가 세워진 것은 1905년 호주 선교사 손안로 목사(A. Adamson)가 권희순 씨 사저에서 송사원 조사와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다. 첫 예배를 드린 교회는 대화정교회로 지금의 충무교회다.

그러나 1895년 조선조 정삼품 통정대부 김치몽이 고향인 통영에 낙향해 개화에 앞장서면서 사저에 기도처를 세워 이미 복음이 이곳에 전파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무교회를 시작으로 호주선교부는 1912년 통영선교부를 설치하고 진명학교를 세웠으며 1914년에는 의료선교사 테일러가 이곳에 진료소를 설립해 의료선교 활동을 펼쳤다.

▲ 충무교회는 권희순 씨 사저(왼쪽)에서 시작됐다. 오른쪽 종탑이 현재의 충무교회이다.     ©크리스찬리뷰

또 1923년 신애미 선교사가 통영진명유치원을 설립해 유아교육에 힘썼고 진명야학교와 도천야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노력했다. 여기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는데 세계가 알아주는 음악가 윤이상, 시인 청마 유치환, 극작가 유치진, 토지작가 박경리, 시인 김춘수, 김상옥, 제2대 윤보선대통령의 부인 공귀덕  등이 진명학교 출신이다..

기독교의 이같은  노력으로 통영지역은 비교적 빨리 개화됐으나 통영시는 수산업도시여서 무속신앙이 강한 탓에 복음화율은 낮아 현재 인구 13만여 명 가운데 7%인 1만여 명만이 하나님을 영접했다.

 
재도약의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충무교회

2000년 3월 충무교회를 찾았을 때는 담임목사가 없었다. 1997년 7월 이후로 약 4년 동안 정식 담임목사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교회는 내분으로 침체되어 있었고, 곧 갈라질 거라는 말들이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왔었다. 

▲ 충무교회는 최근 ‘충무교회 100년사’를 발간하는 한편 ‘100주년 기념탑’을 세웠다. 충무교회 당회원들이 본지 취재팀을 맞아 인터뷰를 가졌다.     ©크리스찬리뷰

어떻게 되었을까?

10년 만에 만난 이양조 장로(72)는 “안경만 목사님이 2000년 부임하신 후 안정을 되찾는 듯했으나 결국 100여 명의 교인이 나가 열방교회를 개척했다”면서 “안 목사님은 6년 뒤 사임하셨다. 제대로 모시지 못해 부끄럽다”고 말했다.

안경만 목사의 사임 이후 담임목사가 공석인 가운데 초대교회 담임목사인 김영훈 목사가 5개월 동안 임시당회장으로 교회를 섬기게 된다. 후임목사의 선임문제로 한동안 어려움을 겪던 충무교회는 2006년 12월31일 공동의회에서 임교호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기로 결정하였다. 2007년 첫 주에 부임한 임교호 목사는 4월 16일 위임식을 거행하고 말씀과 기도를 통한 교회 부흥운동에 주력하여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와 40일 특별새벽기도회를 개최한다.


▲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로 거듭난 충무교회 전경     ©크리스찬리뷰

또한 몇 년 동안 중단되었던 금요기도회를 다시 시작하여 성도들이 기도와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는 가운데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이화전 장로(65)는 "임교호 목사님 부임 후 이제는 교회가 안정을 찾아가고 회복되어가고 있다"고 말하고 "교회의 기틀을 바로 세우기 위해 정관도 제정하고 재도약의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고 설명했다.

임교호 목사는 "105년 동안 아담슨 선교사를 비롯해서 20여 명의 호주 선교사들의 뜨거운 눈물과 땀방울이 있었고 선배 성도들의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애끓는 기도가 있었다. 전국 교회에 싸우는 교회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105년 동안에  30명의 교역자가 바뀌고 네 번의 교회분열이라는 아픔도 있었다."고 말하고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역사였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고 담담한 심정을 밝혔다.

충무교회는 최근 '충무교회 100년사'를 발간하는 한편, 100주년 기념탑을 세웠다.

 
▲ 충무교회 30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임교호 목사     ©크리스찬리뷰

"교회설립 100년의 뜻을 되새기자는 의미도 있지만 잦은 교회내분의 아픔을 딛고 통영지역 모교회로서 지역의 복음화와 역할을 감당할 것을 다짐하는 의미에서 100주년 기념비를 교회 앞마당에 세웠습니다."

기념비에는 충무교회 약사와 역대 선교사, 교회배출인물, 역대교역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충무교회 '100년사 편찬 위원장' 구문근 장로(72)는 "100년사를 집필하기 위해 호주 선교사님들이 활동했던 지역을 답사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말했다.

 
▲ ‘충무교회 설립 및 호주 선교 100주년 기념탑’에 새겨진 역대 호주 선교사들. 손안로 목사 부부, 모이리사백, 왕대선 목사 부부, 안진주, 위대연 부부, 신애미, 허대시, 맥계익, 거이득, 추마전 목사 부부, 전은혜, 방란서, 매견시 목사 부부, 이혜애, 엽덕애, 나예인 목사 부부, 왕영예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덕산에도 갔고 창신대학에도 가봤어요. 처음으로 선교사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죠. 내팽개쳐진 묘지, 무관심,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면서 눈물이 납디다."

구 장로는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울먹였다.

한편 충무교회는 장기목회 계획으로  '비전 2030운동'을 펼치며 지역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주도하는 교회로 탈바꿈을 하고 있다. '비전 2030운동'은 2030년까지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 이룰 교회의 부흥과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20대의 젊은이가 전교인의 30%가 되게 하는 젊은 교회운동,  단독 선교사 3명을 파송하거나 3개의 개척교회를 세우고 협력선교사 30명을 후원하는 선교운동, 30개의 소그룹을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성하는 제자화 운동, 예배를 3부로 1000명의 헌신된 성도들을 세우는 부흥운동이다.

"2008년 1월, 14명의 성도들과 함께 필리핀을 방문하여 100주년 기념교회로 세운 깔라오 장로교회 교회당을 건축하여 헌당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현재 6개 교회를 신축하기로 하고 후원을 하고 있고요. 또 이번에 태국에 치앙마이 교회를 개척하면서 교회당을 건축했는데 그런데 그 교회당 부지가 호주 선교부에서 지원한 땅이더라고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으로 다시 호주 선교부와 연결해 주시는구나하는 생각을 했지요."

 
▲ 교회당 입구에 세워진 ‘충무교회 설립 및 호주 선교 100주년 기념탑’     ©크리스찬리뷰

또한 충무교회는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외지학생들을 위한 학사관을 운영하고 있다. 경로대학을 개설하여 매주 80여 명의 지역 어르신들을 섬기고 있으며 주차장을 확충하여 지역사회에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학사관은 외지에서 온 학생들이 거할 수 있는 숙소입니다. 그리고 매학기 장학금으로 1억 6천만 원을 지급하고 이 지역에 있는 어려운 분들을 위하여 쌀 나누기 운동도 펼치고 있고요, 섬 지역 목사님들을 초청해서 위로하고 우리와 함께 연합해서 할 수 있는 사역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임 목사는 "체계적인 양육 훈련과 변화를 갈구하는 성도들의 열정을 토대로 통영지역 모교회로서 지역복음화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겠다"라고 말하고 "호주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이기 때문에 앞으로 호주 선교부와도 긴밀히 협력하여 세계선교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 100년사 편찬위원장 구문근 장로     ©크리스찬리뷰

아직도 폐허로 남아있는 선교사들의 집터 

우리 일행은 옛 진명학교와 선교사들이 거주했던 집터로 향했다.

호주선교사들은 통영에 선교부 건물을 지으면서 1914년 1월 15일 학생 18명으로 진명학원을 세웠다. 그 당시 진명학교는 통영에서 여성교육을 위하여 설립된 근대학교였다. 학교 내에 산업반을 개설하여 장애여성, 매춘여성, 이혼 당한 여성, 그리고 남편에게 쫓겨난 여성들을 위한 직업교육을 실시하며, 보호받지 못한 여성들을 위해 값진 봉사를 했다. 이곳에서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자수, 영농기술을 가르치면서 이들의 생활 대책을 마련해 주었다.

▲ 10년 전에도 본지 취재팀을 안내했던 향토문화 연구가 김성환 집사(왼쪽)가 본지 김명동 편집인에게 호주 선교사 집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특히 이들이 자수로 만든 손수건, 책상보, 앞치마 등을 호주 멜본으로 보내면 멜본의 콜린스가(Collins Street) 269번지에 위치한 장로교 본부 건물 내의 여전도회 연합회 사무실과 티 룸에서 이를 판매하였고 그 대금을 통영으로 보내어 여성들의 생활을 후원했다.

진명학교는 왕대선 부인에 의해 시작이 되었고 1920년부터는 신애미(Miss A.M Skinner)선교사, 1926년부터는 Francis (방선생)선교사, 1929년부터는 Kerr(한국명. 거이득)선교사에 의해 운영되었다.

▲ 허물리기 직전 폐허가 된 선교사관(맨위)과 아래는 고추밭과 쓰레기 더미로 변한 선교사관과 진명학교 터.     ©크리스찬리뷰

10년 전 우리를 안내했던 향토문화 연구가 김성완 집사에게 전화했더니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 후에 제가 토지대장을 확인했더니 선교사 건물이 한 동이 아니라 세 동이 있었더라고요."

그는 흥분한 탓인지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았다.

"선교사 센터를 지어 놓고 준공을 하면서 사진을 찍었을 텐데 아무리 찾아도 그 사진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 옆에 통영초등학교가 있는데 100년이 됐습니다. 통영초등학교 사진을 찍으면서 양관건물 사진이 같이 잡힌 겁니다. 그러니까 1910년 초반 사진인데 선교부 건물이 한 동이 아니고요, 세 동입니다. 진명학원만 하더라도 산업반 야간반이 따로 있었거든요."

▲ 1920년대 후반에 호주 선교부가 판 우물, 현재는 사용하지 않으나 30년 전만해도 경남에서 가장 깊었던 우물이다.     ©크리스찬리뷰

우리는 삼복도로 SK주유소 건너편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으로 올라갔다. 바다를 한 눈에 굽어 볼 수 있는 한가로운 언덕이었고 대나무 숲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백여 년 동안 복음을 이어 주었던 호주선교사 집터는 여전히 잡초에 묻혀있었다. 잡초가 어떻게나 드세고 검푸르고 무성했던지 생명력이 폭발할 것만 같이 느껴졌다. 집을 떠받치고 있던 돌들도 여전히 이곳저곳에 나뒹굴어져 있었고  선교사들이 밟고 다녔던 계단도 잡초 속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여기 보세요. 이곳이 바로 진명학원 운동장입니다. 제가 7살 때 놀던 자리입니다.  여기가 골목이었고요, 여기 진입로가 남아 있잖아요, 보이지요?"

바라만 보아도 콧등이 시큰하면서 가슴이 떨리는 것이었다.

"아니, 소유자가 누구이기에 지금껏 빈터로 남아 있습니까?"

"개인 소유로 되어있는데 주인은 따로 있고 농사짓는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그렇게 30년이 됐어요. 지난번에 오셨을 때는 요 집터만 봤는데  저기, 뺑 둘러 다 선교사집터였어요.  그 뒤로 제가 추적을 했거든요.

▲ 삼복도로 옆 골목길은 “100여 년전 호주 선교사들이 선교사관으로 가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고 김성완 집사가 설명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이 우물을 보세요. 깊이가 20m나 됩니다. 선교부가 1920년 후반에 2층 건물을 짓고 산업반을 운영했잖습니까? 미싱을 가르치고 수도 놓고요. 닭도 키웠대요. 그런데 물이 없는기라, 그 때 판 우물인데 그대로 있습니다."

그때 고추밭에서 일하면서 우리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한 아주머니가 답답했던지 불쑥 한 마디를 던졌다.

"저 선생님 잘 아시네. 저 선생님 말씀대로 우리 시어머니가 저 우물을 길어다 마셨어예. 30년 전에는 요 우물이 둘레가 8m, 깊이가 20m로 경남에선 최고로 깊었다 하지 않습니까?"

"저, 혹시 이 땅 주인이십니까?"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이곳에서 밭농사를 하고 있고요, 시어머니가 이 말씀은 하셨어예. 이 집터는 원래 교회재산이었대요. 그런데 교파가 갈라지면서 교회끼리 재산권 문제로 창신학교와 충무교회가 재판이 붙었는데 그 재판이 10년이나 끌었대요. 결국은 대법원까지 올라가서 충무교회가 이겼다 안합니까?"

그런데 기가 막힌 사실은 10년이란 법정 투쟁 끝에 충무교회가 승소했지만 결국 학교와 집터를 팔아 재판비용으로 다 써버렸다는 것이다.

창신학교 교장으로 은퇴한 이인식 장로가 그 이야기를 듣더니 무릎을 탁 쳤다.

"그래그래, 맞아, 그건 나도 알아요. 판결문 사본이 있어요."

그렇다면 이 사건을 충무교회 100년사는 기록하고 있을까?

▲ 간창골은 충무의 ‘역사 문화 기행’ 코스이다.     ©크리스찬리뷰

없었다. 어느 곳을 찾아 봐도 이 사건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는다. 이래도 염치가 있다 할 것인가? 몹시 속상했다.

우리는 역사의 호흡이 짧다. 그러나 부끄러운 우리의 교회사이지만 이제부터라도 역사를 토막 내지 말자. 아직도 선교사 집터는 빈터로 복원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어두운 시절 우리에게 꿈을 주었던 선교사관을 재건할 누구 뜨거운 손은 없는가? 높고 넓은 교회당도 많이 서건만 이 빈터에 기념관을 꾸며줄 어느 널따란 가슴은 없는가?

우리는 삼복도로 옆 골목길을 돌아 서문 터를 향해 걸었다. 수십 년 전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골목이다. 동네 이름이 간창골이다. 관청이 있던 고을을 이르는 관청골에서 변한 말이다. 이 길을 수없이 오가며 복음사역을 펼쳤을 선교사들의 모습을 그리며 잠시 묵상에 잠겼다.

 “이곳에서 회개하는 영혼이 흘리는 눈물은 훗날에 많은 영혼들에게 성화를 가져올 것이다.”〠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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