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인천 상륙작전에 참전한 크로포드 제독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입력 : 2023/12/22 [14:15]

▲ 호주를 국빈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캔버라 한국전 참전비’ 기공식에 참석, 위원장인 이안 크로포드 전 헤군 제독(왼쪽)으로부터 건축 계획에 대한설명을 듣고 있다. 김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옆에 존 하워드 총리(오른쪽)가 함께 했다.(1999. 9) ©크리스찬리뷰     

 

호주의 수도는 캔버라이다. 이곳에 전쟁기념관이 있다. 기념비는 오스트레일리아와 한국 간의 군사적 협력과 형제 동맹을 상징하며, 한국전에서 희생한 군인들에 대한 뜻깊은 경의를 표현하고 있다. 기념비는 두 나라 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강화하고 현존하는 자유와 안전을 지키기 위한 공헌에 대한 감사의 정신을 계속해서 전해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전 참전기념비 

 

한국전 참전기념비는 1999년 9월 17일 김대중 대통령과 하워드 총리가 함께 기공식을 했다. 기념비 건립 추진위원장은 이언 크로포드(Ian Crawford) 해군 제독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이다. 1993년 7월 이안 크로포드 예비역 제독의 주창으로 건립준비를 시작한 이래 모금과 기념주화 발행 등을 통해 재원을 조달하였다. 호주 및 한국 정부가 각각 20만 달러씩 지원하면서 결실을 보게 됐다. 

  

드디어 2000년 4월 18일 준공식이 캔버라 전쟁기념관 앞 안작 공원에서 오전 9시 윌리엄 페트릭 호주 총독과 존 하워드 총리, 김종성 국가보훈처 차장, 백선엽 6.25 50주년 기념사업단장, 조영길 합참의장, 6.25참전용사 등 5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크로포드 위원장은 "역사적인 참전기념비가 준공돼 감개가 무량하다”, "기념비는 후손들에게 호주군의 용감성과 사명감을 일깨워주고 자유가 위협받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알려줄 수 있는 상징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매년 전쟁기념관에 모여 전몰 영웅 추모식을 거행하는 등 기념비를 살아있는 호주 역사의 일부분으로 활용, 각국 방문객들이 평화의 소중함을 배우고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크로포드 제독은 한국전 참전기념비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에 관여한 사람이다. 그는 호주 해군으로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50년 후인 2000년에 한국전참전기념비를 수도 캔버라에 세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다. 

 

▲ 이안 크로포드 (Rear Admiral, Ian Crawford) ©크리스찬리뷰     

 

이안 크로포드 (Rear Admiral, Ian Crawford) 

  

그는 1931년에 시드니의 모스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군인가족이다. 아버지는 영국군 장교로 호주를 방문했다가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했다. 동생도 호주 육군 대령으로 예편을 했다. 그가 해군사관학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는 1949년에 왕립해군사관학교(RAN)에 입교해서 영국에서 교육을 받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 당시 영국 경순양함 HMS Ceylon에서 18세의 ‘미드십맨’으로 복무했다. 이 배의 첫 번째 임무는 영국군을 홍콩에서 부산으로 수송하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에서 ‘실론’의 복무 기간 동안 주요 임무는 해안 작전을 위한 해군 포격 지원을 제공하고 상륙작전 및 대피를 위한 엄호물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Ceylon호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크로포드 제독은 한국 전쟁에서 9개월 동안 복무한 후 1951년 3월 말 영국으로 돌아와 HMS Ceres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는 1951년 5월 소위로 진급한 후 그리니치 왕립 해군 대학에서 일반 교육 과정과 하급 장교 전쟁 과정을 이수했다. 

  

그는 1956년 호주로 돌아와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다양한 직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꾸준하게 승진하였다. 1984년 11월 27일, 크로포드는 해군 소장으로 승진하고 국방부 보급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크로포드 제독은 1989년 전역했으며 시드니로 이주하기 전에 캔버라에 거주했다. 그는 경력 전반에 걸쳐 공급 및 작전을 결합한 최초의 RAN 공급 장교 중 한 명이었고, RAN에 도입되는 미 해군 군수 시스템 및 교육에 힘썼다. 

  

▲ 국전 참전용사 보은 행사 기사가 실린 크리스찬리뷰 12월 호를 크로포드 제독에게 김환기 사관이 설명하고 있다.©크리스찬리뷰     

 

은퇴 후 크로포드 제독은 1989년부터 96년까지 ‘고속철도 사업’(Very Fast Train Progress Group)의 전무이사였고, 호주 전쟁 기념위원회의 회원이기도 했다. 그는 수년 동안 호주 재향군인회와 국방위원회의 대표회장을 역임했다. 

  

이안 크로포드와 인터뷰 

  

2023년 10월 17일 개천절 경축 리셉션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약 200여 명이 참석하여 축하를 했다. 이날 이안 크로포드 제독도 참석했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교제를 나누는 중에 누군가 불렀다. 구세군 군복을 입고 있는 나를 발견한 크로포드 제독이었다.

  

▲ 전 해군 예비역 소장 이안 크로포드 제독은 호주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해군에 파견되어 실습중 한국전에 참전했다. 사진은 해군 사관학교 생도시절(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전역 후, 2005년 본지와 인터뷰, 최근 본지와 인터뷰 당시의 사진.©크리스찬리뷰     

 

▲ 시드니제일교회에서 열린 6.25 54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한 이안 크로포드 부부(오른쪽)와 김창수 시드니 총영사 부부 (2004. 6) ©크리스찬리뷰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당당해 보였다. 자신을 소개하며, 한국전쟁 때 구세군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두 번째 그를 만난 것은 4달 후 2023년 11월 14일, 스트라스필드에서 열렸던 ‘한국전쟁 참전용사 보은 행사’에서였다. 

  

한국전쟁에는 16개국이 전투병을 파견했고, 6개국이 의료를 지원해 주었다. 

  

한국전쟁참전국 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한 호주, 한국 전쟁 UN 참전용사 보은행사가 열렸다. 그는 직접 운전하여 부인인 캐서린(Catherine)과 함께 참석했고, 참전용사를 대표해서 메시지도 전했다. 

  

세 번째 만남은 2023년 11월의 마지막 날 그가 살고 있는 패딩턴(Paddington)의 자택을 방문했다. 크로포드 제독은 부인과 함께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녀는 간호사로 호주에서 근무를 하다가 좀더 큰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 캐나다에 가서 공부를 하던 중에 우연히 워싱턴에 있는 캐나다 대사관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하여 채용되었다.  

  

그녀는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중 파견근무 나온 크로포드 제독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큰 아들은 미국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3대가 호주국립(ANU) 출신이라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딸과 손자도 호주국립대를 졸업했다. 졸업장은 그녀의 컴퓨터 뒤에 진열되어 있었다. 

  

크로포드는 1950년 8월에 부산에 도착했고, 9월에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였다. 성공적인 상륙 작전이어서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길어졌다. 

  

육군은 북진했지만, 해군은 인천 근처에 정박하고 있었다. 크로포드 제독의 배는 인천 가까운 섬에 정박했다. 그는 일생에 가장 추웠던 겨울로 기억하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고 섬에 버려진 20여 명의 아이를 발견하고 그들을 돌보아 주기도 했다. 중공군은 인천을 재탈환하고 연합군은 철수하게 되었다. 얼마 후 미국의 구축함을 앞세워 인천을 다시 탈환할 수 있었다. 

  

그 후 실론(Ceylon) 호는 배를 정비하기 위하여 싱가포르로 돌아갔다. 그는 싱가포르에서 영국으로 돌아가 남은 교육을 마치고 호주로 돌아왔다. 

  

다음은 크로포드 제독과 일문일답이다.

 

- 고향이 어디입니까?

  

“시드니 모스만(Mosman)입니다. 고등학교는 노스 시드니 고등학교(North Sydney High School)를 졸업하고, 호주 해군사관학교에 입교했습니다. 입교 6개월 후 영국에서 교육을 받는 도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사관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상태에서 참전하게 되었죠. 우리는 미군의 구원 요청을 받고 홍콩에 있던 우리 배는 1950년 8월에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배를 정비하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 당시의 전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해군은 함포 사격으로 해병대와 육군이 상륙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이제 전쟁이 끝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미궁으로 빠졌습니다. 유엔군은 철수해야만 했습니다. 연합군 함대가 있던 인천도 적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 그 후로 어떻게 되었나요?

  

“연합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북진하여 삼팔선 근방에서 공방전이 벌어졌습니다. 해군도 미국함대를 중심으로 다시 인천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배는 인천 가까운 섬에 정박했습니다. 그해 겨울은 너무 추웠습니다. 내 일생에 그렇게 외롭고 추운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 한국전쟁 참전용사 초청 보은행사에서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이안 크로포드 제독.©크리스찬리뷰  

 

▲ 패딩턴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중인 이안 크로포드 제독.©크리스찬리뷰     

 

크로포드 제독은 한국 전쟁에서 9개월 동안 복무한 후 1951년 3월 말 영국으로 돌아와 HMS Ceres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는 1951년 5월 소위로 임관하고, 그리니치 왕립 해군 대학에 다니며 일반 교육 과정과 하급 장교 전쟁 과정을 이수했다. 

  

▲ 자택 현관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안 크로포드 제독과 부인 캐서린 여사 ©크리스찬리뷰     

 

그는 호주로 돌아와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며 호주 해군의 위상을 높였다. 그는 미국 워싱턴에서 캐나다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캐시를 만났다.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어 결혼하고, 큰 아들을 미국에서 낳았다. 그리고 호주로 돌아와 딸을 낳았다. 

  

그는 호주 왕립 해군에서 40년 동안 복무했으며 최종적으로 해군 제독(Rear Admiral)으로 1989년에 전역했다. 전역 후 그는 한국전쟁의 봉사와 희생을 기리기 위해 캔버라에 호주국립한국전쟁기념관 건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가족입니다. 나는 1남 1녀를 두었고, 각 가정에 손자가 둘씩 있습니다. 우리 가족은 서로를 존경하며 화목하게 살고 있습니다. 딸은 영국에 살고 있습니다. 손자는 할아버지가 한국전 참전용사라는 것을 알고 나를 자신의 ‘Hero’라고 자랑합니다. 딸도 한국에서 유학생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한국은 참전용사를 잊지 않고 매년 6월 25일을 즈음하여 참전용사들을 위한 특별한 모임을 갖습니다. 코로나 기간에는 주 시드니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 마스크를 보내 주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영국에 사는 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 마스크를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한국은 참전용사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써주는 좋은 나라입니다. 

  

쉬운 일이 아닌데 정말 감사합니다. 한국의 발전을 바라보면 우리의 희생이 절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에게는 두 가지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도 유해를 찾지 못한 전쟁 유가족이 있습니다. 유해를 발굴하고 DNA를 추적하여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호주에 살고 있는 다민족들의 화합을 위한 노력입니다. 호주는 서양 중심의 서구화(Westernization)가 아니라, 서로를 수용하는 문명화(Civilization)가 되어야 합니다.”〠

 

김환기|본지 영문 편집장

권순형|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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