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전해 주는 작은 손길이 되고파

인물포커스|호주구세군 여성사관 임관한 안원자 사관

글|김명동,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12/27 [12:22]
지난해 11월 28일 호주구세군 여성사관으로 임관한 안원자(56.시드니한인구세군교회 부담임사관)사관은 소감을 묻자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더욱 옷깃을 여미는 것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시드니에 온 지 25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내 마지막 인생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위해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 왔는데 이번에 뜻밖에 정식사관으로 임명됐습니다. 앞으로 이 소명을 어떻게 감당해 나갈까 거룩한 부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 호주 구세군 사관으로 임관한 안원자 사관     ©크리스찬리뷰

1984년 구세군 사관학교 졸업, 의정부영문(교회) 개척

안 사관은 1984년 한국에서 구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사관으로 임관했지만 개인 사정으로 사직하고 평신도로 교회를 섬기다가 이번에 새롭게 구세군 사관으로 부름을 받아 재 임관을 하게 된 것. 이는 흔치않은 일로 호주 구세군 본부는 그동안 25년을 한결같이 평신도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해 온 그를 위해 특별예우를 해줬다. 안 사관은 “이런 특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며 “무슨 일을 하던지 잘 감당해내고 뒤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배우는 자세로 일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믿음생활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목회자 사모를 선망하기도 했던 그는 교회 부흥회에 참석해 자신의 전 생애를 주님 앞에 드리기로 결심하게 된다.

“감리교 교회였는데 구세군 사관님이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셨어요. 그땐 구세군이 생소했어요. 하나의 단체인줄만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았어요. 사관님을 만나 면담하는 중에 구세군에서 일하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지요.”

그 후 가르치는 은사가 있었던 그는 1982년 구세군 사관학교에 입학해 2년 과정을 마치고 사관(목사)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졸업 후 그가 선택한 것은 교회개척이었다.

“의정부에서 구세군 영문(교회)을 개척했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 개척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교회건물을 지을 부지도 마련을 했지요. 그런데 시드니에 살고 있던 사촌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형제들이 보고 싶다, 너무 좋은 나라니까 와서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세요. 그런 후 초청장을 보내주셨어요. 이 문제를 위해 고민하며 기도 하는 중에 시드니에 가서 구세군 한인교회를 개척할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알아보니까 당시 구세군 한인교회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결정을 하게 됐습니다.”

 
▲ 츄롤라 쇼핑센타에서 자선냄비 모금 활동을 하고 있는 안원자 사관(왼쪽)     ©크리스찬리뷰


모든 것 내려놓으니 상처받은 사람들 보여

안 사관은 1986년 12월 시드니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계산’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와서 보니까 막막했어요. 개인적인 일로 왔기 때문에 사역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호주 구세군교회에서 평신도로 교회를 섬기게 된 겁니다.”

안 사관은 그동안 한계와 어려움이 많았다고 토로했다. 먼저 급한 것은 생계문제였다. 일가친척이 도움을 주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맨 처음 그에게 주어진 일은 청소.

“쇼핑센터에서 청소를 시작했어요. 계단이며 화장실 청소며 눈물이 났어요. 그 후 홈 청소도 하고요, 미싱공장도 다녔어요.”

시드니에서의 삶은 끝없는 청소의 연속이었고 가혹한 노역으로 이어졌다.

그는 허드렛일을 하며 거친 세상을 몸으로 부딪쳐 나갔다. 그러나 생활의 톱니바퀴에 기구한 삶이 마모되어가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매일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다.

“이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씨름해왔어요. 그런데 보니까 신앙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너무 힘들어 하는 분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상처받은 분들이 너무나 많은 겁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다가갔어요. 그곳이 제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됐죠. 위로하고 희망을 전해주고 싶었거든요. 서로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어요. 그 과정을 통해 치유목회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의 모든 삶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게 됐다는 안 사관은 ‘희망’에 대해서 얘기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가져야 하는 건 희망이고,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인간에겐 누구나 과거의 환경과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와 아픔이 있습니다. 상실로 인한 고통을 겪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제 자신도 어려움을 겪고 나니 성도들이 당하는 아픔을 뼛속까지 공감할 수 있게 됐어요.”

안 사관은 “예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에 항상 마음이 무겁고 힘든 생활을 해왔다”고 토로했다.

“눈물로 하나님께 매달리고 매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신 것 같아요. 인생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거죠.”

그는 이번 정식사관으로 재임관한 것에 대해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건으로 믿고 있다. 실제로 나이 오십 중반에 더구나 한국에서 구세군사관학교를 나온 그를 호주구세군 본부에서 사관으로 재임관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고 한다. 그러니 인간의 앞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는 그 그물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요 택함 받은 자의 막중한 은혜이다.

 
▲ 임관과 동시에 구세군한인교회 부담임사관으로 임명 받은 안원자 사관은 금년부터 심방 및 상담사역을 전담하게 된다.     ©크리스찬리뷰

제2의 인생, 치유사역 앞장

구세군은 1865년 영국에서 윌리엄 부스가 창시한 개신교의 한 종파다. ‘하나님의 군대’와 같이 일원화된 조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사회 구제 사업으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라고 이름을 붙였다. 모든 구세군 세례교인은 교리상 ‘병사’다. ‘부교’는 타 기독교 종파의 집사에 해당한다. ‘특무’는 전도사, ‘정교’는 장로, ‘사관’은 목사에 해당한다.

구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면 사관으로 임관되면서 ‘정위’라는 계급을 달고, 15년 이상 사역했을 때에는 ‘참령’으로 승격된다. 그 위로는 부정령, 정령, 부장, 대장 순으로 계급이 높아지는데 대장은 세계에서 단 한 명뿐이다.

안 사관은 이제 오랜 경험을 토대로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가 매번 반복하는 말은 희망이다.

“나의 교만은 사라지고 내가 버려야 했던 모든 것에 아무런 미련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며 성실히 살아갈 것입니다.”

안원자 사관은 외모나 말씨 모든 것이 차분하고 단정한 사람이었다. 오랜 말씀 읽기와 묵상이 준 또 다른 결과로 이해됐다. 그는 신앙의 재충전을 위해 신학교에 다니고 있다.

“상담을 하면서 저 스스로도 더 유연해지고 남의 얘기를 들어주는 인내심도 늘었어요. 상담하는 분들이 지긋한 나이가 신뢰 간다, 안정감을 준다면서 아무 얘기나 다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하네요.”

안 사관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새로운 인생이 더없이 행복하다”는 의미있는 말 한마디를 던지고 자선냄비모금봉사를 위해 총총히 교회문을 나섰다.〠

 

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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