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남은 사회주의 땅이 저긴가!

김명동/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9/26 [15:04]
‘출입금지구역’ 판문점을 가다

 
판문점에 간다니까 서울에서 어떤 친구가 말했다.

“죽구싶어? 이 팽팽한 시기에 거긴 뭣 하러 가?”

나는 씩 웃었다.

“북녘땅이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어”

▲ 우리 측 자유의 집에서 바라본 회담장과 북측 판문각 모습. 멀리 북한군과 관광객이 보인다.     ©김명동


JSA(Joint Security Area 공동경비구역)는 개별 방문이 엄격하게 통제돼 외국인 단체관광객에게만 문을 열어준다. 한국인은 공식적으로 국정원장이 신원을 보증해야 하는 것으로 돼 있으며, 신원조회에 이상이 없어야 군사분계선 JSA에 들어갈 수 있다.

2011년 7월 22일 금요일. 이른 아침 버스는 JSA를 향해 출발했다. 파주에서 1시간가량 달리면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이 소떼를 트럭에 싣고 북한으로 올라갔던 길 ‘자유로’가 나온다. 임진강은 철조망에 갇힌 채 자유로를 따라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강으로 들어갈 수 없다. 임진각을 지나 통일대교에 도착했다. 통일대교를 건너기 위해서는 군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다. 여기부터 서부전선 민통선 지역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한·미 양국군 헌병이 함께 검문을 했지만 지금은 한국군이 전담하고 있다.

JSA경비대대의 한 장교가 ‘평화의 문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군 관계자의 인솔을 받는다고 해서 출입 절차가 간소해지지는 않았다. 세세한 신상정보와 신분증 확인 절차가 이어졌다. 평화의 문에서 채 5분도 달리지 않아 JSA경비대대가 나타났다. 이제 곧 남방한계선을 넘으면 비무장지대다. 여기서 조금 더 북진하면 JSA, 곧 판문점이 나온다. JSA가 이곳의 군사 외교적 명칭이라면 판문점은 이 지역의 지명이다. 판문점의 원래 이름은 널문리. 군사분계선 상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런데 이곳을 드나들던 중공군이 한자로 가록하면서 판문점으로 불리게 됐다.

“이동하면서 북한쪽을 향해 손짓을 하거나 제 허락 없이는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까?”

“네”

군 관계자로부터 JSA의 역사와 임무, 주의사항 등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판문점으로 들어가는 전용버스에 올라탔다. 남방한계선을 넘어 5분 여를 달리자 왼쪽으로 남측 대성동 마을 입구와 대형 태극기가 보였고 조금 더 멀리 11시 방향으로 160m 높이의 게양대에 걸린 대형 인공기가 눈에 들어왔다. 말로만 듣던 북한 가정동 선전마을이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겨루듯 솟구친 깃발. ‘소리 없는 아우성’에 가슴이 미어진다.

▲ 북측 군인(오른쪽)과 남측 군인이 마주 보고 경계를 서고있다.     ©김명동


남방한계선을 넘은 지 10분이 채 안돼 드디어 판문점 JSA에 도착했다. 남측지역 ‘자유의 집’을 통과해 밖으로 나가자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남쪽 자유의 집과 북쪽 판문각 사이로 군사정전위원회의 회담장 등으로 쓰이는 하늘색 건물 세 동이 남북으로 걸쳐서 나란히 배치돼 있고 그 양옆으로 은색 건물이 한 동씩 들어서 있었다.

이 건물들 가운데로는 콘크리트 경계선이 남과 북을 가르고 있었다. 경계선 남쪽에는 우리 JSA경비대대 장병들이 경계를 서고 있고 북쪽에는 북한군 장병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남측 군인은 헌병이라고 쓴 검은색 철모를 눌러쓰고 그 아래 검은색 선글라스를 썼다. 이 선글라스는 북한군과의 불필요한 시선 교환이나 접촉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JSA는 엄연한 비무장지대 안이지만 여기서만큼은 남북이 모두 무기를 소지한 채 근무한다. 그래서 이곳은 항상 터질듯한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북측은 적갈색 인민군 정복에 차양이 넓은 모자를 썼다. 북측은 평상시에는 판문각 왼쪽 기둥 뒤에서 근무를 서다 방문단이 찾아올 때만 여러 명이 회의장까지 내려와 근무를 선다. 이곳에 근무하는 북한 병사는 모두 군관급 이상의 장교다. 여러 명의 전문 심리전요원도 배치돼 있다. 사방에 감시 카메라가 깔렸다. 이 정도면 사각지대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회담장으로 사용되는 하늘색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이동조립식 건물이다. 몇 명의 헌병들이 꼼짝도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칫 실수로 문을 열고 한 발짝이라도 나가면 북한땅이기 때문이다. 가운데에 유엔 깃발이 놓여 진 큰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다. 테이블 중앙을 가르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유일하게 북측 땅을 밟아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드디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땅을 밟았다.

 
이 사람들아, 아무 소리 말고 손을 내밀어

이데올로기전쟁에서 모든 나라가 다 격변했는데 마지막까지 혼자 남아 사회주의를 고집하는 북녘땅이 여기인가. 저기 우리 형제자매들이 새빨개져 가지고 우리 남쪽사람들까지 적화하여 기필코 통일을 이루겠다는 고집이 깔려 있는가.

몇 년 전부터 수해가 심하여 먹을 것이 없어 고생들을 한다는데, 저기 밭에 나와서 논에 나와서 농작물이 잘 되었나 살피고 다니는 농부모습은 없는가. 왜? 어째서? 북쪽 땅을 밟으며 나는 뭉클 솟아오르는 하나의 노여움을 달랠 길이 없었다.

무엇들을 하고 있는가. 연평도에 폭격을 하고 서해에 잠수함을 보내어 군함을 격침하여 사람 죽이고, 수천만 사람을 불안에 떨게 하여 무엇을 얻고자 한 것인가. 일본식 ‘가미가제 특공대’의 정신을 세계에 과시해보자는 것인가.〠 <계속>

 

글·사진= 김명동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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