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신측 96회 총회 ‘관상기도 운동’ 연구보고서

이승구ㅣ교회와신앙 | 입력 : 2011/11/02 [07:13]

2011년 장로교단 9월 총회, 이단사이비 관련 최대 관심사 중의 하나는 관상기도였다. 예장 합동측이 관상기도에 대해 “어떠한 교류도 삼가며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고 결의한 데 이어, 예장 합신측 역시 관상기도 운동과 레노바레 운동에 대해 “참여하지 말 것”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양 교단은 각각 “이단(사이비)피해대책조사위원회에 회부하여 계속 연구토록 함으로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 위험성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재 이들 운동에 대한 충분한 연구자료가 부족한 것이 교계 현실이다. 이에 독자들의 구체적인 이해를 돕고자 양 교단의 총회에 보고된 연구보고서 전문을 하나씩 게재한다. <편집자 주>

이승구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도 관상 기도가 유행하고 있고, 그로 말미암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면에서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복음주의적 입장에 서 있다고 하는 분들 중 일부가 관상 기도를 주장하고 나오기에 순진하게 그저 지도자들을 따르는 성도들 중에는 관상기도가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따라가기도 하고, 또 어떤 성도들은 이것이 과연 바른 것인가 하는 심각한 질문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글에서는 우리 주변에 유행하고 있는 관상기도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밝히고, 천주교에서 말하는 관상 기도와 개신교의 관상 기도가 과연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이에 대한 천주교 내에서의 비판적 소리를 듣고, 개혁파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이에 대해서 과연 어떤 입장을 천명해야 하는지를 제시해 보기로 하겠다.

관상 기도의 정체나 그 방법을 살필 때나 또한 그 역사적 흐름을 살펴 볼 때나 더구나 관상 기도의 주창자들이 나아가는 방향을 볼 때에도 관상 기도는 아주 좋게 평가할 경우에라도 은혜의 주입(infusion)과 하나님과의 합일(合一)을 추구하는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적 특성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신비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심각하게 평가할 때는 동양 종교나 이슬람교 안의 관상적 특성들과 잘 조화되는 소위 보편적 영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1. 관상기도는 무엇인가?


먼저 관상(觀想)이라는 말의 의미부터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함께’라는 뜻의 ‘Con’과 이교의 성소, 그리고 후대의 기독교적 성소를 뜻하는 ‘templum’의 합성어로 이해되는 1) contemplation은 사물의 내면을 바라 볼 수 있는 장소인 성소에서 사물들의 근원인 하나님을 발견하고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희랍 교부들 중 일부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직접적 경험을 ‘떼오로기아’(θεολογία)라고 했다고 한다. 2) 이런 뜻에서 장신대학교의 유해룡 교수는 관상을 “사고에 의한 분석적인 하나님 경험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는 하나님 임재 체험과 관련된 말이다”고 한다. 3) 현대적 관상 기도 운동을 일으킨 사람 중의 하나인 천주교 사제인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은 말로 하는 기도는 깊이 있는 기도가 아니라고 한다. 4) 이들이 존중하는 또 다른 천주교 사제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관상을 “우연적인 실체들 안에서 모든 실체의 근거이며, 참된 실체이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5) 그래서 관상 기도는 주장하시는 분들은 대개 관상 기도는 언어나 심지어 마음속의 심상들(images)도 사용하지 않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지향하는 기도라는 말을 한다: “관상 기도는 주 앞에서 이미지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마음으로 주님을 지향하는 기도이다. 곧, 침묵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품안에서 쉬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6) 화란 출신의 천주교 사제 선교사인 짐 볼스트(Jim Borst)가 7) 쓰고 편집한 한 책에는 이런 언급도 있다: 8)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를 묵상기도(meditative prayer)와 비교한다면, 진리를 성찰하면서 달리는 묵상기도 대신에, 관상기도는 내재하시는 그분의 현존에 깨어 머물면서 그분을 응시하는 것이다. 묵상은 그림을 그리는 활동이라고 비교할 수 있다. 그리고 관상적 기도는 완성된 그림을 조용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화가가 묘사한 화가의 생각의 실체를 의식하고 알아들으면서 그림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9)

이런 입장에서 한신대학교의 권명수 교수는 “관상은 대상에 주의를 기울여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그 대상과 일치를 이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10) 천주교회 요리문답에서는 관상 기도에 대해서 다음 같이 말한다: “관상기도는 기도의 신비의 단순한 표현이다. 그것은 예수께 초점 맞춘 신앙의 응시이며,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요, 침묵하는 사랑이다. 이것은 우리들로 예수의 신비에 동참하게 할 정도로 그리스도의 기도와 참으로 연합하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11)

그러므로 관상기도를 하시는 분들은 “관상 기도를 통해 관상 상태를 지향한다.”고 말하기를 즐겨한다. 12) 이런 의미에서 키팅은 관상기도와 관상 생활과 구분한다. 전자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상태로 이끌어주는 일련의 경험'이라면, 후자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그 상태 자체'를 의미하며, 이 속에서 기도와 행동이 성령에 의해 움직인다고 한다. 13) 그리하여 “관상은 사람의 존재의 중심에서 알려지고 사랑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자각이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14) 이런 뜻에서는 관상이 목표이고, 그에 이르도록 돕는 방법이 관상 기도가 된다. 15) 그러므로 최종적 목적은 관상의 상태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깨달음에서 오는 기도라는 뜻에서 관상 기도를 “(하나님을) 의식한 기도” 또는 “깨달음의 기도”(prayer of awareness)라고 하기도 한다. 16)

관상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지향하는 상태인 소위 관상 상태에 이르기 위해 마음을 주께로 향하는 일을 “centering prayer” (이를 우리말로는 대개 ‘향심 기도’, 또는 ‘중심 기도’, 또는 ‘구심 기도’라고 번역하고 있다)라고 한다. 17) 엄무광은 “향심기도는 1915년경에 미국 코네티컷 주의 스펜서에 있는 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당시 이 수도원의 원장이던 토마스 키팅 신부의 주도 아래 바실 페닝톤과 월리엄 메닝거 두 신부가 영적으로 목말라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무지의 구름의 방법을 현대화시켰으며,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을 도입하여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기도이다.”라고 말한다. 18) 그래서 이 향심 기도는 관상 기도를 위한 준비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키팅은 향심기도를 관상기도에 이르는 사다리의 맨 밑에 있는 제일 첫 번째 다리일 뿐만 아니라, 관상의 세계로 쉽게 인도하는 '매우 좋은 길'이며 '유일한 길'이라고 평가한다.” 19) 또한 권명수 교수는 “향심기도는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의 마지막 단계의 '하느님 안에서 쉼'에 해당하는 하나의 방법이다.”라고 까지 말한다. 렉티오 디비나를 체계화한 귀고 2세는 렉티오 디비나의 마지막 단계에서 주어지는 “(주입적) 관상은 정신이 하나님께로 들어 올려져서 거기 머무르는 단계로, 이 때 한없이 감미로운 환희를 맛봅니다”라고 했다. 20)

이를 주장하시는 분들은 향심 기도 과정을 대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3단계들(긴장을 풀고 쉬기와 침묵, 믿음으로 그분의 현존을 자각하기, 열망하는 사랑)은 그분을 찾고, 그분께로 나아가기에 관한 것이다.
4-7단계들(자기 봉헌, 수용,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기, 참회)은 마음과 정신의 정화에 관한 것이다. 마음과 정신은 그분을 향해 자유롭고 투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8-11단계들(믿음으로 청하기, 관상, 받기, 감사와 찬양)은 그분으로부터 받기와 그분을 사랑하기에 관한 것이다.
12단계(전구, 즉 다른 이들을 위한 중재의 기도)는 맨 나중에 온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것들도 다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21)

이를 좀 더 일반적인 용어로 제시한 방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기도자는 조용한 장소와 시간을 마련한 후, 편한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마음속에 떠오는 생각을 잊으려 하기 보다는 조용히 바라보며 저절로 사라지길 기다린다. 그러나 계속해서 생각이 떠오르거나 졸음이 올 경우에 '성스런 이름'이나 '거룩한 단어'를 마음속으로 한두 번 불러, 마음속의 생각들에서 마음이 침묵 가운데 계속 있기를 지향한다. 이런 과정을 정해진 시간 동안 계속 반복한다. 향심기도가 관상기도의 효과가 있기 위해서는 키딩의 경험에 의하면 20~25분 정도를 하루 두 번 하기를 권한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기도하는 중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에 신경이 쓰여 깊은 기도에 들어가기에 방해가 되곤 했다. 그래서 자명종 시계나 예정된 시간이 지나면 음악이 나오도록 테이프를 틀어 놓고 기도에 들어가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음악이 끝나면 1~2분 정도 침묵을 지키다가 눈을 뜬다.” 22)

향심기도나 관상 기도와 관련해서는 대개 향심 기도를 하는 몸자세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지침을 주고 있다. 그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몸자세는 온 마음과 온 정성과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하기에, 마음을 모을 수 있는 기도자세가 요구된다. 몸에 관하여 동서양의 모든 기도수련에서 공통되게 추천하는 일관된 원리는“ 등을 똑바로 세우지만 긴장하지 않는 것”이다. 무릎을 꿇거나 기도의자를 사용하면, 몸이 혈액순환이나 호흡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의식을 적절하게 집중하고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허리의 자세로서, 척추를 곧게 세우면 내장의 압박이 그만큼 줄고 복압력이 생겨 호흡이 편해지고 정신도 안정된다. 뿐만 아니라 온몸의 긴장이 사라지며 마음이 집중된다.“ 23)

심지어 향심 기도를 할 때의 호흡하는 방식에 대해서까지도 매우 구체적인 지침이 주어진다. 그리하여 향심 기도에 대한 일종의 연습이 가능하게 하고 있다. 주어진 지침의 한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필자는 기도의 몸가짐을 다룰 때 기도의 실천에 매우 중요한 호흡도 같이 다루려고 한다. 동양의 명상 수행에는 호흡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방식인 수식관(數息觀)과 수식관(隨息觀)이 있다고 말한다. 전자는 선의 호흡법을 대표하는 것으로 호흡을 세면서 하는 방법이다. 즉, 숨을 천천히 들이쉬면서 ‘하 - 나 --’ 다 들이쉬고 나서는 다시 천천히 내쉬면서 ‘두 -- 울 --’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며 열까지 세고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오는 방식이다. 이에 비해 후자는 호흡만을 의식하여 숨이 들고 남을 따라가는 숨쉬는 사실에만 집중하는 수행이다. 이 두 가지 호흡법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여러 가지 변형이 가능하여 보다 효과적인 자신만의 방법을 창조적으로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전통, 특별히 동방교회의 기도의 수행자들인 헤지키스트들도 호흡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동방 교부들의 영성 작품 모음집 『필로칼리아』(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에서는 이렇게 권고한다:

“우리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쉽니다. 호흡은 몸이 살아가는데 기본이 되고 몸의 온기를 유지시켜 줍니다. 따라서 방에 고요히 앉아 마음을 모으고 기도(氣道)를 따라 들이마신 공기를 모두 심장으로 들어가게 한 다음 그대로 있으십시오.... 그리고 다음의 기도를 읊으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계속하십시오.”

이들은 몸의 생명 유지에 긴요한 호흡을 따라 우리의 의식을 집중하게 되면, 여러 가지 긍정적인 유익이 많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인도 사람 드 멜로 역시 여러 가지 묵상법 중에 호흡법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숨을 들이쉴 때 하나님의 성령이 자기 안에 들어옴을 의식하고, 숨을 내쉴 때 자신의 온갖 두려움, 부정적인 느낌들을 내보낸다고 상상하면서 기도를 해보라고 권면한다. 또 어떤 느낌들은 드 멜로의 방식대로 호흡을 통해 즉시 표현해보라고 권한다. 내면의 상태가 많이 호전됨을 종종 경험하는 기쁨을 덤으로 받을 수 있다. 24)

볼스트도 역시 다음과 같은 호흡법을 제시하며 훈련할 것을 권하고 있다:

“긴장, 걱정, 흥분과 같은 것들은 모두 우리의 호흡(숨)을 얕게, 짧게 만든다. 반면에, 우리가 일부러 좀 더 규칙적으로 천천히 숨을 쉬면, 긴장감이 사라지고, 긴장감을 좀 더 잘 풀고, 안정감과 평화를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기도를 하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의 맥박이나 심장의 고동의 리듬에 맞추어 천천히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도록 노력해야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심장의 고동의 속도에 맞추어 1, 2, 3, 4, 5, 6까지 세면서 코로 숨을 들이쉬고, 잠깐 동안 (몇을 셀 정도로) 숨쉬기를 정지하고 있다가, 들이쉴 때와 같은 방법으로 천천히 숨을 내쉰다. 숨을 내쉬기를 끝낸 다음에 잠깐(몇을 셀 정도로) 중단한다. 기도 시간 이외에, 산보를 하거나 누워 있거나 누워 있는 동안에도 이런 숨쉬기를 연습할 수 있다.” 25)

이렇게 호흡법을 연습하여 이렇게 숨어 쉬어야 하겠다는 생각하지 않아도 이런 방식으로 호흡할 수 있게 되기까지 노력하면서 반복 기도를 하는 중에 관상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복기도 가운데 “가장 좋은 반복기도는 [동방 정교회의 수도사들 중 일부가 오랫동안 사용해 온 기도인] 예수의 기도”라고 한다. 26)

2. 천주교의 관상기도와 개신교의 관상기도가 얼마나 다른가?


개신교적 관상 기도를 제시하는 고려 수도원의 박노열 목사는 관상 기도의 전통을 소개하면서, 안토니우스, 베네딕토, 동방교회, 14세기, 영국의 어떤 저자의 “무지의 구름”, 그리고 마틴 루터, 그리고 천주교회의 이냐시오의 예수회, 십자가의 요한, 그리고 토머스 머턴을 언급하고 있다. 27) 이 중에 루터가 과연 오늘날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관상 기도와 얼마나 관련 있는지를 알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만을 제외하면 박노열 목사께서 제시하는 관상 기도의 전통을 제시하는 이들은 모두 동방 교회 사람들이거나 천주교인들이다. 더구나 미국에서 관상기도 운동을 새롭게 시작한 이들은 다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지도자들인 천주교 인사들이었고(토마스 키팅 원장, 바실 페닝톤과 월리엄 메닝거), 28) 관상 기도를 폭 넓게 번지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한 나우윈(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도 29) 화란의 천주교 사제이다. 이와 같이 관상 기도의 선구자들과 주창자들로 언급되는 이들은 전부 천주교도들이다. 이와 관련하여 언급되는 대표적인 인사들은 놀위치의 쥴리안,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로렌스 수사, 토마스 라이언, 존 메인, 피터 크리프트, 존 마이클 탤벗이다.

이들 중 다수는 신비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들은 특별계시가 지금까지도 계속 주어진다는 입장을 천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놀위치의 쥴리안(Julian of Norwich, c. 1342/43-c. 1416/17)은 14세기 영국의 신비주의자로 자신의 종교체험을 설명한『신적 사랑의 계시들』(Revelations of Divine Love)이라는 책을 썼고, 30) 스스로 병을 '체험'하기 원했고 병이 나았다고 한다. 즉, 그녀는 30대에 기도하여 얻게 된 '죽음'의 경지에서 사제가 든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그리스도의 머리에서 피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며, 하늘로 끌어 올려져 하나님의 보좌, 복된 동정녀 마리아, 자신의 영혼 속에 앉아계신 예수님 등 16 가지의 다양한 '계시'(showings)를 목격했다고 한다. 31) 이와 같이 그녀는 성경보다 신비 체험을 더 중시했다.

또한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15-1582, Teresa Sánchez de Cepeda y Ahumada)는 16세기 스페인의 카르멜수도회 수녀였던 신비주의자로 사후 40년 되는 1622년 그레고리 15세에 의해 시성식이 이루어졌고, 1970년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교회박사’(doctor ecclesiae) 칭호가 추서되었다고 한다. 32) 그녀의 조부가 유대교에서 천주교로 개종, 다시 유대교인이 됐다는 설이 있고, 테레사는 7세 때 남동생과 함께 '순교'를 자원하여 이교도 무어 족에게로 가는 길을 숙부가 막았다고 한다. 20세 때 몰래 가출하여 카르멜회에 입회했다. 중병에 걸렸다가 프란치스코 데 오수나(Francisco de Osuna)의 <제3의 영적 알파벳>(Third Spiritual Alphabet, 1527)을 읽고 종교적 '황홀경'을 체험했다고 하며, 하나님과의 '완전 합일', 풍성한 “눈물의 축복”을(a rich "blessing of tear.") 체험했다고도 주장한다.

그녀는 또한 스랍이 그녀의 심장을 황금 창끝으로 계속 찌르는 경험을 하였다고도 한다. 그녀는『완전의 길』(The Way of Perfection)이라는 저서에서 33) 소위 능동적 거둠을 묘사하고, 『영혼의 성』이라는 책에서는 영혼을 여러 방을 가진 아름다운 성으로 묘사하면서 각 방에 따라 ‘소리 내어 하는 기도’(천주교에서 말하는 소위 구송[口誦] 기도), 추리적 묵상 기도(mental prayer), 정감의 기도, 거둠의 기도, 고요의 기도(prayer of quiet), 일치의 기도가 있다고 한다. 34) 영혼의 성의 4궁방이 수동적 거둠과 고요의 기도로 시작하는데, 수동적 거둠은 목자의 피리소리를 듣고 양무리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듯이 하나님에 의해 우리가 내면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기도라고 한다. 이 수동의 거둠의 기도에서부터 능동성이 사라지고, 수동적 차원이 중심이 되는 주입적 차원의 기도가 시작된다고 한다. 이는 마치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같이 물 긷는 그릇이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이다. 35)

그것의 극치인 “황홀경(ecstasy or rapture)의 상태는 극치 수동적인 상태로 몸 안에서 의식이 없어지는 상태라고 한다. 즉, 감각적 활동이 그치고, 기억과 상상력도 하나님께 스며들거나 신에 중독되게 된다고 한다. 몸과 영혼이 행복한 고통 가운데서 빛나게 되었다가 온전한 무능력과 무의식을 느끼다가 목조여지는 것 같은 것도 경험하고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황홀경적 부양도 경험할 수 있고, 이런 30여분의 경험 후에는 몇 시간 동안 몽환적인 쉼을 경험하는 데, 이는 하나님과의 연합 가운데서 모든 기능이 부정된 상태라고 한다. 그 후에는 복된 눈물을 흘리면서 깨어나게 된다고 하는데, 이런 황홀경이 신비적 경험의 극치라고 한다. 36)

그녀와 관련이 깊은 십자가의 요한(St. John of the Cross=산 환 델라 크루즈. 본명 Juan de Yepes Alvarez, 1542-1591)은 16세기 스페인의 카르멜파 수사요 신비주의자로서, 37) 관상시집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의 캄캄한 밤>을 저술했다. 38) 1726년에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성자로 선언되었고, 1926년에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서 교회의 박사(doctor of divine love)로 선언되었다. 천주교로 개종한 유대계 가정 출신으로 예수회 학교를 다니다가 수사가 되어 엄격한 금욕을 추구하여 기존 카르멜 수사회와의 차이점으로 투옥됐다가 탈옥한 경험(1578. 8. 15)도 있다고 한다.

십자가의 요한에 의하면 영적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다보면 우리들은 감각의 어두운 밤을 경험하게 되는 데, 그것은 무미건조함, 논리적 묵상을 할 수 없음, 그리고 내면의 방황을 하는 경험이라고 한다. 이런 밤은 하나님께서 더욱 친밀한 관계로 이끌기 위한 것이요 성숙시키기 위한 은총이라고 십자가의 요한은 주장한다. <갈멜의 산 길>에서는 산을 오르는 단계로 영혼의 진보의 단계를 비유했다. 39) 십자가의 요한에게 있어서 관상은 순수한 선물이며 단순히 받는 것이다. 40)

아씨시의 프란시스는 프란시스코 종단의 창시자로 신비주의자요 동물애호가라고 할 수 있다. 사도 파울 같은 몸의 흔적이라는 '성흔'(스티그마타)을 추구하던 나머지 손바닥에 흔적이 생겼다고 하며, 동물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로렌스 형제는 17세기 카르멜파 수도회 평신도 수사로 본명 니콜라스 헤르만(프랑스식: 에르망)인데 훗날 '부활의 로렌스'로 자칭했다고 한다. 군인이었다가 수사가 되고 훗날엔 신발 수선공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하나님의 현존 앞 수행>이라는 책으로 유명한데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John Wesley), 그리고 저술가 A. W. 토저도 이 책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묵상과 고백들은 성경적이기보다는 자아 중심적이며 자기 체험적이다.

그런가 하면 관상기도를 강조하며 보급화는 근자의 천주교 인사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서고, 이를 넘어서 범종교적 활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토마스 라이언은 천주교식 사도운동인 바울회(Paulist) 소속 사제로서 에큐메니즘과 초종파 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그는 현재 바울회 디렉터이고, 카나다 몬트리얼의 에큐메니즘 단체인 '우니타스'(Unitas)의 창설자의 한 명이다.

또한 존 메인(John Main)은 영국의 20세기 관상기도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베네딕토회의 수사인데, 41) 그는 말레이지아 쿠알라룸푸르에서 힌두교 구루 스와미 사티아난다를 만나 힌두교 명상의 만트라(문구반복)를 배워 관상기도에 도입하여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주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라는 말과 같이 “마라나타”라는 말을 반복하여 내적 고요와 침묵에 이르고, 이를 통해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70-73년 미국 워싱턴 DC의 안셀무스 수도학교 교장으로 연구하던 중 광야수사 요하네스 카시아누스와 힌두교 명상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70년대 후반엔 로렌스 프리먼 수사와 협력사목을 하다가 카나다에 새 베네딕토 수도원을 설립했다. 런던과 카나다 몬트리얼의 수도원에서 관상영성을 적극 보급하고 훗날 세계기독교명상공동체(WCCM)로 발전시켰다. 이 세미나에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여 세미나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승구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향심기도 전담), 김경순 (아녜스) 수녀, 그리고 미국에 거주하는 천주교인인 엄무광 42) 등이 관상 기도를 널리 보급하고 있다. 43)

오늘날 개신교인들 중에서 관상 기도를 널리 보급하는 데 앞장 서시는 분들은 퀘이커 전통 속에 있는 리쳐드 포스터(Richard Foster), 리전트 컬리쥐의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44) 침례교 전통 속에 있는 존 에커만 45)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신대학교의 권명수 교수, 46) 장신대학교의 유해룡 교수, 47) 오방식 교수, 감신대학교의 이정배 교수, 이후정 교수, 그리고 고려 수도원의 박노열 목사, 48) 다일 공동체의 최일도 목사, 49) 방영식 목사, 이건종 목사, 그리고 (감사하게도) 이제는 더 이상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50) 이동원 목사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그런데 관상기도를 하시는 분들은 교파의 장벽이 없이 하기를 지향하고 있으므로 천주교 방법이나 개신교 방법이 구별이 없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래서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이정배 교수께서 종교와 수행 영성 체험 프로그램에서는 논산 상월면에 위치한 씨튼 수도원에 가서 ‘씨튼의 향심기도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 51) 이 피정의 첫 강의인 향심 기도 강의는 인도의 한 그루(Gru) 이야기로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 천주교회에서 말하는 관상 기도와 개신교인들이 말하는 관상 기도가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다. 아마 개신교에서는 기도할 때에 마리아에 대한 언급을 배제한다든지, 52) 성자들을 언급하거나 하지 않는다든지, 53) 기도할 때에 형상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다든지, 54) 그 과정에서 묵주기도를 하지 않는다든지 55) 하는 것만 다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후에 생각할 관상 기도의 신학적 기초를 생각하면 개신교도들이 말하는 관상 기도도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관상기도 주장자들이 말하는 위험성

관상 기도의 열렬한 주장자인 박노열 목사는 관상기도의 문제점으로 다음 네 가지를 언급한다: ①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분리” 되는 경향 ② “지나친 금욕주의” ③ “반 지성주의 경향” ④ “믿음의 공동체를 무시”하는 경향. 56) 그러나 그는 “이런 위험들은 전통이 왜곡된 데서 나오는 것이지 전통의 본질적인 요소들이 아니기 때문”에 관상 기도의 전통에 충실하면 이런 위험이 극복될 수 있다고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위험은 관상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관상기도의 전통을 따라 바르게 하기만 하면 전혀 위험이 없고 오히려 ① “처음 사랑”(계 2:4)의 불길에 지속적인 부채질을 하고 ② 지성적으로 믿는 종교를 넘어서도록 인도하고 ③ 기도의 중심을 강조하고 ④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고독을 강조하고 ⑤ “성화의 길로 이끄는 도구”가 되어, “그리스도인의 삶과 믿음에 대한 관상의 전통의 강물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는 길을 보여준다.”고 결론 내린다. 57)

그러나 과연 관상기도는 잘 사용하기만 하면 좋은 것일까?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

4. 관상기도의 문제점


천주교회 운동인 관상 기도에 대해서 어떤 천주교인들은 그것을 전통적인 천주교적 기도의 하나로 여기며 보급하지만 일부 천주교인들은 이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먼저 천주교회 일부에서 관상기도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점 제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들은 기본적으로 관상 기도는 전통적 천주교의 가르침과 달리 뉴에이지적인 영성과 상당히 비슷하지 않느냐고 질문한다. 58) 이런 질문 제기는 특히 뉴에이지 전통 속에 있다가 천주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관상기도에 대한 일부 천주교 지도자들의 주장과 실천에 대해서 반응하는 내용이다. 이 문제를 연구한 마가렛 피스터라는 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내가 지난 10여 년 동안 했던 뉴에이지에 관한 연구에 있어 나는 향심기도가 그리스도교적 관상이 아니라는 것과 이런 유형의 기도가 요한 바오로 2세, 라칭거 추기경,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또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에 의해 권고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59)

피스터는 요즈음 제안되는 관상기도를 면밀히 조사해 보면 결국 뉴에이지적인 명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60) 향심기도(CP)와 초월 명상(TM)에 몰두했었던 핀바 플래내건(Fr. Finbarr Flanagan) 신부는 향심기도는 “초월 명상에 그리스도교의 옷을 입혀놓은 것”이라고 한다. 61) 그가 잘 강조하고 있듯이 “페닝턴 수사는 주저함 없이 초월 명상을 추천한다.” 62) 그래서 전통적 천주교 입장에 충실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관상 기도는 천주교 전통과 연관된 것도 아니고, 더 나아가 기독교적인 것도 아니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63) 이는 결국 자기 최면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64)

관상 기도를 다른 종교와 깊이 연관된 것으로 보는 이런 비판이 그렇게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은 현대에 와서 관상 기도를 국제적으로 보급하고 있는 토마스 키팅이 세계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을 증진하는 평화 회의의 국제 위원 중 한 사람으로 특히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와 영지주의의 그리스도인 교회는 물론 유대교나 불교, 그리고 모든 다른 종교를 망라해 구별을 두지 않으면서 그동안 그리스도인 전통에서 억제했거나 애매한 채로 방치해두었던 통찰과 수련을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들의 삶속에 다시 도입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그의 활동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관상 기도는 결국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심지어 의식 너머의 상태에 이르고 거기 머무르는 것을 지향한다. 65) 이와 같은 소위 관상의 상태가 불교에서 말하는 무념무상의 상태와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물론 이런 질문에 대해서 권명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이는 오해이다. 왜냐하면 외적으로 침묵 속에 기도하는 모습이 동양 전통과 비슷하게 보인다고 해도, 내용적으로는 추구하는 목적이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 기도는 동양 명상전통이 추구하는 긴장해소나 마음의 휴식이 아니다. 관상기도는 예수님께서 오순절이 지나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그분과의 교제와 관계를 위해, 그분에게만 우리의 주의를 쏟는 기도이다.” 66)

그러나 권 교수가 의존하고 있는 키팅은 의식너머의 상태에로 인도하는 것을 성령께서 인도하신다고 하는데, 이는 소위 그리스도인들만의 전유물로 생각하느냐고 하면 종교 화합을 위해 앞서는 키팅은 선듯 긍정적으로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관상기도를 하고 가르치는 상당수의 지도자들이 동양 종교들의 수행법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결국 같은 것을 지향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67) 생각과 의식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떤 종교적 명제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도 넘어서야 한다고 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하게 생각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쉼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이렇게 생각 자체를 넘어 서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 근본적 이해에 대해 심각하게 질문해야 할 것이다. 관상 기도와 동양의 선(禪)과의 차이가 분명하다고 말하는 권명수 교수께서 인용하면서 말하고 있는 다음 논의는 결국 관상 기도를 하는 분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에 한 랍비가 한번은 제자들에게 밤이 지나고 새 날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한 제자가 ‘멀리 있는 동물을 보고 양인지 개인지 분간할 수 있을 때 새 날이 아닙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랍비는 대답했습니다. ‘아니’ 또 한 제자가 ‘멀리 있는 나무를 보고 무화과 나무인지 복숭아 나무인지 분간할 수 있으면 새 날입니까?’ 랍비는 대답했습니다. ‘아니’ ‘음, 그렇다면 무엇인지요?’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랍비의 대답은] ‘너희가 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 너희의 자매 형제로 다가올 때, 그 때가 새 날이다. 만약 너희가 이것을 할 수 없다면, 시간이 언제든지 상관없이, 여전히 밤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모든 남녀’를 ‘형제’요 ‘자매’로 보는 것은 신비가의 믿음의 비전에 함께 하는 것이다. 신비가의 핵심적 직관은 하나님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일치(unity)하고 하나(oneness) 되는 것이다. 이것은 관상 상태에로의 진전을 통해 나타나는 관상(contemplation)의 은혜로운 효과로서 가능하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야기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실재(reality)를 보는 우리의 눈을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변형시켜가게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신자가 추구하는 비전은 비현실적이거나 허황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점점 드러나고 있는 산업화·정보화 사회의 진전으로 야기되는 환경적 위기 속에서 지구의 생존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들과 우주의 모든 존재가 서로 상호 연대하는 일을 실현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이 점점 명백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 인식은 물질 중심의 세계관에서 종교적인 세계관, 곧 하나님께서 우리 세계에 임재(presence)하여 활동하고 계신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험은 글자 그대로 신비적(mystical)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칼 라너는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은 신비가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전혀 그리스도인으로 있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의미에서 더욱 무게 있게 다가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8)

그러므로 권명수 교수와 같은 분들이 추구하는 의식을 넘어서 세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진정한 관상가의 모습이 성경적 그리스도인과 과연 일치하는 것인지, 아니지를 깊이 있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관상기도의 선구자의 한사람으로 항상 언급되는 토마스 머튼은 그의 말년에 불교와 수피즘(신비주의 이슬람)을 공부하고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수피즘으로 충만해 있다." 69) 또한 그는 "나는 불교와 기독교 사이에 모순점을 발견할 수 없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좋은 불교도가 되려고 한다." 70) 머튼은 또한 이렇게 말했다: "아시아, 선(禪), 이슬람 등등 이 모든 것들은 나의 삶 속에 함께 진입해 온다. 이 모든 것을 배제한 채 나 스스로의 수도원 생활을 영위하려는 시도는 바보짓일 것이다." 71)

이와 같은 생각은 머튼의 생각만이 아니다. 관상 기도의 방법을 소개하는 책을 쓴 천주교 지도자인 짐 볼스트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한다:

“인도의 종교적 상황에서는, 매일의 관상기도 실천은 우리를 '하나님을 현실화'한 사람이 되게 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일편단심으로 그분의 ‘거룩한 현존(darshan)’을 추구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그분을 알게 될 것이고, 그분으로 가득 차게 되고, 점점 더 그분과 같아지고, 그분과 하나가 된다. 완전히 그분이 된다.” 72)

더 나아가서 볼스트는 “인도의 종교들은 ‘박티-마르가’(bhakti marga)에 대해서 말한다. 즉, 하나님과 일치하는 방법으로 믿음과 신뢰와 사랑의 신심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일치가 행복과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고 하면서, 73) 다음과 같은 주장에로 나아간다: “'박티' 전통에서 기도는 하나님 현존의 현현(顕現)과 우리의 마음속에 그분이 거처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그분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관상적 열망이다. 이 전통에서도 기도의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는 그분의 이름('Nam-Jap')을 계속 반복해서 부르는 것이다.” 74) 볼스트는 또한 이슬람의 수피즘도 이와 연관시키면서 다음 같은 주장도 한다: “수피종파(Sufism)와 같은 이슬람교 안에서의 관상 운동은 인간의 열망과 추구와 발견의 대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초점을 가지고 있다. 수피종파도 그분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형태의 기도를 사용하고 있다.” 75) 이와 같이 볼스트는 하나님과의 합일이라는 천주교 신비주의의 생각과 인도적 신비 경험, 그리고 이슬람의 수피즘을 연관시키며 이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 키팅도 이렇게 말한다: "관상기도는, 사고와 언어와 감정을 초월하는 궁극적 신비인 신에게 우리의 마음과 심장과 우리의 온 존재를 여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동의할 때, 신과의 합일로 이끌어 주는 내적 정화 과정이다. 76) 더 나아가서 키팅은 오컬트적인 쿤달리니 요가를 추천하기도 한다. 77) 키팅이 수도원장으로 있던 20년간(1961-81) 세인트 조셉 수도원에서는 불교도, 힌두 지도자들, 그리고 선불교의 선사 수즈키(D. T. Suzki)와의 대화를 가졌으며, 이제는 초월적 명상(TM: Transcendental Meditation) 교사가 된 전 트라피스트 수사였던 폴 메리첼이 수도사들에게 초월적 명상을 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하고 초월 명상 연습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고 한다. 78) 최근에 키팅은 종교다원주의자인 힉(John Hick)의 생각과 거의 같은 생각을 아주 확연히 표현하기도 했다. 79)

또한 코넬 대학교 출신의 켄 블랜처드 박사(Ken Blanchard)는 그리스도인들이 이교 사상을 빌릴 것을 장려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은 부처, 모하메드, 요가난다, 달라이 라마 같은 위대한 선지자와 영적 지도자들의 지혜의 말씀을 듣게 된다." 80) 예수님 같은 지도자가 되라고 하며 81) 섬기는 리더쉽을 82) 강조해 온 블랜처드가 왜 그런 발언을 했을까? 단순히 요청된 서문을 써 준 것일까? 그러나 그가 수많은 뉴에이지 서적들을 추천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것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예를 들어, 그는 짐 밸러드(Jim Ballard)의 『어린 물결과 늙은 파도 이야기』 2007년도 판의 서문을 썼다. 83) 이 책은 힌두교 구루인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영감을 받아 쓰인 것이다. 이 책은 어린이들에게 신이 곧 모든 것이며, 사람은 신과 하나임을 가르치려고 쓰여졌다. 그 서문에서 블랜처드는 놀라운 선언을 한다: "요가난다는 예수를 사랑했으며, 예수는 요가난다를 사랑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그가 추구하고 있는 사상의 방향을 알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국제 관상기도단의 바실 페닝턴(Basil Pennington)도 이렇게 말했다: "…인류 가족의 영혼은 성령이다." 84)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람들이 종교를 불문하고 성령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그런 뜻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영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85)

관상 기도를 상당히 자유롭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큰 기여를 한 나우윈도 “오늘 나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집의 문을 열어 주려고 오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를 알건 모르건 간에,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개인적으로 믿는다. 나는 모든 사람이 신을 향한 나름의 길을 청구하도록 돕는 것이 오늘 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86) 우리나라 씨튼 수도원 원장인 김성혜 교수도 “스님들이 찾고 있는 불교의 진리도 내 시각에서 보면 하느님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둘이라고 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언어는 다르지만 모든 종교의 길은 연결돼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87) 이와 같이 상당 수의 관상 기도가들은 기본적으로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을 아주 분명히 천명해 가고 있는 것이다.

혹시 이처럼 보편적인 영성 추구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해도 관상 기도는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면 그에 대한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관상 기도는 하나님 안에서 쉬는 상태인 관상에 이르기 위해 잘 준비하고 훈련하여 마음을 정화하고 은혜의 주입(infusion of grace)을 통해 88) 궁극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쉬는, 즉 하나님과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을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것이 별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반펠라기우스주의의 기본적 사상인 것이다. 89)

기본적으로 관상 기도는 천주교회의 정화, 은혜의 주입(infusion of grace), 그리고 신과의 합일이라는 생각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이다. 관상 기도를 소개하는 말에 주입적 관상이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고 있는 지를 살펴보라. 천주교회에서 주부(注賦)적 관상이라고 번역하므로 개신교도들조차도 주부적 관상이라고 번역할 정도로 이런 생각이 깊이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90) 그러므로 이런 입장에서 은혜의 주입에 의한 주입적 관상을 머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입적 관상은)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인 사랑이요, 인식을 말한다. 하나님에 의하여 영혼의 그 정수리에 부어내린, 단순하고 어둑한 것으로서, 관상은 영혼이 직접적이고도 체험적으로 하나님과 만나게 해 주는 것이다.” 91) 그러므로 관상 기도는 은혜의 주입을 매우 중요시하면서 그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경험하고 결국은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행해 나가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관상 기도의 방법 소개의 한 부분에서 볼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첫째, 천천히 깊이 규칙적으로 숨을 쉼으로써 내가 숨을 들이쉴 때, 나는 그분의 사랑하시는 현존을 들이마신다. 1초나 2초 동안 숨을 들이마신 채로 머문 후에, 나는 숨을 천천히 완전히 내어 쉬면서 그분이 아닌 모든 것은 전부 몰아 내 보낸다. 나는 나의 모든 시간을 이런 식으로 보낼 수 있다.

둘째, 나의 숨 쉬는 리듬에 맞추어 나는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 그분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른다. 나는 숨을 들이쉬는 동안에 '예수님'의 이름(또는 '아빠', 나의 아버지)을 3번 반복해서 부르고, 숨을 내쉴 때에도 3번 반복해서 부른다.” 92)

볼스트의 이런 표현은 관상 기도가 얼마나 신과의 합일이라는 생각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지를 잘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관상은 주입적인 것이고 그 상태에서 우리는 순전히 수동적 이라고 하면서도 그에 이르기 위해 인간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에서 관상기도에서도 기본적인 신인협력주의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순전한 주입적 관상을 강조하는 십자가의 요한도 성숙한 관상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93) 관상이 은혜의 선물임을 강조한 오방식 교수도 이를 소개하는 글을 마칠 때는 “꾸준한 기도 수련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숙하는 삶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고 마치고 있는 것이다. 94)

관상 기도를 주장하는 분들이 늘 강조하여 말는 아빌라의 테레사는 자신이 말하는 영적 진정의 마지막 단계를 “하나님과의 영적인 결혼”이라고 부르면서, “이 영적인 결혼에서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데, 이 분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으로 그 사랑을 어느 정도 특정한 사람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그분께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나타내시고 우리가 그분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한다. 95) 그런데 이 종국적 일치는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며 위대하신 분께서 이런 호의를 우리에게 베풀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스스로를 아주 많이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 테레사의 생각이다. 96) 그러므로 대부분의 관상가들은 하나님의 힘으로만 연합이 이루어진다고 하면서도 인간이 이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하면서 많은 고행과 노력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드러낸다.

이 모든 점을 살펴 볼 때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분들이 지도하는 기도 운동인 관상 기도를 따라 가려고 하는 것은 복음에 충실하려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할 바가 아닐 것이다.

5. 결론

우리들은,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그리해야만 하는 것처럼, 관상기도가 토대하고 있는 사상적 기저가 어떠한 것임을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으로 말한다고 해도 관상 기도는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도움이 합하여 정화, 주입, 합일의 단계에로 나아가려는 반펠라기우스주의적인 천주교적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관상 기도 운동가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관상기도는 종교개혁과 함께 잠적해 버리게 되었다. 관상기도가 잠적해 버렸던 17-19세기는 영성을 잃어버린 암흑의 시기였다.” 97) 그러므로 관상 기도는 종교개혁적 원리아 대립하는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최대한으로(최악의 형태에서는) 보면 그런 사상을 넘어 가서 보편 종교적인 영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관상 기도는 그 최소한의 모습에서라도 “오직 성경”의 원리(the principle of 'sola scriptura')에 근거하여 신앙생활을 하려는 개신교인들이 따라 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이 아주 분명한 것이다.

6.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실천적 제안

이상에서 우리들은 관상 기도가 성경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기도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나라 안에 이런 관상 기도가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실천적인 제안을 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우리가 참으로 성경적이고 참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에 힘써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기도는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에만 의존하여 성령님의 감화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런 기도만이 참된 기도라는 것이 분명해지고, 우리가 참으로 그런 기도를 하면 십자가에만 의존하지 않는 반펠라기우스주의적 기도의 습관이 우리에게 있을 수 없을 것이고, 다른 종교 안에도 특별은총적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식으로 논의하는 그런 관상이 우리에게 전혀 접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진정한 기도가 없고,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적인 기도를 잘 모르기에 다른 사상적 배경을 지닌 관상 기도가 우리들에게 쉽게 침투해 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에만 근거해서 성령님의 감화 가운데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에 힘써야만 관상 기도를 비롯한 잘못된 운동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이상한 기도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관상 기도의 주장자들이 말하는 성경 구절들(계 1:7, 계 3:20, 시 145:5, 시 19:14, 시 46:10, 시 116:9, 마 5:8 등)이 관상 기도 주장자들이 말하는 대로 이용되지 않도록 그 본문들의 진정한 의미를 잘 주해하고 생각하며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만히 있어야만 한다(시 46:10 참조). 98) 그것이 관상 기도 주창자들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상”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야만 한다. 관상 기도를 소개하는 논문을 쓴 오방식 교수는 “성경 안에 관상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없다. 관상의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기 위하여 본문의 본래적 의미를 무시하고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바르게 지적한다. 99) 거의 모든 잘못된 운동이 그리하듯이 관상 기도도 성경 구절들을 잘못 해석하고 오용하는 방법으로 성도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르치면 선포하는 책임을 맡은 분들은 성경을 정확히 주해하여 그 의미를 밝히 드러내어 주고, 성도들은 항상 성령님 앞에서 깨어 있는 자세로 설교와 강의를 들어서 100) 가장 성경적인 방식에로 나아가도록 힘써야만 한다. 우리들은 언제나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기도에 대해서 배우고 그런 성경적 기도를 하려고 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어떤 것이든지 그 근원적 사상을 파악 하는 것에 힘써야 한다. 유행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모든 것을 근원부터 미루어 자세히 살피는 태도가 누가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근원적으로 반펠라기우스주의적인 사상에 근거해 있고, 또한 신비주의적인 것임을 알고, 더구나 최근의 유행하는 형태의 관상기도는 뉴에이지적인 영성과도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음을 잘 파악하고 나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중에 이런 방향을 향해 나아 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군원을 잘 모를 때 이런 잘못된 운동에 편승하는 일들이 나타나게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것의 사상적 근거를 추적해 나가는 일을 한다면 관상 기도를 비롯한 모든 잘못된 유행이 우리에게 유행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미주 >
1) Cf. William Shannon, "Contemplation, Contemplative Prayer," The Dictionary of Catholic Spirituality, ed., Michael Downey (Collegeville, MN, 1993), 209-10. 관상 기도 소개자들은 대부분 이 논문에 근거해서 관상 기도를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유해룡, 󰡔하나님 체험과 영성수련』(서울: 장로교신학대학출판부, 1999), 90-91; 오방식, "관상 기도의 현대적 이해",「장신논단」 30 (2007): 271-310을 보라.
2) Cf. William Johnston, The Inner Eye of Love: Mysticism and Religion (San Francisco: Harper, 2004), 24.
3) 유해룡, 󰡔하나님 체험과 영성수련』, 91.
4) Th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Rockport, MA: Benedict's Monastery, 1992), 89.
5) Thomas Merton, The New Seed of Contemplation (Nolfolk, CT: New Directions, 1962), 3.
6) 권명수, “관상 기도의 의식의 흐름과 치유”,「신학과 실천」 16 (2008): 217-250, 인용은 217에서 온 것임. “하나님 안에서의 쉽”이라는 표현은 Gregory the Great의 표현이라고 한다. 이것과 관상의 정의에 대해서는 Thomas Keating, Intimacy with God (New York: The Crossroad, 1996), 40-41을 보라.
7) 밀힐(Mill HilI)의 성요셉 선교회(보통 󰡔밀힐 선교회󰡕라고 부름) 소속 신부로 1957년에 사제로 서품된 후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Cambridge university)에서 수학했고 스코틀랜드에 있는 밀힐 선교회 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1963년 인도의 카슈미르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일생을 무슬림(이슬람교 신자들)을 위해서 일하였는데, 바라물라(Baramulla)에 있는 밀힐 선교회 고등학교에서 수년간 가르치다가 이 밀힐 고등학교를 카푸친 수도회에 넘겨 준 후, 인도 전국을 통해서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피정을 지도해 주며 지금 몇 년째 카슈미르 계곡(Kashmir Vally)에서 사목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다음 각주에 언급된 그의 저서 저자 소개 참조).

8) Jim Borst, ed., A Method of Contemplative Prayer, 박금옥 역, 『관상기도를 하는 방법』(서울: 성바오로, 2004), 인터넷판 파일, 6, 강조점은 필자가 강조를 위해 덧붙인 것임 available at: http://www.inbora.com/gnuboard/bbs/board.php?bo_table=board13&wr_id=285&page=37. 이에 붙인 각주 15에서는 르네 봐욤 신부(Fr. Rene Voillaume)는 이 기도를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이라고 묘사했다고 한다. 또한 다음 말도 참조하라고 한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본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본다. 우리의 사랑은 '봄으로써' 살찌고 불타오른다"(Vitalis Lehodey, The Ways of Mental Power [Dublin: H. G. Gill, 1960], pt. II. ch. ix, par. 2). 그리고 "관상기도는 아주 단순하고 고도로 애정적인 직관을 통해 하나님께로 영혼을 들어 올리는 것"이라고 말한 레르카로 추기경(Cardinal Lercaro, Methods of Menual Prayer [London, Bums & Oates, 1957], Ch. 14)의 정의도 참조하라고 한다.
오방식도 이와 비슷하게 묵상과 관상을 구별하여 제시한다. Cf. 오방식, "관상 기도의 현대적 이해", 제 5 장: “묵상과 관상, 그리고 관상 기도” 부분을 보라. 그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 이해에서 묵상은 능동적 기도이며, 관상은 수동적 차원의 기도 또는 수동적 차원의 영적 상태를 말한다.” 그는 커닝햄과 이간의 비슷한 말을 소개하는 바, 묵상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일깨워주는 반추적 기도요, 기도자로 하여금 관상의 선물을 받을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도”인데, 비해서 관상은 “하나님의 임재의 선물로 주어지는 변화시키는 경험”이라고 한다(Lawrence S. Cunningham and Keith J. Egan, Christian Spirituality: Themes from the Tradition [New York: Paulist Press, 1996], 84, 오방식, "관상 기도의 현대적 이해", 각주 41에서 재인용).

9) 사실 이와 비슷한 표현은 십자가의 요한이 처음으로 사용했던 표현이다. Cf. John of the Cross, The Ascent of Mount Carmel (BiblioLife, 2009), 125: "The difference between these two conditions of the soul [discursive meditation and contemplation] is like the difference between working, and enjoyment of the fruit of our work; between receiving a gift, and profiting by it; between the toil of travelling and the rest of our journey's end."
10) 권명수, “관상 기도의 의식의 흐름과 치유”, II. 관상 기도 앞부분.
11)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2724: "Contemplative prayer is the simple expression of the mystery of prayer. It is a gaze of faith fixed on Jesus, an attentiveness to the Word of God, a silent love. It achieves real union with the prayer of Christ to the extent that it makes us share in his mystery"(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9N.HTM).
12) 권명수, “관상 기도의 의식의 흐름과 치유”, II. 관상 기도 부분.
13) 이에 대해서는 권명수, “관상기도의 이해와 실천”, accessed on 29th March, 2010, available at: http://www.hnymca.or.kr/ie/read.cgi?board=Cel_young&y_number=29&nnew=1.
14) 이는 클르프턴 월터즈가 자신이 번역한 현대 영어판 The Cloud of Unknowing (Penguin Books, 1961), 36)의 서문에서 한 말이다.

15) 비슷한 논의로 Ernst E. Larkin, "Today's Comtemplative Prayer Forms: Are They Contemplation?" Review for Religious (1998): 77-87, at 78. 그러나 그는 관상과 관상 기도를 너무 명확히 구별하려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한다. 그 둘을 너무나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6) William Shanon,『깨달음의 기도』 (서울: 은성출판사, 2002), 특히 51-57을 보라.
17) M. Basil Pannington, Centering Prayer: Renewing an Ancient Christian Prayer Form (New York: Image Books, 1982).
18) 엄무광, 󰡔관상기도의 이해와 실제』 (서울 : 성바오로, 2002), 이 책을 재편집한 편집물을 다음에서 찾을 수 있다: http://www.inbora.com/gnuboard/bbs/board.php?bo_table=board13&wr_id=280&page=37, 이 문서의 20f.에서 인용한 것이다.
19) 권명수, “관상기도의 이해와 실천”,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 오방식 교수도 “센터링 침묵 기도는 관상의 문턱에 있는 기도”라고 한다(오방식, "관상 기도의 현대적 이해", 각주 33 바로 위 문단).
20) 귀고 2세, “수도승의 다리”(The Ladder of Monks), 허성준,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왜관: 분도출판사, 2003), 197.
21) Borst, ed.,『관상기도를 하는 방법』, 인터넷판 파일, 18.
22) 권명수, “관상기도의 이해와 실천”. 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진술은 Th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The Contemplative Dimension of the Gospel (New York: Amity House, 1986)이다. 키팅에 책에 근거한 자세한 소개로 유해룡, 󰡔하나님 체험과 영성수련』, 259-60을 보라. 더 간단한 제시로는 M. Basil Pennington, "Centering Prayer: Refining the Rules," Review for Religious 46:3 (1986): 386-393을 보라.

23) 권명수, “관상 기도의 성서적 이해와 실천” (2007년 7월호), 37, http://lw.kehc.org/files/2007/200707/htm/032.pdf. 향심 기도 수련 제시의 한 예로 엄무광, 󰡔향심 기도』 (서울:성바오로, 1998); 이세영, 󰡔향심 기도 수련』 (왜관: 분도출판사, 2008)을 보라.
24) 권명수, “관상기도: 깊은 사귐의 기도”, 10. 관상 기도의 몸가짐 부분, available at: http://cyw.pe.kr/xe/?mid=a26&category=83188&document_srl=85431.
25) Borst, ed.,『관상기도를 하는 방법』, 인터넷판 파일, 30,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
26) Borst, ed.,『관상기도를 하는 방법』, 인터넷판 파일, 31. 예수 기도는 R. M. French가 러시아어에서부터 번역한 The Way of the Pilgrim (New York: Seabury Press, 1965)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또한 A Monk of the Eastern Church, The Jesus Prayer (New York: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97); Kallistos Ware, The Power Of The Name: The Jesus Prayer in Orthodox Spirituality (Oxford: SLG Press, 2002)도 보라. 이 “예수 기도”에 대한 동감적인 설명은 유해룡, “동방정교회의 관상적 전통과 예수의 기도” 제 5장 “예수 기도”에서 볼 수 있다.
Cf.http://cafe.daum.net/casungbok/LYfW/201?docid=1Bsck|LYfW|201|20101213152841&q=%C0%AF%C7%D8%B7%E6%B1%B3%BC%F6%BF%AC%B1%B8,
27) 박노열, “관상기도의 장단점과 전통”, 한장연 이단대책위원회 제4회 세미나 <장로교 신학적 입장에서 본 관상기도>, 2010년 6월 28일,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15916§ion=sc7.

28) 이들을 중심으로 1983년에 시작된 국제 관상 기도지원단 홈페이지를 참조하라(http://www.contemplativeoutreach.org/site/PageServer). 이 홈페이지에 소개된 이 지원단의 탄생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83년에 키팅 신부는 뉴 멕시코 산 크리스토블의 라마 재단에서 처음으로 향심 기도 집중 피정을 제공했다. 그 피정에 참석한 구스타브 라이닝거는 그 전에 키팅 신부와 에드워드 베드너라는 사람을 만나서 관상 조직망의 출범을 논의한 적이 있었다. 이 모임 이후, 베드너는 자신이 관상 지원단이라고 부른 기금 마련안을 작성하여, 뉴욕에서 향심 기도를 소개하는 본당 프로그램을 시작할 기금을 제공받았다. 이것이 관상 지원단의 향심 기도 프로그램의 시작이자 하나의 기구로서 관상 지원단의 탄생을 알리는 이정표가 되었다.
라마 재단에서 행한 피정의 다른 참석자들도 관상 지원단이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85년에, 그 피정의 참석자 데이비드 프레넷과 메리 므로쪼브스키는 밥 바르텔과 함께, 미국 동부에 크리살리스 하우스라는 생활 공동체를 설립했다. 11년 동안 크리살리스 하우스는 계속해서 향심 기도 연수와 피정을 개최하는 장소로 제공되었다. 관상 지원단의 일을 수행하는 많은 향심 기도 수련자들과 교사들이 크리살리스 하우스에서 훈련받고 영감을 얻었다.
세 수사의 시도는 1986년에 관상 지원단이라는 법인체가 되었고, 첫 이사진이 지명되었다. 초대 회장으로 키팅 신부, 부회장으로 칼 아리코 신부, 재무 담당 구스타브 라이닝거, 그리고 이사로서 메리 므로쪼브스키와 게일 피츠페트릭 호플러가 지명되었다.”

29) 나우윈에 대해서는 필자의 글, “Henri Nouwen, 그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참조하라.
http://blog.daum.net/_blog/BlogTypeMain.do?blogid=02GRV&admin=#ajax_history_19.
30) Julian of Norwich, The Shewings of Julian of Norwich, edited by Georgia Ronan Crampton (Kalamazoo, Mich.: Medieval Institute Publications, 1994).
31) 그녀에 대한 간단한 소개로 다음을 참조하라: http://en.wikipedia.org/wiki/Julian_of_Norwich; http://www.julianofnorwich.org/julian.shtml; http://www.tentmaker.org/biographies/julian.htm.
32) 아빌라의 테레사에 대한 소개로 다음을 보라: http://en.wikipedia.org/wiki/Teresa_of_%C3%81vila.
33) Teresa of Avila, The Way of Perfection, translated and edited by E. Allison Peers (New York: Doubleday, 1991). See also edited and mildly modernized by Henry L. Carrigan, Jr. (Brewster, Mass.: Paraclete Press, 2000).
34) Teresa of Avila, Interior Castle, trans. E. Allison Peers (New York: Image Books, 1989).
35) Cf. Ernest E. Larkin, St. Teresa of Avila and Centering Prayer," Camelite Studies 3 (1984): 191-211; 오방식, "관상 기도의 현대적 이해", 제6장: “아빌라의 테레사와 십자가의 요한”.

36) Cf. http://en.wikipedia.org/wiki/Teresa_of_%C3%81vila.
37) Cf. http://en.wikipedia.org/wiki/John_of_the_Cross.
그 의 영적 지도 개념을 잘 논의한 것으로 다음도 보라: Kevin G. Culligan, "Toward A Model of Spiritual Direction Based on the Writings of St. John of the Cross and Carl R. Rogers" (1979), available at: http://carmelitesofeldridge.org/juan.html.
38) St. John of the Cross, Dark Night of the Soul, ed. and trans. E. Allison Peers (New York: Image Books, 1990).
39) St. John of the Cross, Ascent of Mount Carmel, ed. and trans. E. Allison Peers (New York: Dover, 2008).
40) 오방식, "관상 기도의 현대적 이해", 제 6장: “아빌라의 테레사와 십자가의 요한”. 십자가의 요한의 이 개념을 중심으로 현대적으로 소개한 글로 “가르멜의 산실”, II: 13-15장, “어둔 밤”, I: 9-10장에 대한 정리 글로 “묵상에서 관상으로 옮겨 가는 단계의 특징”, 원문호, 『관상기도, 레노바레의 정체성』, 291-301을 보라.
41) 그의 저서로 우리말로 소개된 책으로는 John Main,『침묵으로 이끄는 말』 (왜관: 분도출판사, 2006)을 보라.
42) 엄무광은 서울대학교에서 심리학으로 석사 학위를 한 후에 미국에 이민하여 현재 국제 관상 지원단의 강사를 하며 여러 책을 보급하고 있다. 그의 책들로 다음을 보라: 󰡔향심기도』(서울: 성바오로 딸, 1997); 『관상기도의 이해와 실제󰡕 (서울: 성바오로, 2002).

43) 한국 관상 기도 지원단 홈페이지 참조(http://www.centeringprayer.or.kr/).
44) 유진 피터슨의 이에 대한 강조는 The Contemplative Pastor: Returning to the Art of Spiritual Direction (Grand Rapids: Eerdmans, 1993)에 잘 나타난 있다. 이는 우리말로 『묵상하는 목회자󰡕, 차성도 역 (서울: 좋은 씨앗, 2008)로 번역 출판되었다. 긍의 렉티오 디비나의 현대적 소개와 적용으로는 이미 유명해진 Eat This Book: A Conversation in the Art of Spiritual Reading, 양혜원 역, 󰡔이 책을 먹으라』(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6)를 들 수 있다.
45) 존 에커만은 소위 영성 지도자요 심리치료사로서 침례교 신학교인 베델 신학교와 콜럼비아 신학교의 영성 형성 프로그램에서 영성 형성(spiritual formation)을 가르쳤다. 한 달에 20여 명의 성직자들에게 영적 지도를 하며 영성 지도자들을 위한 리더십 그룹을 인도하고 있다. (홈페이지 참조: www.johnackerman.org). 그의 저서로 Listening to God이 『들음의 영성󰡕이란 제목으로 번역 소개 되고 있다. 양혜란 옮김 (서울: 포이에마, 2009).
46) Cf. 권명수, “관상기도 무엇이 문제인가?”「월간 목회」 379 (2008년 3월호): 59-63.
47) 서강대학교, 장신대신대원을 마친 후에 미국 Gonzaga 대학교에서 석사와 Fordham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한고 장신의 영성 신학 교수로 있는 유해룡 교수의 입장을 잘 드러낸 󰡔하나님 체험과 영성수련』(서울: 장로교신학대학출판부, 1999)를 보라. 또한 “관상 기도란 무엇인가?”「월간 목회」 379 (2008년 3월호): 53-57도 보라.
48) 박노열 목사는 미국 핸더슨 기독 대학교에서 목회학 박사가 된 목회자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경기노회 풍성한 교회를 시무하면서 재가 수도원인 고려 수도원을 운영하며 관상기도에 심취하여 보급하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고려수도원 홈페이지를 참고하라(http://www.koabbey.com/).

49) 최일도, “관상기도 무엇이 문제인가?”「월간 목회」 379 (2008년 3월호): 65-69.
50) 이를 보도한 기사로는 2011년 1월 10일자(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43721) 보도를 보라. 그는 2009년까지만 해도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관상기도는 침묵 속에서 여유를 찾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관상적 정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무나 꽃을 바라보는 것을 ‘관상’이라고 합니다. 조용히 여유 있게 바라보는 것이 ‘관상’ 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잃어버리고 삽니다. 숨 쉴 시간도 없이, 숨을 느낄 수 있는 여유도 없이 살아갑니다. 관상기도 운동이 한국교회에 필요하다고 느낀 것은 생산과 활동 중심으로 살아 왔기 때문에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성찰할 필요성 때문입니다.”(이는 지구촌 교회 홈페이지에 실린 <뉴스미션>, 2009년 5월 14일에 실린 그의 인터뷰 기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http://www.jiguchon.org/cell/cell_2008/app/cellapp.asp?id=notice&mode=view&idx=29&srhctgr=&srhstr=&ctgrstr=&page=1). 또한 2007년 1월 22일에 있었던 레노바레 코리아의 첫 번째 영성 강좌에서 “비움과 채움의 영성”이라는 강의안 중에 예수 기도와 관상 기도, 그리고 들숨과 날숨 기도로 비움과 채움을 수행한다는 등 관상 기도를 소개한 바 있다. 그 강의안은 원문호,『관상기도, 레노바레의 정체성』이라는 자료집에 수록되어 있다(491-93).
51) 이 체험에 대한 김동학 기자의 동행 취재기를 참조하라: Available at: http://cafe.daum.net/centeringprayer/E3f/137?docid=rzwj|E3f|137|20051226113826&q=%C0%CC%C1%A4%B9%E8%20%BE%BE%C6%B0. 씨튼 수도원의 씨튼 연구원(원장 김승혜 수녀, 서강대 교수)에서는 각 종교의 수행을 비교하는 작업을 하고 8년 동안 이루어진 종교대화 경험을 중심으로 하여 불교, 원불교, 그리스도교, 유교의 시각에서 발표한 글들을 모아 김승혜, 서종범, 전해주, 길희성, 양은용, 이정배, 최일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수행』 (서울: 바오로딸, 2005)를 내었다.

52) 천주교의 마리아 숭배와 관련한 관상 기도에서의 강조로는 다음을 보라: M. Basil Pannington, Mary Today (Image, 1989); 오상선, “관상 기도로서의 묵주 기도”, http://kr.blog.yahoo.com/jh3choi/14490, 제1장: “마리아와 함께 그리스도 관상하기”.
53) 천주교 관상 기도에서 성자들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하는 책으로는 M. Basil Pannington, Through the Year with the Saints (New York: Image Books, 1988)를 보라.
54) 천주교적 관상 기도가 십자가와 형상(形象)을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이에 대한 시사적 언급으로 William Johnston, Mystical Theology (London: Harper Collins, 1995), 134를 보라.
55) 전통적으로 천주교에서 사용해 온 묵주 기도를 관상 기도와 연결시켜 강조하는 것으로 M. Basil Pannington, 20 Mysteries of the Rosary: A Scriptural Journey (Liguori, Mo.: Liguori Publications, 2003); Robert Llewelyn, 『관상에 이르는 묵주기도, 강창헌 옮김』(서울: 바오로딸, 2009); 오상선, “관상 기도로서의 묵주기도”을 보라. 특히 오상선은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크리스천 공동체는 마리아의 기억들과 마리아의 관상적 눈에 참여하게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56) 박노열, “관상기도의 장단점과 전통”.
57) 박노열, “관상기도의 장단점과 전통”.

58) 이런 논의의 대표적인 예로 Margaret A. Feaster, “A Closer Look at Centering Prayer” (San Francisco, CA: Ignatius Press, 2004), http://www.catholicculture.org/culture/library/view.cfm?id=6337을 보라. 또한 Randy England, "The New Age Mystic: Different Path, Same God?" (http://www.ewtn.com/library/NEWAGE/NWMYSTIC.HTM); "Centering Prayer, Catholic Meditation or Occult Meditation?"(http://www.ourladyswarriors.org/dissent/centerprayer.htm); Matthew, "The Errors of Centering Prayer" (May 2007), http://acatholiclife.blogspot.com/2007/05/errors-of-centering-prayer.html. 그는 향심 기도는 뉴에이지적이고, 이교적인 실천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이전에 뉴에이지에 심취했다가 개신교로 개종한 분들도 역시 같은 비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Cf. Marcia Montenegro, “On Contemplating Contemplative Prayer: Is It Really Prayer?" First published in Midwest Christian Outreach Journal (February, 2005), modified version with additional information, available at: http://www.christiananswersforthenewage.org/Articles_ContemplativePrayer1.html.

59) Feaster, “A Closer Look at Centering Prayer.”
60) 우리나라에서 개신교적 입장에서 관상 기도를 비판하시는 분들도 결국은 대개 이와 비슷한 비판을 제시한다. 대표적인 예로 다음을 보라: 원문호,『관상기도, 레노바레의 정체성』(서울: 진리수호, 2010), 73, 533-632; 한돌교회 담임 목사인 임헌원, “관상 기도는 신비주의 자아 최면의 행각”, available at: http://yesu.net/?document_srl=190951&mid=pray1.
61) Finbarr Flanagan, “Centering Prayer Transcendental Meditation for the Christian Market,” Faith and Renewal (May/June, 1991) 2.
62) Cf. Pannington, Daily We Touch Him (Garden City, N.Y.: Doubleday, 1977), 68.
63) 그 대표적인 예로 다음을 보라: The Rev. John D. Dreher, "The Danger of Centering Prayer," http://www.catholic.com/thisrock/1997/9711fea1.asp: “Many people assume centering prayer is compatible with Catholic tradition, but in fact the techniques of centering prayer are neither Christian nor prayer.”
64) Dreher, "The Danger of Centering Prayer": “Centering prayer is essentially a form of self-hypnosis.”
65) 권명수, “관상기도의 이해와 실천”.
66) 권명수, “관상 기도의 성서적 이해와 실천”, 33.
67) 머톤이 동양 종교의 명상 개념과 연관하여 향심 기도와 관상을 생각한다는 지적은 http://en.wikipedia.org/wiki/Centering_prayer에서도 주어지고 있다: “The Trappist monk and influential writer Thomas Merton was strongly influenced by Buddhist meditation, particularly as found in Zen — he was a lifetime friend of Buddhist meditation master and Vietnamese monk and peace activist Thich Nhat Hanh, and was also an acquaintance of the current Dalai Lama.”

68) 권명수, “관상기도: 깊은 사귐의 기도”, 13. 결론 부분, 강조점은 필자가 덧붙인 것임.
69) Robert Baker, Merton and Sufism: The Untold Story (Fons Vitae, 1999), 109.
70) "토마스 머튼의 서구에서의 마지막 날들의 회고", Monastic Studies 7/10 (1969), cited in http://truthnlove.tistory.com/entry/%EA%B4%80%EC%83%81%EA%B8%B0%EB%8F%84%EC%9D%98-%EC%9C%84%ED%97%98-%ED%82%A4%EB%A0%88%EB%84%A4-1#footnote_697_11.
71) Baker, Merton and Sufism, 109.
72) Borst, ed.,『관상기도를 하는 방법』, 인터넷판 파일, 12.
73) Borst, ed.,『관상기도를 하는 방법』, 인터넷판 파일, 15.
74) Borst, ed.,『관상기도를 하는 방법』, 인터넷판 파일, 16.
75) Borst, ed.,『관상기도를 하는 방법』, 인터넷판 파일, 16.
76) Thomas Keating, "신적 요법으로서의 향심기도" 트리니트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 삼 역, “관상기도의 위험성”에서 재인용, 강조점은 필자가 덧붙인 것임.
77) 키팅이 인도하는 세미나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 다음을 보라: Marcia Montenegro, “Lecture and Meditation Session Led by Thomas Keating," Session Held on May 22, 2005, The Falls Church, Falls Church, VA, available at: http://www.christiananswersforthenewage.org/Articles_KeatingLecture.html.
78) 이에 대한 정보는 The Rev. John D. Dreher, "The Danger of Centering Prayer," http://www.catholic.com/thisrock/1997/9711fea1.asp에서 얻었다. 또한 다음 도 보라: http://www.saint-mike.org/Library/Occult/CenteringPrayer.html.

79) 그 내용을 한국 관상기도지원단의 최근호에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라. Thomas Keating, “궁극적 신비를 찾는 사람들", 「한국관상지원단 소식지」 9호 (2011년 상반기): 1-5.
80) Ken Blachard, "Preface," to Franz Metcalf & Gallagher Hateley, What Would Buddha do at Work?' (Ulysses Press, 2001).
81) Ken Blanchard & Phil Hodges, Lead Like Jesus: Lessons from the Greatest Leadership Role Model of All Time (Thomas Nelson, 2008).
82) Ken Blanchard, Servant Leader (Thomas Nelson, 2003).
83) Jim Ballard, Little Wave and Old Swell: A Fable of Life and Its Passing (Atria Books/Beyond Words, 2007).
84) M. Basil Pannington, Centered Living: The Way of Centering Prayer (Liguori, Mo.: Liguori Publications, 1999), 104.
85) 패닝턴의 이런 경향을 잘 비판한 천주교 문서로 John D. Dreher, "The Danger of Centering Prayer"(http://www.catholic.com/thisrock/1997/9711fea1.asp)를 보라.
86) Henri J. M. Nouwen, Sabbatical Journey: The Diary of His Final Year (New York: Crossroad Pub., 1998), 51.
87) 남경욱, “깊이 없이 믿는 자가 다른 종교 배척: 종교간 대화 10년 김승혜 씨튼연구원장”,「한국일보」, 2003년 10월 30일(http://news.hankooki.com/lpage/life/200310 /h2003103017282323400.htm).

88) 이를 천주교에서는 은총의 주부(注賦)라고 번역한다.
89) 이 점에 대한 간략하나 핵심적인 논박으로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2) 해당 부분을 보라.
90) 이런 은총의 주부에 의한 관상을 ‘주부적 관상’이라고 한다. 엄두섭, 오방식 등 개신교 소개자들도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성향이 있다. Cf. 엄두섭, “주부적 관상 기도”, 「한계레」 (http://blog.naver.com/peacebel/60002010395); 오방식, "관상 기도의 현대적 이해", 제 4 장: “주부적 관상과 관상 기도”.
91) Thomas Merton, What is Contemplation? (Springfield, IL: Templegate Publishers, 1950), 36.
92) Borst, ed.,『관상기도를 하는 방법』, 인터넷판 파일, 21.
93) 이 점을 잘 드러내고 지적한 논의로 F. C. Happold, Mysticism: A Study and An Anthology (Baltimore: Penguin Books, 1964), 73을 보라.
94) 오방식, "관상 기도의 현대적 이해", 나가는 말 마지막 부분.
95) Teresa of Avila, Interior Castle, 214.
96) Teresa of Avila, Interior Castle, 104.
97) 관상 기도를 강조하는 거의 모든 분들이 이를 말하나 이는 “영적 여정의 배경”이라는 이건종 목사의 강의안에서 인용하였다 (그런데 이 강의안은 여러 사람의 것을 발췌한 것으로 보인다), available at: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502.
98) 시편 46:10에 대한 관상 기도자들의 주장을 논박하고 문맥적 의미를 드러낸 논의의 예로 다음 글을 보라: http://www.christiananswersforthenewage.org/Articles_MeditationPsalm.html.
99) 오방식, "관상 기도의 현대적 이해", 「장신논단」 30 (2007): 271-310, 인용은 각 주 11에서 온 것임. 그런데 이런 바른 지적을 하고서는 오방식 교수는 다시 “그러나 관상이라는 용어가 없다고 관상 자체를 부인하는 것도 잘못이다”고 하면서 천주교 영성 사전의 “contemplation" 항목을 쓴 William Shanon을 따라서 요한복음 14장-17장,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 ‘그리스도의 몸’ 등의 표현을 이와 연관시키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오방식 교수가 처음 했던 말에 충실 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100) 성도들의 이런 바른 태도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우리 시대에 설교와 종교적 강의를 듣고 보는 성도들의 자세에 대하여: 책임 있는 설교 듣기를 위한 제언”, 『기독교 세계관으로 바라보는 21세기 한극 사회와 교회』(서울: SFC, 2005), 27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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