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 부자의 품격

최주호/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1/10/26 [10:41]
 ©최주호    

 

어느 날 한 카톨릭 신자를 전도했다. 그에게 천국에 갈 수 있는가?라고 물었더니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예스(YES)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교회는 정기적으로 출석하는가 물었더니 곰곰히 생각하다가 일 년에 한두번 참석한다고 했다. 부활절이나 지인의 결혼식에 간다는 것인데 그래서 성경은 읽은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더니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삶을 살면서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드는가라고 물었더니 그 친구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나는 카톨릭 신자이기에 천국에 갈 수 있다.”

 

나는 성경 말씀이 곧 바로 머리에 떠올랐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아니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비단 그 카톨릭 신자만 그럴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우리 개신교도들 중에서도 이런 뻔뻔스러운 마인드(?)로 무장하고 천국 티켓을 땃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보고 싶은 인물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등장하는 그 부자다.

 

나는 그 부자가 좀 전에 말했던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부자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가 신앙인이라는 타이틀은 갖고 있었지만 삶이 그 타이틀을 받쳐주지 못했다는 것과 그 신앙인의 삶은 신앙인답게 만드는 것이 바로 말씀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신앙인의 삶은 앎보다 중요하다

 

부자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를 보면서 부탁하는 장면을 보면 그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부른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이 말은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유대인은 자기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따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은 유대인의 유익에 대해서 말할 때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율법, 성전, 조상들이 있었고 그 모든 신앙 전통이 그들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를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부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난 지금까지 그 좋은 것(?)이 이 땅에서 안락한 생활과 부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처음으로 그 좋은 것이 유대인됨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유대인으로서의 그 놀라운 특권과 더불어 물질적인 복을 받은 사람이 부자였다.

 

실은 예수님 당시에는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개는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아서 부자가 되는 것이다. 잠언서에서 언급한 것처럼 집과 재산은 조상에게서 물려받는다고 했으니 내가 원해서 그 집안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유대인으로 그리고 부자의 집안에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에게 요구되는 크리스찬 부자로서의 품격이 있어야 하는데 그의 삶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19절)

 

그가 자색옷과 베옷 같은 명품옷을 걸치는 것이 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는 표식이니 부자가 그런 옷을 입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날마다 잔치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왕 외에는 없는데 그는 지금 왕처럼 삶을 살았다는 말이다. 그가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보여주는 일면이다. 바울은 품격있는 부자의 삶에 대해 이렇게 조언한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제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7-19)

 

재물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그 재물을 통해서 이웃을 돕는 일을 하라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이 주신 물질은 은사와 같아서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쓰임받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이 부자는 전혀 그런 품격 있는 부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신앙인에게 말씀은 기적보다 중요하다

 

이미 불구덩이 가운데서 신음하는 부자는 이미 자신은 실패했다고 받아들여도 아직 그곳에 오지 않은 지상에 남아 있는 자기의 형제들은 그곳에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마치 부모는 힘들게 수고하면서 살았어도 자식에게만큼은 좋은 환경을 주고 싶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는 아브라함에게 부탁해서 나사로를 다시 살려 보내주신다면 그의 말을 듣고 형제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라는 단어의 의미는 그들이 자기처럼 살던 삶의 방식을 바꾸어 품격있는 부자의 삶으로 바뀔 것이라는 생각인데 아브라함의 대답은 단호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31)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해서 말할 때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이방인은 지혜를 구한다고 말한다.

 

맞다. 유대인은 언제나 표적을 구한다. 문제는 이러한 표적이 그들을 진정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 많은 표적을 보여 주었어도 악한 유대인들은 자기의 욕심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받아야만 그들의 직성이 풀렸다.

 

출애굽의 사건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많은 기적과 이사를 보았어도 이스라엘은 문제를 만날 때마다 불평하고 원망하여 결국 광야에서 멸망하는 세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진실하게 말씀에 대해서 숙고해 볼 시간이다. 아브라함이 말하고 있는 그 말씀은 정말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는가?

 

토저 목사님의 말은 이 문제에 대해 깊은 성찰을 제공한다. “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힘들이지 않고 더 깊은 영적 생활을 할 수 있는 쉽고 간단한 가르침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했다.

 

그러나 헛된 바람일 뿐이다. 지름길은 없다. 우리가 영적 경험을 거의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도에서 가만히 서서 참된 가치를 배우지 않고 시장에서 노는 아이들처럼 오만하게 잡담을 하면서 복도를 뛰어다니는 버릇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려면 일단 멈추어 서야 하고 그 다음에는 말씀과의 독대를 해야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 힘들다는 핑계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그 시간을 채운다.

 

난 아직도 매일 성경을 하면 그 집사님의 매일 성경 책을 떠올린다. 지방에서 장사하는 그 집사님은 아침에 가게에 가서 문을 열면 손님이 오지 않는 경우라면 오전 내내 말씀을 묵상한다. 난 그분의 매일 성경책처럼 빽빽이 이런저런 말들이 채워진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분에게 매일 성경의 말씀은 마치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와 같았다.

 

어느 날 그분이 매일 성경을 묵상하고 있는데 중국 교포가 자신의 가게로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어떻게 그곳에 왔는지를 물으니 원양 어업을 나갔던 오징어 배가 조업을 마치고 돌아와 집사님의 가게 근처 항구에서 정박 중에 있다는 것이다.

 

집사님의 연락을 받고 우리는 그곳에 가서 원양 어업하는 오징어 배 선원들을 선교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버스를 보내서 그분들을 모셔와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리기도 했고 때로는 성도들이 그곳으로 가서 그분들과 함께 축구를 하면서 행복한 교제의 시간을 나누기도 했다.

 

물론 그 선원들 중에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숫자가 꽤 되었다. 난 지금도 매일 성경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이제는 소천하셔서 하나님 품에 계신 그 집사님의 매일 성경 책이 생각나고 그 집사님을 통해서 시작했던 오징어 어선 선원들의 선교가 생각난다.

 

난 그 사람이 부자이건 가난하건 그것이 문제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니 가급적이면 내 목회지의 성도들은 모두 부자였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대신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분들의 마음에 내세에 대한 확신과 말씀에 대한 헌신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주님의 그 심판대 앞에서 착한 종이라는 칭찬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사진은 바닷가의 한 카페에 있는 함께 산책 나온 애완견을 위한 메뉴다. 신앙인에게는 신앙인의 품격이 있다면 애완견을 키우는 견주에게는 이런 견주의 품격을 요구하기도 한다.〠

 

최주호|멜번순복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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