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원성희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 손자 원일한 박사의 부인
1960~2004년까지 한국에서 44년간 교육(음악) 선교

글/김기윤 사진/박태연 | 입력 : 2022/11/28 [14:43]
▲ 지난 10월 1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원성희 선교사. 이 사진은 호주 선교사 합동 팔순 잔치에서 인사하는 원성희 선교사(2013. 9.17)     © 크리스찬리뷰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인 H. G. 언더우드 목사의 손자 며느리이자 호주 선교사로 한국에서 사역한 원성희(Dorothy Constance Watson Underwood, 1933-2022) 선교사가 지난 10월 12일 향년 89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원 선교사는 호주장로교단(1977년 이후 호주연합교회) 선교사로 1960년 파송되어 한국에서 무려 44년간 평신도 선교사로 일했다.

 

원성희 선교사의 장례예배는 10월 25일(화) 오전 11시, 멜번 브라이튼에 위치한 ‘트리니티연합교회’에서 김기윤 목사의 집례로 150여 명의 조문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열렸다. 고인은 트리니티연합교회의 리더 중 한 명이며, 오랜 기간 동안 성가대 지휘자로 섬겨 왔다.

 

▲ 원성희 선교사가 아끼던 수묵 일러스트 ‘매화’ 그림이 그려진 부채가 원 선교사의 관 위에 놓여있다.     © 크리스찬리뷰

 

11년째 호주인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필자는 “수많은 장례식에 참석하거나 집례해 보았지만 이날의 장례예배는 그 어떤 때보다도 의미있고 개인적으로는 영광스런 예식이 아닐 수 없었으며, 고인께서는 1885년 조선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러 내한한 첫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의 손부(孫婦/손주 며느리)였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녀의 한국 이름인 ‘원성희’는 시조부 언더우드 목사의 한국명 ‘원두우’의 성을 따라 지은 것이다.)

 

호주 빅토리아주 질롱(Geelong)에서 장로교 가정의 3남 2녀중 셋째로 태어난 그녀는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마음으로 27세가 되던 1960년부터 호주장로교단의 파송을 받아 한국으로 건너가 부산과 서울 등지에서 학생들, 특히 여성들을 교육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앞장섰다.

 

▲ 멜번딥딘연합교회에서 열린 호주 선교사 합동 팔순 잔치에서 동료 선교사들과 축하 케익을 자르는 원성희 선교사(왼쪽 3번째, 2013. 9.17)     © 크리스찬리뷰

 

▲ 일신기독병원을 설립한 매혜란(Helen Mackenzie) 선교사의 장례예배에서 조가를 부른 원성희 선교사(2009. 10.9)     © 크리스찬리뷰


원 선교사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음악(성악) 교육을 통해 많은 이들을 만났고, 더욱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하여 1971년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화여대 역사상 처음으로 백인 졸업생이 된 것이다. 이후 미국 프린스톤의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음악 석사 과정을 마친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와 1998년 은퇴할 때까지 이화여대 종교음악과 교수로 지냈다.

 

원 선교사는 시조부가 세운 한국의 첫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에서 권사 회장을 지내면서 교회음악교육원 초대원장으로 섬기기도 했다. 2002년에는 서울특별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되었으며, 2004년에 사랑하는 남편과 사별한 후 고국인 호주로 돌아와 동생이 살고 있는 멜번의 바닷가에 위치한 브라이튼(Brighton) 지역에 정착하고 트리니티연합교회에 출석헸는데, 지난 18년 동안 왕성한 활동으로 교회를 섬겨왔다.

 

2017년 2월 트리니티 교회에 부임하기 전 인터뷰를 위해 브라이튼을 찾았던 필자를 처음 맞아 준 분도 다름 아닌 원 선교사였다. 인상 좋으신 백인 할머니 한 분이 건물 입구에서 나를 향해 공손히 인사하며 “어서 오십시오. 우리 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한국말로 인사하는 이분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한국 출신의 목사가 지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기대를 했고, 다른 교인들에게 한국 목사가 부임하면 어떤 면이 좋은지 자랑도 많이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1853년에 세워져 역사가 깊은 이 교회에 첫 이민자 목사로 부임한 나는 원 선교사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6년째 행복한 사역을 해왔다. 음악을 전공하지 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노래를 사랑하고 찬양 사역을 오랫 동안 해왔는데, 한국이라는 공통의 관심사 때문에 원성희 선교사와 대화도 잘 통했다. 그렇게 친구처럼, 어머니와 아들처럼 지냈던 원 선교사와 나는 그녀가 오래오래 건강히 지내기를 바랐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만 90세 생신을 석 달 앞두고 이 땅에서의 여정을 마감하고 하늘 아버지께 돌아 갔다.

 

슬하에 친자녀가 없었던 원 선교사는 자칫 외로울 수 있는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적극성으로 교우들은 물론이고 친구와 이웃들과 많은 교류를 해왔고, 한국을 떠난지 18년이나 되었음에도 한국에 있는 지인들은 물론 이화여대에서 가르쳤던 제자들과도 연락을 계속 이어왔다.

 

많은 사람들에게 늘 친절히 사랑을 베플었던 원성희 선교사는 노환으로 더 이상 거동을 할 수 없어 약 2개월간 병원과 양로원에서 지냈다.

 

▲ 트리니티연합교회 성가대가 원성희 선교사의 장례예배에서 조가로 시편 23편 찬송을 부르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나는 목회자로서 심방 밖에 달리 할 길이 없어 2개월 동안 2-3일에 한 번씩 틈틈이 찾아 뵙고 기도해 드리고 찬양을 불러 드렸다. 돌아가시던 날 오전, 우리 교회 교우인 친동생과 함께 마지막 심방을 하고 임종 기도를 드린 후 한국말로 ‘하늘 가는 밝은 길이’를 불러 드렸다. 89년 9개월간 이 땅에 살았던 고인께서 본향으로 떠나는 길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유족의 요청에 따라 장례예배 때도 이 찬양을 불렀다.

 

우리 교회 반주자인 고든 앳킨슨(Gordon Atkinson) 박사의 잔잔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로 시작된 장례예배는 멜본한인교회 정승영 장로(전 멜번관현악단 단원)의 고즈넉한 바이올린 및 비올라 연주로 이어졌다. 정 장로는 아리랑을 비롯해 한국인의 정서가 녹아 있는 주옥 같은 연주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 중간 작은 사진들은 원성희 선교사 장례예배 장면.. 아래 왼쪽은 매혜란 선교사 안장식에 참석한 원성희 선교사(2010. 3.11) 오른쪽은 본지가 멜번에서 개최한 헤브론병원 24시 사진전을 관람하는 원성희 선교사(2017. 4.8)     © 크리스찬리뷰

 

호주는 물론이고 멀리 한국과 중동에서 찾아 온 유가족들은 조사(弔辭)를 통해 고인과의 기억을 나누었고, 본 교회 교인들은 생전에 고인이 즐겨 불렀던 ‘시편 23편’을 찬양했다. 화장된 고인의 유해는 고인의 유지에 따라 유가족의 품에 안겨 한국으로 송환되었고, 12월 초 서울에서 이화여대, 연세대, 새문안교회 공동 주관으로 열리는 추모예배 후 남편 곁에 묻힐 예정이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림으로 귀한 삶을 살았고,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하여 삶의 절반을 그곳에서 보냈던 원성희 선교사, 그런 존귀한 분을 부족한 내가 목회자로 곁에서 지낼 수 있게 한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보여 준 섬김의 도를 늘 마음에 새겨 잊지 않고 목회할 것을 다짐한다.

 

아울러 이번 장례예식을 위해 여러 모로 섬기고 기도로 동참해 준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 그중에서 60년 지기 친구를 누구보다 아끼고 예배 중에 조사해 준 민보은 선교사(Dr. Barbara Martin), 멀리 캔버라에서 참석해서 기도해 준 변조은 목사(Rev. Dr. John Brown), 축도로 예배를 마무리해 준 우택인 목사(Rev. Richard Wootton)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먼저 떠난 원성희 선교사께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을 줄 믿는다. 언젠가 하나님 나라에서 원 선교사와 기쁜 찬양을 함께 드릴 것을 믿고 기대한다.〠

 

<원성희 선교사 장례예배 영상 링크>

www.belindajanevideo.com/client-video/dorothy-underwood (접속번호 : Underwood)

 

김기윤|멜번 트리니티연합교회 담임목사

박태연l본지 멜번주재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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