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스구떼(ALLES GUTE)는 독일어로 ‘모든 것이 좋다’, ‘모든 것이 잘된다’는 의미이다. All the best! ‘행운을 빈다’의 의미도 있다.
‘모든 것이 좋습니다’, ‘행운을 빌어요’라는 ‘알레스구떼’ 베이커리는 최근 한국에서 인기가 높아지며 여러 곳에 지점 베이커리들이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이 ‘알레스구떼’ 빵집을 부인을 위해 처음 하남시에 개점해 준 인물이자 (주)베이크 플러스 유통회사 대표이사였던 김웅일 사장을 체스우드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그는 최근 (주)베이크플러스 회사 지분 80%를 프랑스 유제품 가공회사 사벤시아(Savencia Fromage & Dairy International)에 240억 원에 매각하고 50년 동안 몸담은 제빵/유통 업계에서 은퇴했다.
한국 최초의 제빵 기술학교
그는 서울 상도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때까지는 제법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빚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하루 아침에 집안이 기울어졌다. 집안이 어려워지자 그의 집은 경기도 파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똑똑했던 그는 파주에 있는 문산중학교에 입학하였고(당시는 중학교도 시험을 쳐서 진학하던 시기였다) 명문 문산중학교에서 매해 전교 5등을 유지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을 해야 하는데 어려운 형편에 등록금을 낼 형편이 안 되었다.
5남매의 장남이었던 그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무슨 직업을 구해 살아야 하나? 하다가 우연히 신문 광고를 보고 한국 제과학교에 입학했다.
“집안이 기울자 지금은 몇 푼 안되지만 고등학교 등록금이 없어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무슨 직업을 구해야 하나 하다가 우연히 신문광고를 보게 된 겁니다.
제가 먹는 것도 좋아하고, 빵이라도 실컷 먹을 수 있겠다 하는 생각에서 제과 학교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제가 1기로 들어갔는데, 한국 최초의 제과학교가 그때 막 영등포에 생긴 거에요. 학교의 등록금은 있었지만 미국 소맥협회와 한국제과협회에서 지원을 해줘서 50명 전교 학생들이 전액 장학금을 받고 무료로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당시 돈이 없었던 제가 다니기 딱 좋은 학교였죠.”
등록금이 없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한국 최초의 제과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준 계기가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오늘의 그를 있게 해준 하늘의 섭리라고 할 수 있다.
풍년제과에서 김충복 선생을 만나다
그는 한국제과학교에서 1년 과정의 공부를 마친 후 16세 때 서울 중구 다동에 있는 풍년제과에 견습생으로 취직했다. 거기서 그는 한국 제빵계의 전설과도 같은 인물인 김충복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제가 한국제과학교를 졸업한 후, 당시 제과로 유명한 풍년제과에 견습생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풍년제과에 한국에서 최고로 치는 기술자가 공장장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바로 김충복 선생님입니다.
현재 한국의 제과업계에서 내노라 하는 사람들은 바로 다 김충복 선생님의 제자들과 그분들의 2대 제자들입니다. 저도 운좋게 김충복 선생님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풍년제과에서 3년 반 동안 일을 하면서 제과, 제빵의 기술을 확장할 수 있었다. 특히 제과 제빵계의 전설과도 같은 김충복을 만나게 된 것은 천우신조의 기회였다.
막내였기 때문에 그는 김충복 선생에게 직접적으로 많은 것을 배울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눈썰미와 머리가 좋았던 그는 김충복 선생을 통해 제빵에 대한 많은 식견을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그는 한국제과학교에서 이론과 실습을 통해 튼튼한 기초를 세운 상태에서 풍년제과에 들어갔기 때문에 남들보다 빨리 전문 기술인이 될 수 있었다.
그전에는 과자 만드는 기술이나 빵 만드는 기술은 다 도제 시스템이었다. 지금처럼 레시피나 유투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깨 너머 배우거나 업계 나름의 힘든 고생의 관문을 거쳐 배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한국 최초의 제과학교에서 이론공부와 실습들을 거쳤기 때문에 제과학교를 나오지 못한 제빵사들이 몇 년에 걸쳐 배워야 할 것을 그는 단기간에, 그것도 튼실한 이론과 실습을 겸해 배우게 된 것이 그에게는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준비된 자에게 오는 기회
풍년제과를 나온 후 그는 태극당에서 1년 정도 일을 하다가 군대에 입대했다. 군대에서도 그는 제대 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제과 제빵 이론들을 틈틈이 더 공부했다.
“제가 군대에 갔기 때문에 군대 안간 친구들보다 기술적인 면에서 3년 더 뒤쳐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실습은 할 수 없으니까 이론이라도 공부해야겠다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래야만 제대한 후 나중에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제대하고 사회에 나오니 그때 막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제과 제빵사 기능인 제도가 생긴 거예요. 제과 제빵 2급 기능인, 제과 제빵 1급 기능인이 있는데 제가 1급 기능인 시험을 쳐서 단번에 붙었습니다. 군대에서 나름 열심히 공부한 것이 도움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태극당에 다시 복직했다. 태극당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가운데 하늘이 주는 두 번째 기회를 얻게 되었다. 고려대학교 식품공학과 식품 가공실험실 실험기사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바로 고려대학교 식품공학과 식품 가공실험실에 제과 제빵 분야 실험기사를 찾았는데 마침 그가 이론과 실기가 다 준비된 사람일 뿐 아니라 제과 제빵 1급 기능인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실험기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침 고력대학교 식품공학과 가공실험실에서 제빵분야의 실험기사를 찾고 있었는데 제가 딱 조건에 맞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당시 제빵 기술자들은 많이 있었지만 저처럼 이론을 정식으로 공부한 사람이 거의 없었고, 저는 이론뿐만 아니라 실습과 실기의 경험까지 풍부할 뿐 아니라, 제과 제빵 1급 기능인 자격증까지 있었으니 딱 조건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서 한 7년 정도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 들어갈 때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준다고 해서 들어갔는데 그런데 막상 약속이 잘 안 지켜지는 거예요. 그래서 제 부서 선임교수들이 바뀔 때마다 클레임을 했습니다.
마침 저의 부서에 선임인 이철우 교수님이 계셨는데 호주 소맥협회와 공동 프로젝트로 호주밀로 빵연구를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때가 1985년이었는데 당시 한국은 100% 미국밀을 수입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호주 밀을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서는 호주밀을 알아야 하잖아요. 제가 마침 제빵 실험기사였기 때문에, 저보고 호주밀을 배워 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호주밀을 배우기 위해 호주 소맥협회의 초청을 받아 호주로 연수를 오게 된 것입니다.”
호주와의 인연
그는 호주 소맥협회 초청을 받아 CSIRO(Commonwealth Scientific and Industrial Research Organisation, 호주 연방 과학 및 산업연구 기관)의 노스 라이드 지점에 와서 6주간 연수를 받게 되었다. 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지만 드넓은 땅, 좋은 공기와 천혜의 자연환경, 시드니의 아름다운 바다 등 호주에 대한 좋은 인상이 그의 머리에 떠나지 않았다.
그해 12월 결혼을 하고 호주를 잊지 못하고 지내던 중 1987년 반가운 뉴스를 접하게 된다.
“제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해 12월에 아내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호주를 잊지 못했지만 결혼도 했고 해서 여전히 고려대학 식품공학 가공실험식에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1987년에 호주의 이민문호가 많이 개방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3월인가 바로 이민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돈도 없을 때고 영어도 못할 때였지만 호주의 SCIRO에서 연수한 것이 작용했는지 그해 9월에 바로 비자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바로 짐 싸들고 11월 1일 호주로 다시 온 것입니다. 그리고 도착하자 마자 일주일 후에 바로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그곳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고 왔는데 체스우드 웨스트필드 안에 있는 혼스트라(Hornstra)라는 베이커리입니다.
그 베이커리는 벌써 오래 전에 문을 닫고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고 지금은 완전 다른 종류의 매장이 들어왔어요. 그때가 막 체스우드 웨스트필드가 세워져 얼마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베이커리에서 한달 만에 쫓겨났다. “베이커리가 잘 안되니까, 사장이 구조조정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저를 자른 이유가 뭔가 했더니 제가 생산성이 낮다는 거예요.
그때 제가 거기 있는 직원 가운데 케익을 제일 잘 만들었어요. 그런데 거기는 예쁘게 잘 만드는 것보다 많이 만드는 사람이 더 필요했던 거에요. 어쨌든 그렇게 거기서 잘리고 일주일 퇴직수당을 받고 다른 곳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본다이에 있는 헝가리계 유대인이 운영하는 케익 베이커리에 다시 취직을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오는 주급 가지고는 집세 내랴,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퇴근 후에 일할 곳을 더 찾게 되었다.
소위 투잡을 뛰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노스 브리지의 한 베이커리가 매물로 나왔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그는 이민온지 6개월 만에 돈도 없이 그 베이커리를 사겠다고 달려들었다.
고베 베이커리
“소문만 듣고 노스 브릿지에 있는 베이커리를 찾아갔습니다. 이름이 고베 베이커리였는데 사장이 일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돈도 없었는데 뭔 배짱이었는지 사장한테 베이커리를 저한테 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장이 저보고 어느 나라 사람이냐? 묻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사람이라고 하니까 안 판다는 거예요. 왜 나한테 안 파냐고 하니까? 그냥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팔라고 열 번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불도저같이 밀어 부치는 패기가 있었다. 열 번을 찾아가도 못판다고 하니까, 새벽에 그 베이커리 공장에 들어가서 막무가내로 빵 만드는 일을 무보수로 했습니다.
나중에 그가 만든 빵으로 베이커리의 매상이 올라가니 일본 사장이 동업을 하자고 제안해 왔다. 그러나 그는 자기는 동업은 싫고 무조건 팔라고 했다. 많은 우여곡절의 이야기가 있지만 생략하고 그는 결국 고베 베이커리를 수중에 돈이 없었지만, 돈을 빌려 결국 인수하게 되었다.
“고베 베이커리를 돈 없이 인수했는데 장사가 너무 잘되어 빌린 돈도 일 년만에 다 갚고 매출이 엄청 올랐습니다. 그 후 야마자키라고 하는 일본 기업이 웃돈 주고 팔라고 하는데도 제가 팔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과 공동으로 베이커리 지분이 있는 것을 아니까, 그 사람 몰래 저에게 만 불을 더주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야마자키 호주 지사장 자리까지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만 불을 공동 투자자 몰래 뒷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듣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그런 뒷돈 안 받는다. 이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실은 제가 갈등도 했었습니다. 제가 받아야만 하는 제안이었어요. 호주 지사장 자리에 제가 산 가격의 더블을 쳐주고 저에게는 따로 만 불이나 더 얹어 주겠다는데 싫다고 할 이유가 없죠. 그런데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백이 있었다. 어쩌면 그의 이런 기백이 오늘의 그를 있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유니레버를 만나다
그의 고베 베이커리는 순풍 만난 듯 잘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의 어느 잡지를 보았는데 다국적 기업 유니레버에서 한국에 진출하려고 하는데 식품, 아이스크림, 제빵분야의 전문 기술자를 찾는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잡지사 사장을 잘 알고 있어서 잡지사 사장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자리의 조건이 딱 저에게 맞는 자리라며 한 번 지원해 보라는 겁니다. 당시 유니레버는 세계 18위 기업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아덴을 비롯해 폰즈 화장품부터, 우리에게 친숙한 도브 비누, 홍차 브랜드 립톤 등 많은 것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글로벌 소비재 기업입니다.
이 회사가 한국에 식품 및 아이스크림 제조 및 유통분야에 진출하려고 영어가 가능한 이 분야의 기술자를 뽑는 거였습니다.”
그는 유니레버 회장과의 직접 면접을 통과하고 파격적인 조건으로 유니레버 코리아의 한국 직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1991년 당시 한국은 금융실명제가 실행되지 않던 때여서 지하경제로 돈이 많이 유통되던 때였다.
자연히 도매상, 소매상들은 영수증 없이 저렴하게 물건을 구매하기 원했고 외국기업들은 한국 생리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2년 만에 유니레버는 한국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2년 동안 유니레버에서 식자재 유통과 마케팅의 경험을 살려 1994년 베이크플러스를 설립했다.
(주) 베이크플러스
베이크플러스는 제빵 제과와 관련된 식재료 유통회사이다. 그는 베이크플러스를 이용하는 매장에게 신선하고 좋은 재료와 세계의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여 고객을 만족시키고 진정한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돕자는 가치를 걸고 1994년 8월 회사를 창립했다.
맨 처음 회사를 창립할 때는 4명으로 시작해서 그해 10억의 매출을 올렸다. 2023년 현재 베이크플러스 직원은 71명으로 늘었고 매출도 1천400억이나 달성했다.
그가 베이크플러스를 창립했을 때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그는 젊은 나이였지만 과감하게 회사를 창립했다. 그의 기백과 열정,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터득하는 그의 창조적인 두뇌가 오늘의 그를 있게 한 듯 보인다.
그리고 작년에 그는 베이크플러스의 지분 80%를 프랑스 유제품 가공회사 사벤시아 (Savencia Fromage & Dairy International)에 240억 원에 매각하고 은퇴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다 보니 그의 인생에는 늘 행운과 성공만 뒤따랐고 아픔과 좌절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인생에 어찌 인고의 시간과 고난이 없었을 수 있겠는가?
IMF 때에는 다른 중소기업처럼 도산의 위기도 겪었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거래한 거래처와의 신용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힘은 아내였다. 어려울 때마다 그의 아내는 그의 뒤에서 묵묵히 그를 위해 기도로 도왔다고 한다.
“아내가 없었다면 제가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안보이는 듯하지만, 뒤에서 저를 위해 가정을 위해 사업을 위해 묵묵히 기도하는 아내는 늘 저의 버팀목이었습니다. 이번 합병을 위해서는 아내는 무려 1년 동안이나 작정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아내 김연환의 고마움을 안다. 그래서 그는 2011년도에 아내를 위해 베이크플러스 건물 1층에 ‘알레스구떼’ 빵집(경기도 하남시 덕풍북로 109)을 오픈해 주었다. ‘알레스구테’가 고객을 위해 언제나 신선하고 최선의 재료를 사용한다는 입소문이 나서 지금은 서울의 여러 곳에 지점들이 생겨날 정도이다.
에필로그
50년 전 가난했던 시절 빵이라도 실컷 먹어보자고 한국제과학교에 들어가 제빵 기술자로 시작했던 그의 인생은 중견기업의 사장으로 은퇴를 하게 되었다. 지면상 그의 이야기를 다 담을 수는 없지만, 그는 배고픈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들의 형편을 잘 안다.
그래서 그는 지역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도 온정을 베푼다. 2016년 하남시 미사리에 사회 복지관이 개관한 이래 매해 베이크플러스에서는 빵이나 케익, 쌀등 여러 모양으로 도네이션을 통해 도움을 주었다.
이제 그는 인생 후반전을 시작한다. 그의 이름의 이니셜을 딴 UK pro라는 컨설팅회사이다. 베이크플러스가 성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고객들인 베이커리, 레스토랑 등에 컨설팅을 통해 그들의 비즈니스가 잘 발전할 수 있도록 도움도 주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는 무료 컨설팅도 해줄 계획이다. 그의 인생 후반전이 기대된다.〠
글/주경식 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