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피긴 박사의 호주 복음주의 기독교의 역사 (7)

번역 | 홍은희ㆍ정의경/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12/27 [12:26]

제6장 말씀과 성령

1933-1959 (1부)

 
이 시대는 대공황의 늪에서 벗어나 전시 동원 능력을 갖춘 전쟁의 시대였고, 1950년대는 공산주의 위협과 한국전쟁에 직면한 시기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호주는 국가적인 자신감과 통일성을 강화했다. 전에 비해 정부와 교회의 리더십은 개선되었고 경제는 탄탄해졌으며 사회 및 문화적 가치에 대한 광범위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1950년대는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두 요소가 균형을 이룬 시대였다. 여기에는 교회가 기여한 바가 크다. 자유와 책임의 균형이라는 개념은 1940-50년대에 호주 카톨릭 교회가 적극적으로 호주 사회에 접목시켰던 카톨릭 사회이론과 잘 맞아 떨어졌다. 또 이 개념은 질서, 자유, 정의라는 신약의 세 가지 규범을 기반으로 한 사회 시스템을 옹호했던 보수적 개신교정신과도 상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카톨릭과 개신교가 모두 번성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950년대는 복음주의 역사에서 성령과 말씀, 세상이라는 3박자의 결합이 가장 성공적인 시기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 중 성령이라는 가닥은 과도한 천년 왕국 추종자들과 완벽주의자/무흠로자들에 맞서 힘겹게 씨름하고 있었고, 아직 오순절파가 미숙한 상태였던 탓에 대체적으로 활력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국지적이나마 지속적으로 부흥을 점화할 불씨는 충분하여, 1950년대는 복음 전도에 많은 역사가 있었다. 즉, 1959년 빌리 그레함 전도 집회를 정점으로 하여 호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국적인 대각성에 접근해 있었다.

이 시기 말씀이라는 가닥에서는, 재능 있는 보수 성향의 성경 학자들이 기울인 노력과 개혁 신앙의 전통에서 성경적 신학 교육이 증가함에 따라 이들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 세상이라는 가닥에서도, 앞선 시기에 근본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났다. 호주를 기독교 국가로 유지하려는 의지는 이 시기에 걸쳐 확고 부동했고, 해외 선교와 원주민 선교를 위한 투자 또한 현격히 증가되었다.

이 시기에 교회를 이끌던 지도층은 전 세대보다 훨씬 능력을 갖춘 평신도들이었다. 당시 멜본의 복음주의는 C.H. 내쉬와 그를 추종한 평신도 헌신자들에 의해 계속될 수 있었고, 시드니의 침례교는 몰링 학장의 깊은 영성과 존 리들리의 성공적인 전도 사역을 통해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1933년 시드니 대주교로 임명된 하워드 모울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복음주의 정치인에 속한다. 무어신학교의 T.C. 해먼드는 날선 검과 같은 지성과 채찍과 같은 언변으로 지도자로 섰다. 1947년 열광적인 웅변가인 스튜어트 바튼 바비지가 시드니 주교로 임명되었다. 시드니의 감리교는 웨슬리 전도단의 총재였던 프랭크 레이워드와 1950년대 전국 감리교 전도단에서 보인 탁월한 지도력으로 명망을 얻은 알렌 워커가 이끌어 가고 있었다. 향후 복음주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대학 사역은 ‘정글 닥터’로 불리웠던 폴 화이트와 북미 출신의 찰스 트라우트먼이 이끌고 있었다.

 
불모의 땅에서 안정적 성장으로

1939년 이전의 호주는 작은 시골 마을 같았다면, 전쟁을 통해 모든 호주인은 나머지 세계를 인식하게 되었고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수준까지 소비자 중심주의와 국제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교회는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의 시기를 맞아 교회 역시 확장을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1949년부터 1966년까지 호주는 멘지스 수상의 연합정부가 장악했으며 정치 경제적 상황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시기였었다. 대공황과 전쟁, 노동당 정권이라는 어려움을 극복한 후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치면서 자본주의는 호주 사회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지배 권력을 다시 획득하였고, 그 열매는 주로 중산층에 돌아갔다. 또한 한국전쟁에서 북한, 중국, 소련에 대항하여 국제 연합군으로 참전했던 것처럼, 공동의 적을 통해 온 나라가 하나로 통합되는 경험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10여 년간은 미·소 갈등으로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 멸망의 위협이 확산되면서 ‘적 아니면 동지’라는 사고가 대두했고 이는 페트로브 사건의 경우처럼 노동당에는 불리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또한 양모 수요가 폭등함에 따라 혼합 농경이 급성장했고, 동시에 전쟁 중에 축적된 사회 간접 시설과 이민자, 보호 관세 등으로 인해 2차 산업이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 5-60년대 초기의 변동을 제외하면 이 기간 대부분은 실업률이 1% 아래였던 경이의 시대였다.

1954년 인구 조사를 보면 인구 중 89.4%가 주교교단에 속한 기독교인이라고 응답했다. 이 중 41.9%는 성공회, 25.4%는 카톨릭, 12%는 감리교, 장로교는 4대 교파 중 가장 적은 10.7%였다. 실제 교회 출석률에 대한 갤럽 여론조사도 행해졌는데, 비록 응답자의 기준이 불분명하기는 했지만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의 비율이 1947년 조사 때에는 35%, 1955년 조사 때에는 33%였다. 이 수치는 영국의 평균 수치에 두 배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1948년 조사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응답한 전체 호주인의 수치는 94%인데 비하여 영국인은 84%였다. 호주가 유별나게 무신론적 국가라고 여기는 선입견에 반박이 될만한 자료다.

 
복음주의 합성의 실행: 모울

1950년대 호주에서 벌어진 복음주의 기독교의 재건에 밑거름이 된 요소는 다양했다. 이 시기는 유럽과 미국 기독교에서 엄청난 종교적 활력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1948년은 세계 기독교 교회협의회 (WCC: World Council of Churches)가 발족한 해로서 교파를 초월하여 각종 개신교 단체가 함께 모였고, 여러가지 방향에서 전 세계적 차원의 통합 움직임이 있었다. 또한 마틴 로이드 존스, 제임스 패커, F.F. 브루스 같은 영국 복음주의자들이 시작한 복음주의 개혁운동은 주로 IVF 네트워크를 통해 호주로 전해졌다.

하워드 모울은 1933년부터 1958년까지 시드니 대주교를 역임했고 그의 아내 도로시 역시 전형적인 복음주의 운동가였다. 모울부부의 일생을 통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부분은 현실 참여라는 요소였지만 성령과 말씀의 요소가 조화롭게 녹아들어 성화된 삶의 본이 되었다. 세상을 향한 사역에서 말씀과 성령에 전적으로 의뢰한 모울의 태도는 그의 성경책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모울은 성경책 첫 장에 ‘인생은 사역이다. 그 목적은 예배이며 그 법칙은 자기 희생이다. 그 힘은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나온다.’ 라고 써 놓았다.

모울이 시드니 대주교로 임명된 1933년은 복음주의에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갈등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모울을 천거한 H.S. 베그비와 후원했던 D.J. 녹스, R.B. 로빈슨, S.E. 랭포드 스미스는 모두 보수주의자였다. 모울 자신도 보수주의자였지만 근본주의에 속하지는 않았다. 모울은 주요 교구목사에 보수주의자를 임명했다. 모울의 우선 순위는 무어신학교를 통해 복음주의 목회자를 훈련시켜 전략적 요충 교구에 배치하는 것이었다. 모울은 무어신학교 교장으로 아일랜드 출신의 저명한 보수 복음주의자 T.C. 해먼드를 임명했다.

해먼드는 개신교 정신으로 잘 훈련된 투사였고 1919년부터 1936년까지 아일랜드에서 성공회 선교회 감독을 역임했다. 그가 지닌 예리한 지성과 뛰어난 암기력, 유머 감각, 지칠 줄 모르는 용기, 복음을 향한 심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모울은 온 힘을 다해 해먼드를 지원했다. 모울은 신학에 대해 깊이 연구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해먼드를 의지하는 면이 컸다.

이러한 동반자적 관계는 장점도 많았지만 부정적이 측면도 없지 않았다. 시드니 밖의 나머지 성공회교회들은 보수적 복음주의를 배척하고 시드니 교구를 고립시켰다. 덕분에 1935년 모울 대신 퍼스의 헨리 르파누 주교가 연방대주교로 당선되었다. 모울과 시드니 복음주의자에게는 큰 모욕이었다.

모울의 지도력이 빛난 것은 전쟁 기간이었다. 시드니의 성공회가 1차 세계대전에 소극적이라는 비난이 일자, 모울은 병사들의 영적 필요를 돕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동시에 모울은 향후 시드니가 급격히 팽창할 것으로 내다보고 교회 건물과 목회자를 제공함으로써 중심지마다 교회가 세워지도록 했다. 이러한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다.

전시 물자 차출과 자선 활동에 따라 교회 재정은 궁핍했고 교회 건축과 보수에 필요한 자재도 턱없이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교회 사역의 영역도 전시 총동원에 따라 타격을 입었다. 모울은 성공회 긴급 구호기금(Church of England National Emergency Fund)을 설립했다. 이를 위해 시드니 여성협의회(Sydney Diocesan Churchwomen’s Association)를 통해 2천명의 성도가 동원되었다.

결국 1947년 모울은 연방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확고한 복음주의 정신에도 불구하고 모든 파벌에게 인정을 받도록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일찍이 시드니의 모든 지역 교회를 방문하여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준 것처럼 이번에는 호주의 모든 지역을 방문했다.

모울은 람베스대회에 호주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했고, 후에 대주교가 된 도널드 로빈슨과 함께 1947년 보스톤 하바드에서 열린 국제 복음주의 학생 연합(IFES : 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s) 설립총회에 참석했다. 1948년에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 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설립식에도 참석했다. 1953년 모울은 성공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과 호주 선교회 (Australian Board of Missions)를 통해 동남 아시아 지역에 선교사 파송을 추진했고 1956년에는 중국을 방문했다.

1957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내 도로시 모울은 악성 림프종 호지킨병으로 사망했다. 한 목사는 ‘모울 부인을 통해 우리는 복음주의 전통의 가장 순수한 특징이 구현된 것을 보았다. 즉, 주님을 향한 전적인 헌신과 그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사역에 부름 받은 분이었다.’라고 기록했다. 1년 뒤 모울 대주교도 부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무어신학교 학생들이 그의 침상을 방문하여 위대한 인물의 최후를 함께 하고자 했다.

모울은 학생들에게 성경읽기와 기도 생활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모울은 병상에서 회복하여 업무에 복귀했다가 갑자기 생을 마감했다. 1959년, 모울이 죽은 지 일년이 되던 해에 빌리 그래함이 시드니를 방문했다. 시드니 전도집회의 마지막 날, 설교를 듣고자 모인 엄청난 관중을 보고 감정이 고조된 빌리 그래함은 하늘을 우러러 본 후 모울을 언급했다.

‘대주교님도 오늘이 광경을 보면서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이 광경은 주교님이 여러 해 동안 신실하게 사역하신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울의 후광은 현재까지 그 빛을 발하고 있다. 모울 대주교야말로 여전히 행동주의와 교리, 영성으로 이뤄진 성화된 삶이라는 복음주의의 이상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  (1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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