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사랑을 아는 예배자

“어찌하여 나에게”(요한복음 4:7~9)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9/26 [15:02]
예수님이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신 것은 그리 간단하게 볼 문제가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의 잡혼으로 혼혈이 된 사마리아인들을 개만도 못하다고 경멸했고, 사마리아인들 역시 자신들을 비웃는 유대인들을 원수처럼 여겼다. 그 세월이 수백 년에 이르고, 그렇게 둘 사이에 막힌 담은 도무지 허물수 없을 정도로 두텁고 높았다. 당연히 그들과는 말도 섞지 않았고 무얼 부탁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어찌하여 나에게

그런데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셨다. 두터운 담을 단숨에 허무시고 물을 달라고 하신 것이다. 너무도 놀란 사마리아 여인이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4:9)라며 반문했다..

일부 주석가들은 ‘이 여인이 대단히 논리적이고 오만했기 때문’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한다. “물을 좀 달라”하신 예수님의 부탁에 대해 분명한 이유를 들면서 따지는 여인의 태도가 논리적이고 오만했다는 것이다. 또 한편에서는 ‘사마리아를 모욕하는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과 시기심의 발로’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과연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논리적이고 오만할 만한 상황이었는가? 또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예수님께 적개심과 시기심을 가질 만한 처지였는가?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언제나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은 같은 사마리아 동족 가운데에서도 차별 당하고 버림받은 여인이었다.

그런데 유대인 남자가 “물을 좀 달라”며 말을 건네 왔다고 해서 대번에 오만 방자할 수 있겠는가? 또 금새 적개심에 불타올랐겠는가? 오히려 사마리아 여인의 입장에서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녀는 너무도 놀라서 “어찌하여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어찌하여”가 성경에는 무수히 많이 기록이 되어 있다.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1:3은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유다는 야곱의 12 아들 중 네 번째 아들로,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말이 유다의 아내가 아니라 며느리였다는 것이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자식을 낳았다는 것은 패륜이다. 인륜을 저버리는 파렴치한 행위다. 그런데 말씀이시고 빛이시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그 혈통을 따라 나셨다. 정말 “어찌하여”라는 말이 절로 나오지 않겠는가?

모세는 살인을 저지르고 미디안 광야로 숨어들었던 범죄자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찾아가 출애굽의 사명을 맡기셨다. 당시에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적어도 살인자가 아닌 사람만 해도 셀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살인자 모세를 택하시고 능력을 주셨다. 모세가 지팡이를 휘두를 때마다 나일강이 피로 변하고 하늘에게 우박이 떨어지고 홍해 바다가 갈라졌다. 정말 “어찌하여” 하나님은 살인자 모세를 택하셨을까?

신약성경 27권 중에 절반에 달하는 13권의 성경을 기록하고, 빌립보 에베소 갈라디아 고린도 등 신약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교회를 세운 사도 바울은 본래 그리스도인들을 잔멸하고 교회를 핍박하던 예수님의 대적자였다. 베드로가 지금은 예수님의 수석 제자로 불리지만 한때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다. 이스라엘의 가장 영광스러운 왕 다윗은 자기 부하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어찌하여 그들에게” 사도의 직분을 부탁하시고 당신의 교회를 맡기시고, 당신의 나라를 다스리게 하셨을까?

그러면 우리는 또 어떠한가?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말씀하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이 너무도 당연한 일인가? 우리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을 뵙기에는 너무도 민망해서 이렇게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어찌하여 허물과 욕망이 가득한 저에게 찾아오셨나이까?’ 

 
감동을 잃어버린 예배

곰곰히 생각해 보자. ‘당신은 사랑 받기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찬양은 하지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만한 조건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없다. 전혀 없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다. 말씀이신 그분이 우리를 찾아오신다. 이 세상의 빛이신 그분이, 길리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신다.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찌하여 나에게”라며 소리치고 놀라고 감격할 수밖에 없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기다리시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것이 예배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어찌하여 나에게”라는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한다. 놀람이 있어야 한다.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 경외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감동이 있는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어찌하여 나에게”라는 두려움과 놀람이 있는가? 예배 시간에 늦어서 허겁지겁 달려오고,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서 졸기도 하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더 중요한 일, 더 급한 일을 보느라 가끔 예배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 입장에서 “어찌하여 나에게”가 아닌가? “어찌하여 너희들이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

에덴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그렇게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다. 그때 하나님이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창 3:13)라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님은 교만한 위선자들에게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있으면서도 풍랑을 만나자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물으셨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8:26).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신봉하고 세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갈 4:9)라고 질타했다.

베드로는 성령님을 속이고 땅 값을 감춘 아나니아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라고 책망했다.

이런 일이 “어찌하여” 일어났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어찌하여”라고 한탄하시는가? 하나님에 대한 “어찌하여”가 없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나에게”라는 감동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을 만나도 “어찌하여 나에게”라는 놀람과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은혜와 사랑을 아는 예배자

예수님이 예배의 자리로 우리를 만나러 오신다.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매주일 마다 기다리신다. 그런데도 마지 못해 예배의 자리에 나올 수 있겠는가? 대충 대충 하면서 예배 드릴 수 있겠는가? 내가 바쁘다고 내 일이 더 중요하다고 예배에 빠질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참된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어찌하여 나에게”라는 놀람과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 “어찌하여 나에게”라는 은혜와 사랑을 아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어찌하여 허물 많은 나에게 찾아오셨습니까?” “어찌하여 고집불통인 저를 기다리셨습니까?” “어찌하여 나에게 그토록 큰 사랑을 베푸셨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이런 “어찌하여”들이 우리의 예배 가운데 고백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님은 생명을 걸고 우리에게 이 세상과 교회를 부탁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외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예수님의 이 “어찌하여”는 하나님의 보좌와 영광은 버릴수 있어도 우리는 버릴 수 없다는 사랑의 고백이셨다. 예수님의 이 “어찌하여”는 당신의 생명은 버릴 수 있어도 우리의 생명은 반드시 건지시겠다는 사랑의 다짐이셨다.예수님의 이 은혜와 사랑의 고백에 “어찌하여 나에게”라고 응답하는 것이 예배다. 예배 드릴 때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갚으로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어찌하여 나에게”라고 감사하는 예배자가 되자. 그때 우리의 예배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놀람과 경외감, 감동과 감격 속에 드려지는 살아 있는 예배가 될 것이다.〠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blog.daum.net/goodseed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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