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종사자들의 말과 태도

엄상익/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11/28 [14:57]

성폭행 피해여성이 증인으로 나갔다가 수치심을 느꼈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전에 노래방 도우미를 했는지 등을 따져 묻는 질문에 상처를 입었다는 보도였다. 왜 불러서 그런 아픔을 줬을까?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법정에서 프라이버시를 건드릴 때가 많다. 속칭 꽃뱀에게 걸려들어 모략을 당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법정의 허공을 오가는 말들을 보면 원색적이고 거칠다.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꼬챙이가 되어 상대방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내기도 한다.

 30년이 넘게 법조인 생활을 한 나 자신부터 말조심을 하지 않았다. 병아리 변호사 시절 구치소를 찾아가서 만난 범인에게 “강도시죠?”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가 정색을 하면서 “내가 아무리 그랬어도 강도라니요?”하고 화를 냈다. 얼떨떨했다. 강도를 강도라고 부르지 뭐라고 부르나 하고 고민을 했었다. 절도범도 자기가 한 일을 절도로 부르는 걸 싫어했다. 그냥 “가져갔다” 정도로 말을 바꾸어 달라고 부탁했다.

용어 한마디가 그들의 마음에 큰 자국을 남기는 것 같았다. 진짜 죄인도 그런데 결백한 사람들이 막말을 듣는 듯한 모멸감을 느끼면 죽고 싶을지도 모른다. 민사소송에서는 소송에 걸리면 일단 그 명칭이 피고다.

법정에서 한 신사가 피고 나오라는 재판장의 명령을 듣는 순간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피고냐?”라고 소리치면서 바닥에 발을 구르는 걸 봤다. 재판장이 얼떨떨한 눈으로 그 신사를 봤다. 그런 일에 익숙한 판사는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폭행이나 협박 같은 고문은 거의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뱉어지는 언어 폭력이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구치소에서 갑자기 목을 매거나 멀쩡히 조사를 받고 나와 자살하는 명사들의 기사가 종종 신문에 난다. 상당수가 대접받던 자존심 높은 사람들이다. 그들 죽음의 배경을 파헤치면 사법기관 종사자로부터 받은 모멸감이 똬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사법기관의 곳곳에 그런 악습이 잔존하고 있다.

 국민들은 형사 앞에 앉는 순간부터 속이 끓어오른다. 유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되는 게 법원칙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법망에 걸려들면 무조건 죄인취급이다. 의심의 눈빛으로 은근히 사람을 깔아뭉개는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은 속이 뒤틀린다. 젊은 검사의 빈정거리는 반말지거리나 의도적인 무시에 마음이 얼어붙기도 한다.

법원으로 가면 그 분위기의 장엄함에 주눅부터 든다. 선입견을 가진 듯한 판사의 한마디는 사람들의 잔잔한 호수 같은 마음에 던져지는 바위덩어리 같을 수 있다. 판사의 한마디에 이러고도 살아야 하나라는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오랫동안 그런 습관에 젖어있는 사법기관종사자들은 상대방의 아픔 자체를 의식하지 못한다. 외눈박이 자기시각만 가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남없이 법조에 관계된 사람들은 이번을 계기로 깊은 반성을 해야 할 것 같다. 고 조영래 변호사는 검찰청에 실무수습을 나갔을 때 수갑을 차고 포승에 묶이어 온 피의자를 잠시라도 풀어주고 담배 한 대 권하지 못한 게 아쉽다고 했었다.

 입장을 바꾸어 그들의 내면을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살한 성폭행 여성피해자 기사의 댓글을 찾아보았다. 사법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 대한 공통된 증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정의를 위한다는 그들을 사람들은 왜 미워할까? 아무런 의식 없이 그들의 혀에서 툭 던진 말들이 사람들을 멍들게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달라졌다. 의사들도 예전에는 무뚝뚝하고 치료과정에 아파도 환자 쪽이 무조건 참아야 했다. 요즈음은 시술 전에 “아픕니다”라고 친절히 알려주고 다양한 마취제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제 사법서비스도 변해야 한다. 민주사회를 만들려면 사법기관의 위압적인 말버릇과 불손한 태도를 없애야 한다. 겸손하고 세련된 말로 해야 한다.

공손한 태도에 사람들은 마음을 연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고칠 수 있다.〠

 

엄상익 | 변호사, 크리스찬리뷰 한국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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