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피긴스 박사의 호주 복음주의 기독교의 역사 (2)

창간 20주년 기획 연재

번역 | 홍은희ㆍ정의경/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7/26 [15:09]

제2장

자유주의에 대한 인식<1836-1870>
 
▲ 스튜어트 피긴박사 (Dr. Stuart Piggin)     ©크리스찬리뷰

19세기 복음주의자들은 당시의 자유주의적 확신을 공유하고 있었다. 여기서 자유주의란 사회 발전과 모든 이들에게 종교적, 정치적 자유를 제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말한다. 또한 이들은 검약, 겸손, 절제, 노동 등의 핵심 가치를 자본주의자들과 공유했다. 이들은 음주, 게으름, 로마 카톨릭, 영국성공회를 공동적으로 인식했고 교육영역에서는 심했다. 이 때문에 복음주의자들은 교육, 복지, 의료시설을 발전시키고, 복음 자체보다는 도덕성에 주안점을 둬 설교를 했다. 그래서 당시 대표적인 평신도 선교사들은 직접적인 선교보다 경제적 이익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자유주의와 호주 독립운동

1830년대 NSW주에 살던 자유주의자는 이렇게 묘사되었다. 개혁을 옹호하며 의회제와 배심원제를 찬성하며, 변호사일 가능성이 높고, 기자들과 잘 어울리며 결혼생활은 ‘비정상적’이고, 대부분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 당시 프리메이슨은 종교단체라기보다는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 단체로, 1880년대 호주안에 180개의 집회소와 2만 5천 명의 단원이 있었다. 대표적인 자유주의자로는 호주의 자유로운 정치 제도를 발전시키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제임스 스티븐, 리차드 버크 총독(1831-37 재임)이 있다. 특히 버크 총독은 1836년 교회법에 제정하여, 모든 주요 교파 목회자에게 보수와 교회당 건립에 국가 보조금이 지급되도록 했다.

자유주의와 복음주의의 결합 덕분에 식민지 정착에서 복음주의의 영향이 아주 컸다. 초기 멜번은 개신교보루였다. 멜번에는 죄수 정착민이 적고, 상대적으로 많은 장로교도들이 있었다는 점과 ‘영국에서 새로 입국한 이민자들이 이미 복음주의 운동의 영향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 요소로 작용했다. 남호주도 ‘성공회 반대자들의 천국’으로서 정착민들은 종교의 자유와 시민의 자유를 열렬히 지지했고 대영제국의 식민지 중 최초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 곳이라고 역사가들은 말했다. 대표적인 지도자로 조지 파이프 앵거스가 있다.

역사학자 리차드 엘리는 개신교적 ‘시민층’이 19세기 호주 교회를 장악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이들은 출신 계급이 미천했지만 이를 극복하고자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며 인류의 진보 발전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해외 유학파를 존경하고 인쇄된 모든 것을 ‘복음’으로 여겼으므로 외부문물에 비판보다는 수용 자세를 견지했다. 세상의 소명에 민감한 복음주의였고, 말씀으로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기초로 세상을 여기기에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분파주의와 성공회

복음주의 내 분파주의는 복음주의와 자유주의의 조화를 방해한 가장 큰 위협이었다. 분파주의는 교파마다 자신만의 특별한 신앙이나 가치, 기준을 국가로부터 인정받고자 다투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미국인들은 교파를 거룩한 경주로 여겼지만, 호주는 그렇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호주인들이 교파를 바꾸기를 꺼려하고, 자생 교파가 없는 것도 이러한 배경이다.

호주 분파주의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 번째로 버크총독의 법 때문에 영국성공회가 국교가 되지 못하여 다른 주요 교파도 힘을 얻게 되어 분파주의의 불길이 치솟았다. 두 번째는, 이주민들의 지역배경이 분파주의를 더 강하게 하였다. 멜번에서는 개신교를 믿는 지배층과 일반 주민을 이루던 카톨릭신자 간의 갈등으로 1846년 7월 12일 심각한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세 번째 요인은 1833년의 옥스포드 운동과 관련된 반카톨릭 정서다. 네 번째는 복음주의자들 간의 연합운동이다. 호주 안에서는 모든 개신교가 ‘공통적인 기독교’를 장려했고, 별로 오래가지 못했지만 연합교회가 도처에 등장했다.

19세기 중반, 변호사이자 자유당 의원이었던 로버트 로위는 영국정부의 식민지장관에게 시드니에 복음주의 노선의 주교가 임명되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 그렇게 임명된 프레드릭 바커(1854-1882)는 비교적 칼빈주의를 강조하지 않으면서도, 정치색을 띄지 않아 대중적 지지를 얻었고, 강력한 사제위주의 교회 체제를 정립한 것은 지금까지도 시드니의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1856년 무어 신학교를 설립한 것이었다. 1866년에는 NSW주의 개교회가 직접 재산권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하여, 교회가 사회 문제보다는 교회 문제에 집중하도록 몰아갔다.

 
부흥

호주 복음주의는 전반적으로 부흥을 갈구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시드니 주교 프레드릭 바커의 부인 제인 바커는 목회자들을 모아 매월 정기적인 기도회를 결성하여 부흥 기도에 힘썼다.  호주 기독교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호주에서 부흥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 시기 동안 일어난 부흥의 주요한 요소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감리교 부흥으로서, 19세기에 감리교회가 월등한 성장을 경험한 요인 중 하나이다. 1841년부터 1871년 사이 영국성공회는 3배, 카톨릭은 4배에 비해 감리교는 10배의 성장을 보였다. 이 시기에 엄청난 인구증가는 1851년 NSW주와 빅토리아에서 발견된 금광 때문이기도 했다.

두 번째 요소는 영국 웨일즈와 아일랜드 얼스터 부흥이었다. 이 부흥소식을 접하고는, 1859년 5월 22일 빅토리아주 브라이튼을 출발로 여러 군데서 부흥이 일어났다. ‘아일랜드 부흥의 본을 따라, 교회에서 매일 밤 기도회가 열렸고 엎드려 절하는 것만 빼고 아일랜드 얼스터 부흥의 모든 현상이 나타났다.’ 1859년 NSW주 북부 매닝 리버에서는 ‘호주 역사상 가장 놀라운 성령의 강림’이 있었으며 장로교 알렌 매킨타이어 목사가 주도했다. 1860년 남호주 버라의 구리 광산에서는 유례없는 ‘부흥’으로 500명이 회심했다.

 
원주민 선교와 해외 선교

1833년과 1834년에 영국 하원은 식민지원주민조사를 시행하고, 이들에게도 정의, 권리, 문명, 기독교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했다. 당시는 복음주의, 자유주의, 실용주의 같은 위대한 낙관주의가 이룩한 진보의 시대였다. 원주민 문제에도 패배를 시인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여러 선교회가 시도한 원주민 선교는 초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문제로 중단되고, 관련선교단체도 해체되었다.

예를 들어 빅토리아주 번팅데일에서 1839년 시작된 웨슬리안감리교 선교는 지역에 2만 6천 헥타르의 부지를 확보하고, 2명의 젊고 왕성한 선교사 벤자민 허스트와 프란시스 터크필드를 임명, 선교를 시작했지만 실패하여 결국 선교단체도 3년 후 해체되었다.

원주민선교의 실패는 백인 정착민들이 유형수들에게 했던 것만큼도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선교하지 않았고, 선교단체조차 원주민 전도를 경시했다는데 있다. 또 다른 원인은 원주민들이 먼저 백인사회의 영향을 받아 타락해 버렸다는 점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어떤 백인 선교사도 원주민 문화와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끊임없이 주장한 것은 기독교가 아닌 영국 문화였다. 마오리족의 선교의 아버지 마스덴조차 ‘호주 원주민을 가장 타락한 종족’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가장 ‘성공적인’ 원주민 사역은 1858년부터 1905년까지 서빅토리아주에서 벌어진 모라비아파 선교단 활동이었다. 존 해리스는 이들의 성공 요건으로 5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호주 원주민 문화를 인정했고, 둘째, 호주 원주민도 영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고, 셋째, 원주민이 본질적으로 사악하지 않다고 인정했고, 넷째, 원주민 언어를 배워 그들의 말로 복음을 전했고, 다섯째, 이전 원주민의 신앙을 인정하고 그들의 영적 은사를 시인하되 특히 원주민 지도자의 리더십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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