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피긴스 박사의 호주 복음주의 기독교의 역사 (3)창간 20주년 기획 연재제3장 개신교 영성과 문화 <1870~1913>
호주 개신교는 1870~1913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전인구의 40%가 매주 교회에 출석했고, ‘어디나 교회가 서고, 1895년 사우스오스트렐리아 전체의 호텔수가 770개일 때 아들레이드 내 교회수는 908개였다.’ 복음주의자들은 호주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기 위해 정치적 참여, 사회개혁, 교육, 절제, 여성운동, 전도, 사역, 집회, 부흥운동 같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해외 선교운동의 결과로 범교회적 연락망 구축 및 선교의 열정, 사회에 대한 청지기적 의식이 생기고, 자유주의, 다윈주의, 형식주의에 대항해 성경을 지키려고 헌신했다. 이 시대에는 세상, 성령, 말씀 같이 승리한 시대였다. 동시에 다가올 세대를 위해 복음 사역과 성결운동, 부흥을 위한 기도도 있었다.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로 갈라지게 된 것은 교파와 지역적 영향이 컸다. 빅토리아, 사우스 오스트렐리아의 감리교와 침례교는 자유주의적 복음주의, NSW는 보수적인 경향이 강했다. 세상 | 기독교 국가의 비전 정부의 교회 및 교회학교 지원폐지는 교회를 어렵게 만들었지만 믿음을 약화시키진 못했다. 당시 많은 정치가들은 복음주의자였다. 이들의 입법화를 시도한 영역에는 ‘안식일 준수, 교육, 성인문화금지, 이혼방지, 고아 구제, 빈자, 노인, 병약자 구제, 마약, 도박, 매춘, 남색, 신성모독 금지, 법정에서 성경에 근거한 맹세, 의회기도, 대중 앞에서 속죄’ 등이 포함되어 호주를 마치 개신교 국가로 선언한 것 같았다. 1780년의 영국 주일법(주일에 노동을 금지하는 법)은 NSW주에서 1966년까지 유효했다. 호주의 프로테스탄트는 도덕성을 강조하여 ‘와우저(wowser)’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이 말은 ‘너무 엄격하게 규칙을 지키는 위선적인 청교도’를 의미했다. 1910년 노동당이 처음으로 정권을 잡자 카톨릭대주교 모란은 와우저들을 패배시켰다며 기뻐했다. 반대로 1902년 NSW 한 감리교 목사는 ‘감옥이 카톨릭들로 가득 차 있는 한, 감리교들은 이들을 돕기 위해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고 말해 논쟁을 일으켰다. 와우저주의와 상관없는 이들 사이에서는 대체의식이 필요했다. 당시 지방은 상대적으로 여성이 적었고 남성은 육체 노동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서로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교회 또한 남성적이었고 이로 인해 ‘동료의식 mateship’이 발전됐다. 1890년대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기독교인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1890년 부두파업이 실패하자, 조합주의자들이 주도가 되어 정치에 참여하게 되어 1891년 NSW 노동당이 탄생했다. 로마교황 레오 13세(1878~1903)의 회칙 ‘새로운 것들(Return Novarum)’이 1891년 선거 직전에 반포되어 카톨릭의 정치참여 의도가 읽어지기도 했지만, 1894년 선거에서 카톨릭 신자가 한 명도 당선되지 못함으로써 개신교도들의 우려는 소용없이 되었다. 초기 노동당은 카톨릭보다 오히려 복음주의자들의 덕을 더 보았다. 시드니 도심 주변은 카톨릭 아일랜드계 노동자보다 개신교 노동자들이 더 많이 살았다. 1891년 NSW선거에서 35석을 획득한 노동당 후보에는 웨슬리안 감리교 평신도 설교자 존 L 피건과 알프레드 이든이 포함되어 있었고, 1894년 선거당선자로는 노동당의 복음주의자를 대표하는 스멀리 목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 사우스오스트렐리아는 감리교 천국이었다. 그러나 호주교회의 쇠퇴는 처음에 기독교 영향 아래 있었던 지도자들이 세속주의로 흘러가면서 노동당의 조직이 증가하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 영성 | 경건운동, 집회, 부흥 1860~1889년의 번영은 미국의 디엘 무디(1837~1899)와 샌키의 부흥 운동과 때를 같이 했다. 또한 많은 국제 복음주의 단체의 지도자들이 호주를 방문했다. 19세기 탁월한 복음주의자 지도자 찰스 헤이든 스펄젼과 디엘 무디은 직접 호주를 방문하지 않았지만 큰 영향을 주었다. 스펄젼의 설교는 월간지 ‘검과 삽’에 인쇄되어 주일마다 정착민 모임에서 읽혀졌고, 1863~1892년 영국에서 온 대부분의 침례교 선교사들은 스펄젼 칼리지에서 훈련을 받았다. 무디가 호주에 준 영향은 대단했다. 그를 초청하기 위하여 15,381명이 연대서명을 했지만 그의 사망으로 오지 못했다. 그러나 무디성서연구회 대표 르벤 A. 토레이가 1902년 4월 멜번에 도착했고, 이 대회는 1959년 빌리 그래함 성회 이전, 가장 큰 규모의 복음전도대회로 알려졌다. 윌리엄 워렌의 보고서에 따르면 ‘몇 주 안에 하나님의 영이 신자들을 사로잡았다. 50여만 명이 온 가족별로, 이교도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술집을 박차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바람에 경찰관은 할 일을 잃었다. 신자들은 “대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이라고 서로에게 인사할 정도였다. 당시 토레이는 찰스 알렉산더와 동행했고, 알렉산더는 1907년와 1909년에 다시 방문하는데 특히 후자의 경우 윌버 쳄프맨과 같이 4개월간의 전도대회를 인도했다. 이 대회는 ‘호주 오순절 성령강림절’로 불려지고 있다. 이러한 대부흥 뒤에는 복음 역사상 가장 큰 기도의 연합운동이 있었다. 존 맥닐 목사 등을 비롯한 10~12명이 수년에 걸쳐 기도했고, 멜번에서는 1700명이 매주 기도모임을 가지고 4주 만에 8,642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1902~1903년 NSW의 부흥은 25,000명의 개종자를 만들었다. 일라와라 광산 마을에서는 전 인구의 15%인 2,735명이 개종했고 다른 광산도 줄을 이었다. 그 결과 사람들의 외모까지 변하고 음주클럽에 회원 탈퇴가 줄을 잇는 일이 벌어지도 했다. 오도넬은 당시 부흥의 증거로 첫째, 모두가 은행 부채를 상환했으며, 둘째, 욕을 삼가고 맹세하는 것을 두려워 했고, 셋째, 광부들은 일을 바로 하기 시작했고, 넷째, 교회 출석이 증가되었다고 전했다. 호주 오순절교회의 근원 당시 호주에 온 복음주의자들은 극단적인 운동을 거부했다. 그러나 성령강림과 방언운동은 어디보다도 호주에서 빨리 전개되었다. 호주의 첫 방언은 1870년 빅토리아주 포틀랜드의 한 기도모임을 통해 일어났다. 실제로 오순절운동은 1906년 미국 LA 아주사거리에서 시작된 것을 알려져 있는데, 호주 오순절교회는 미국에 의하여 설립된 것이 아닌, 독특한 특성을 가졌다. 대표적인 지도자인 존 알렉산더 도위는 기존 교단사역을 접고, 1883년 멜번에서 개척하여 치유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을 엘리야로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반감을 샀다. 호주 오순절의 시조라 할 수 있는 감리교 출신의 여성 자넷 랜카스터는 1902년에 나온 ‘왜 교회에서 치료를 가르치지 않는가?’란 책에 도전을 받아, 사도행전에서 신자에게 약속된 능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자신의 부러진 어깨를 치유함 받고 1908년 방언을 하면서 1909년 멜번 북부 퀸즈베리 104번지를 매입하여 ‘복음홀’이라 부르며 호주 최초의 오순절교회를 열었다. 그러나 자넷은 하나님과 성령이 동일하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이 사역은 오순절 주류에서 떨어져 나간다. 세상을 향하여 | 원주민, 중국, 남태평양 선교 오랫동안 복음주의자들은 해외선교를 최고의 사역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해외선교가 교회의 영적 온도를 보여준다고 믿었다. 특히 여자 선교사의 역할이 커서, 선교자원자 중 여성이 남성의 2배를 넘었다. 그러나 원주민, 중국인, 남태평양 선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호주 남부와 동부에서 교단차원에서 했던 원주민선교는 문을 닫거나, 그 재산은 정부나 목축업자에게 넘어갔다. 대신 주류교단에 속하지 않은 선교사들이 대신했고, 이 중 많은 수가 원주민과 똑같은 환경에서 살다가 죽었다. 불행하게도 원주민에 대한 대량학살 및 출생률 하락이 지속되고 질병과 알콜, 마약의 지배를 당했다. 얼마 남지않은 원주민들을 향하여 1908년 성공회는 로버리버 사역을, 카톨릭은 1911년 바스허스트 사역을, 1916년 고울번섬에 감리 사역이 시작되었다. 이들 덕분에 원주민 주거지역에서 자신들만의 관습과 문화가 유지될 수 있었고, 북부지역 원주민선교 덕분에 원주민 인구가 다시 늘기 시작했다. 최근 19세기 30~40년 동안 수많은 중국 이민자들이 광산지에서 도시로 이동했다. 이들은 세탁소, 상점점원, 상인이 되거나 카페 주인, 하숙집을 운영했다. 하지만 백인은 이들을 아편과 도박을 하는 ‘이교도’로 적대했다. 그러나 장로교는 중국인만의 교회가 서도록 격려해서, 지금까지도 그 맥이 이어진다. 퀸즈랜드는 1868년 설탕산업 때문에, 62,000명의 남태평양인들을 이민시켰지만, 1901년 연방정부의 백호주의로 1906년까지 모국으로 돌려보냈다. 이들을 위해 셀리나 하리트 융(1856~1940)의 선교가 시작되면서 1905년-1906년 사이 기도부흥이 목격되고 1940년과 1970년에는 솔로몬섬에서 부흥이 목격되었다. 1885년 허드슨 테일러가 병 치료차 호주로 보낸 조지 니콜은 호주교회 안에 중국에 대한 큰 관심을 일으켰고, 1890년 중국내륙선교단(China Inland Mission, CIM) 호주지부에 의해 콜린즈 스트리트 침례교회에 설립되었다. 1890년 8월에는 허드슨 테일러가 호주를 방문했다. 1913년까지 호주에서 176명이 CIM을 통해 중국에 파송되었고, 이 중 101명이 여성이었다. 이 시기의 선교는 교파를 추월한 연합운동이었고 특히 여성의 역할이 컸다. NSW 교회선교연합회는 1892~1931년 동안 247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이 중 70%가 여성, 특히 66%가 미혼 여성이었다. 빅토리아 교회선교연합회가 파송한 넬리와 톱시 샌더스 외 6명이 1895년 중국 푸킨지방에서 살해 되자, 도리어 중국선교의 열정은 커졌다. 19세기 호주에 형성되었던 선교단 모두가 복음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1850년 메리네시아 선교가 반세기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섬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원주민들의 존경심을 얻었다. 고교회주의, 다윈주의, 자유주의와의 싸움 그러나 복음주의는 강해진 만큼 더 방어적이 되었다. 이들은 세속주의나 물질주의뿐 아니라, 성공회의 고교회주의와 다윈주의, 성경비평학과 싸웠다. 장로교와 침례교는 자유주의에 대항해 두 개의 중요한 전쟁을 치뤘다. 첫 번째 전쟁은 1875년 멜본 스코트장로교회에 취임한 찰스 스트롱과의 전쟁이었다. 결국 스트롱은 스스로 사임해 스코틀랜드로 떠났고 스트롱 지지자들은 1885년 자신들만의 교회를 설립했다. 두 번째 전쟁은 영국 스펄전 목사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영국 침례교 내에 자유주의의 침투를 ‘쇠퇴’라고 정의하면서, 그런 교단에 남는 것은 ‘알면서 죄에 가담하는 실수’라며 교단을 탈퇴했다. 이것은 특히 브리즈번의 교회들을 흔들었다. 성공회 안에서 고교회주의와의 싸움은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다. 덕분에 교회의 정치적 관심이 늘면서 연방정부체제와 정당정치로 가는 기폭제가 되었다. 많은 성공회교구 안에서 내분이 일었지만 바커 주교가 복음주의 기초 위에 세운 시드니 교구는 견고했다. 케직 운동에 속한 죠지 그럽은 두 번째 성령세례를 통해 성화한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이 당시 전형적인 부흥신학이었다. 그러나 철저한 칼비주의자이자 무어신학교장 나다니엘 존스(1897~1911)와 머빈 아츠덜 목사(1882~1908)는 그럽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들은 능력있는 말씀의 해석자이었지만 성경해석에 있어서 지나치게 문자적이었고, 성화의 미래적 차원에만 너무 강조를 두었다. 1870년 시드니, 멜본, NSW의 배서스트와 골번 등 4개 교구가 복음주의에 속했지만, 1차 세계대전 초까지 이 중 배서스트와 골번 대신 빅토리아의 벤디고와 깁스랜드교수가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교구 성격이 고착되어 버린다.〠<계속>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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