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피긴스 박사의 호주 복음주의 기독교의 역사 (4)

창간 20주년 기획 연재

번역|홍은희•정의경 | 입력 : 2010/09/27 [15:03]
4. 말씀에 대한 도전의 시대 (1914~1932)  1부
 
 
▲ 스튜어트 피긴박사 (Dr. Stuart Piggin)     ©크리스찬리뷰



서구 세계를 뒤흔든 제1차 세계 대전과 대공황은 문명과 신앙 두 기반을 흔든 위기였다. 1차 대전에서 죽은 6만 명의 호주 젊은이들과 함께, 대다수 호주인이 갖고 있던 고매한 이상도 사라졌고, 남겨진 애국심마저 뒤이은 물질주의 시대를 겪으면서 고사했다. 30년대는 20년대에 번 돈으로 버텨낸 물질주의 시대였고, 교회에 있어서도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활력의 징조도 있었다. 즉, 바이블칼리지와 성경집회, 대학생사역과 해외선교 등이 모두 활발히 전개되었다. 복음주의 교회가 해외 선교에서 교회의 역할을 강조할수록, 여성 사역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갔다. 이는 비단 전장에서 많은 청년 남성이 전사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상과 대립된 말씀

영적인 관점에서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사이의 10여 년은 침체의 시기였다. 1920년대는 자유주의가 뜨는 시대였고 복음주의는 근본주의(The Fundamentals)를 취하거나 복음주의를 포기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근본주의는 20세기에 들어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된 것으로,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하는 성경비평, 자유주의 신학, 진화론, 사회 복음 등에 대항하여 개신교정신을 지키려는 운동이었다. 근본주의는 1921년 시드니와 1922년 멜번에서 열린 집회를 통해서 도입되었지만, 미국과는 달랐다. 호주 근본주의를 자리잡게 한 도구는 바이블칼리지와 컨퍼런스 운동의 도움이 컸다.

근본주의 아래에서 복음주의는 더 편협하고 방어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 성경은 순종 이전에 보호할 대상, 사회는 개혁보다는 뒤집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사회복음을 자유주의의 일부로 생각했기 때문에, 사회 개혁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19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복음주의는 이후 반계몽주의, 반지성주의, 배타주의, 경건주의, 분파주의 등 근본주의의 영향 아래 놓인다.

당시 복음주의는 세상을 개조하기보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었다. 가족 영역에서는 자녀들이 불신자와 결혼하지 못하게 막았고, 전쟁 이후 늘어난 여성의 자유 중 상당 부분을 반대했다. 그러나 여성의 사역은 더 권장하는 분위기였다.

1926년 애들레이드 커넬라이트가든 조합교회가 청빙한 위니프레드 키이크 목사는 호주 최초의 여성 교구 목사였다. 재미있게도 호주 국내교회에서는 여성 지도자를 배제하면서도 해외선교에서는 여성 선교사를 더 높이 사는 추세였다. 1914-1932년 중국선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 153명 중 여성이 104명이었다.

이 기간 동안 호주 원주민을 향한 사역은 해외선교 사역만큼 좋은 결과를 보여주진 못했지만, 일부나마 중요한 선교본부가 설립되었다. 여전히 교회는 원주민 선교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지의 백인에 대해서는 더 나은 결과를 얻었다.

 
제1차 세계대전

역사가들은 교회가 1차세계대전를 지지하며 동원과정에서 맡았던 역할과, 전쟁이 나라를 정화하고 교회의 부흥을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 전쟁을 단순히 죄성의 결과이자 심판이라고 규정한 한심한 이해를 지적하며, 교회를 비난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 중 상당 부분은 시대착오적이다. 목회자 개인과 지역을 자세히 보면 이렇지만은 않았다.

당시 호주 목회자들, 특히 주류였던 영국성공회는 제국주의 신학이 지배적이어서, 필요하다면 완력으로라도 약자를 보호할 의무가 영국정부에 위임되었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다수의 독일 신학자들은 프러시아 군국주의를 지지하면서, 독일을 하나님의 도구로 여기고 독일 정신문화의 우월성을 방어하는 거룩한 도구로 전쟁을 인식했다. 영국과 호주의 영국 성공회는 독일교회가 하나님이 아닌 전쟁의 신, 오딘을 섬기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1차 세계대전은 이교도와 사탄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성전의 명분이 충분했다. 한편에서는 추악한 군국주의의 영을 묵인한 죄, 안식일을 범하고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경마와 도박, 음주 같은 죄를 통해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킨 죄에 대한 심판으로 전쟁을 이해했다. 전쟁을 통해 목회자들은 공격적인 경건주의자가 되었다.

1918년 연방 정부가 전쟁 부채를 위한 복권 발매를 승인했을 때 멜본대 트리니티 신학교 학장 알렉산더 리퍼박사는 ‘도덕을 어기느니 전쟁에 지는 게 나을 것’이라고 반응했다. 영국 국왕 조지 5세는 전쟁 기간 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울릉공에서 열린 ‘국왕 따르기’ 행사에서 한 연사는 ‘누구든 병사들에게 술을 대접하는 자는 독일 첩자로 간주해라’고 말했다. 1916년 6월, NSW는 노동당 수상 윌리엄 홀만의 기대와는 달리 주점의 폐점을 오후 6시로 당기는 국민투표에 압도적으로 찬성했고 이 결정은 15년간 지속되었다.

처음에 교회는 중간 입장을 유지하는 듯했지만,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목사사모들은 적십자사에서 돕기 시작했고 550명 이상의 목사들이 자원하여 참전했다. 군목 지원자의 숫자는 임명된 수보다 훨씬 많았다. 군목이 안되면 일반사병으로 지원하는 목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의와 진리라는 명분 아래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싸운다는 것이었다.

브리즈번 고교회파 성공회 지도자인 데이비드 갈란드(1864-1939)는 모든 호주인이 같이 전쟁 전사자를 추모하는 예배의 날로 안작 데이(Anzac Day)를 고안했다. 원래 교회가 주관해 온 안작데이 행사는 1930년대부터는 RSL로 이관되었다. 안작데이에 호텔이 문을 열도록 허용된 것은 1964년에서나 가능했다.

 
대공황기

대공황기 동안 교회는 일회성 구제사역에나 했을 뿐, 사회의 보다 근본적이고도 구조적인 문제 해결에는 실패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공회의 보수적 복음주의자, R.B.S. 해먼드 부주교의 사역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브로드웨이 세인트바나바교회에서 1918년부터 시무하면서 1934년까지 모두 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여덟 곳의 호텔과 114 가족이 머물 수 있는 해먼드 가정호스텔을 5개나 세웠다. 또 일자리를 얻어 새로 시작할 수 있도록 대출금을 주선해 주었다. 그의 사역을 통해 굶주린자들을 위해서 한 해에 25만 명분의 식사가 제공되었다.

법정에서 음주관련문제로 끌려온 사람들이 금주 맹세를 하고 세인트바나바교회 성도가 되었다. 해먼드 목사를 통해 전도된 영혼은 4천4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는 시드니 교외 리버풀에서 1939년까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주택 110채를 지었고 이 일대는 해먼드마을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실험적 사역은 다른 주에까지 전파되었다.

감리교도들은 여러 도시에 설립한 ‘미션’을 통해 가난한 이를 많이 도왔다. 시드니 파이브독교회 A.B. 랄처러 목사는 1929년 11월 감리교 실업 및 구제기금이라는 단체를 설립했고 이 단체는 제2차 세계대전까지 운영되었다. 감리교 평신도 설교자였던 오스 바넷은 멜번에서 가난한 부모의 자녀를 돌보기 위한 아동보호소 설립운동을 펼쳤다.

카톨릭 교회의 경우, 특히 멜번에서 카톨릭 실천운동(Catholic Action)이라는 프로그램이 경기 불황에 의해 탄력을 받았다. NSW에서는 가난한 소외 계층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강조하는 방법으로써 지도층이 주도하는 경건운동이 펼쳐졌다.

1881년 호주에서 시작된 세인트빈센트드폴협회(The St Vincent de Paul Society)는 대공황기에 구제사역을 펼친 카톨릭 교회의 대표 기관이다. 구세군도 여러 지역에서 급식소를 세우고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찾아주는 직업사무소를 설립했고, 노숙자 숙소를 제공했다. 사람들은 구세군에 큰 신뢰를 보냈고, 학교교사들까지 나서 도움이 필요한 가정을 구세군에 보고했다.

대부분 교회 지도자들은 개인주의적 도덕심에서 보다 넒은 사회적 분석과  처방 쪽으로 옮겨갈 때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려 조심했다. 하지만 사회 복음은 대공황기에 고통을 많이 받은 노동계급에 큰 호응을 일으켰고 특히 광산촌과 산업 중심지의 근로자들에 그러했다. 호주의 사회주의 운동은 감리교의 비옥한 토양에 깊이 뿌리 박혀있었다. 랠프 서튼, 빌 호빈 등의 급진적인 감리교 목사들은 공개적으로 자본주의를 착취의 시스템으로 비난하고 사회주의를 예수의 가르침에 더 일치한다고 가르쳤다.

1929년 세스녹 탄광에서 최초의 광산파업이 일어나자 경영진은 탄광을 폐쇄해 버렸다. 상황은 비참했다. 광부와 그 가족들은 토끼를 잡아 먹으며 연명했고 노동조합내의 공산주의 자들은 행동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통치를 이루자고 선동했다. 호주군 35보병대대 사령관은 민병대까지 동원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이 위기 속에서 세스녹의 개신 교회들은 F.B. 반아이크와 앨버트 밴튼을 설교자로 한 연합 전도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수백 명의 영혼이 주께로 돌아왔다. 오순절운동적 분위기 속에서 많은 공산주의자가 회심했고 이들은 민중봉기에 대비해 저장했던 비밀폭탄창고를 공개했다. 악화일로였던 상황은 진정되었다. (1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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