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피긴 박사의 호주 복음주의 기독교의 역사 (5)

번역|홍은희ㆍ정의경/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10/28 [15:10]

제4장 말씀에 대한 도전의 시대 (1914~1932) 2부 

 
▲  스튜어트 피긴박사 (Dr. Stuart Piggin)   ©크리스찬리뷰

말씀의 수호와 전파

이 시기 복음주의 운동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분열로 위기를 겪었지만 바이블칼리지들을 통해 큰 도움을 받았다. 바이블칼리지들은 당시 상승 무드였던 자유주의자들에게 기존 신학교를 넘겨줌으로써 신학논쟁의 열기를 식히는 역할을 했다. 바이블 칼리지들은 새로운 세기에 요구되는 선교와 부흥의 열정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점 때문에, 갈등을 해결하는데 더 유리했다.

장로교의 윌리엄 록하트 모튼 목사는 허드슨 테일러의 영향을 받아 1893년 애들레이드에 호주 최초의 선교사 양성대학으로 앵거스 컬리지를 설립했고 1914년에는 역시 애들레이드에 채프만 알렉산더 성경연구원을 세웠다. 1916년 중국선교를 마치고 돌아온 조합교회 찰스 벤슨바넷 목사는 SMBC를 설립했다.

마찬가지로 1920년 설립된 멜번성경연구원 (BCV의 전신)은 C.H. 내쉬가 주도했고 중국내륙선교회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곳도 성경 연구를 통해 선교사후보생을 훈련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경 외에는 다른 교과서를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설립된 또 다른 바아블 칼리지는 퍼스성경연구원으로 1928년 침례교의 카멘트 어크하트가 세웠고, 1957년까지 서호주에서 유일한 개신교 복음주의 신학교였다. 이들은 복음주의 신학, 케직경건주의, 교파 간의 교류를 계속 살려나갔다.

또한 각급 신앙단체와 부흥운동, 복음주의 기관, 독립교회는 물론, 체계적인 성경지식에 갈급한 평신도들 다수가 바이블칼리지를 선호했다. 초기 지도자들인 모튼, 내쉬, 바넷, 어크하트, 롤의 지도력으로 바이블칼리지들은 20세기 전반 호주 복음주의의 성격을 지켜내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980년까지 이들 칼리지에 등록한 8천 명의 학생 중 40%가 전임사역자가 되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1920년대 NSW장로교 내에서는 R.G. 매킨타이어의 ‘잠재적 영원’과 존 에드워즈의 ‘신학적 재구성’, 사무엘 앵거스의 ‘성경보다 큰 기독교’라는 이름의 근대주의운동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진행된 감리교, 장로교, 조합교회의 약화 현상은 다른 모든 교회에 근대주의의 위험을 각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따라 대부분 NSW내 교회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보다도 보수주의와 정통 교리를 수호하게 되었다.

앵거스가 점화시킨 신학 논쟁 속에서 몰링신학교 교장 몰링은 NSW 침례교 신학교는 ‘근대 신학개념에 반대하는 건전한 복음주의’를 가르치는 것이 사명이라고 강조했고 뒤이어 C.J. 틴슬리 교장은 몰링신학교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만 기초함으로써 전 세계 어느 신학교보다도 강한 복음주의적 기반을 갖추었다’고 자부했다.

 
말씀으로 학생들에게 다가가기

1차, 2차 대전의 사이에 말씀이 가장 성공적으로 전파된 영역은 대학이었다. 1919년 대학 개정법에 따라 정부가 제공한 장학금 덕분에 공립학교와 카톨릭학교 출신의 능력 있는 학생들이 다수 시드니대학교에 입학했다.

미국 YMCA 존모트총재는 1896년에 호주를 방문, 멜번대오먼드컬리지에서 열린 컨퍼런스를 통해 호주학생기독운동(SCM: Australian Student Christian Movement)의 창립을 도왔다. 그 후 SCM은 학생사역에 있어 모델이 되었지만, 1920년대를 지나면서 SCM 지도층은 갈수록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1928년에는 대학복음주의연합(IVF: Inter-Varsity Fellowship of Evangelical Unions)이 탄생하였다. 국제본부로부터 IVF의 지도자 휴 고프는 IVF를 캐나다에 소개하는 임무가 맡겨졌다. 이 임무는 젊은 의대생 하워드 기네스가 실천, 캐나다 사역이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 후 하워드는 시드니의 복음주의 자선사업가인 J.B. 니콜슨의 제의를 받아 1930년 시드니대 복음주의연합 (SUEU: Sydney University Evangelical Union)을 설립했다.

멜번에서는 1930년 5월 14일 복음주의연합이 설립되었고 1933년 기네스가 두 번째로 호주를 방문했을 때에는 호주 내의 모든 대학에 IVF 지회가 설립되었다. IVF가 영적 기본 식단으로 강조한 것은 성경공부, 기도, 전도, 선교사역이었다. 1930년대 IVF는 근대주의에 대항하고, 당시 사무엘 앵거스가 지원한 시드니 SCM에 대항해 ‘근본주의’를 수호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말씀으로 세상에 다가가기

근대주의는 실제로 복음주의에 심각한 상처를 입혔다. 가장 큰 피해는 이전 복음주의가 보여주었던 사회 변혁에 대한 헌신이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복음주의자 대부분은 이제 개인의 변화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장로교와 감리교 교세는 크게 약화되었고 조합교회는 흩어지면서 ‘회생할 수 없었고’ 결국 쇠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침례교(특히 NSW에서)는 복음주의 함대의 기수역할을 감리교로부터 물려받았다.

1914년부터 빌리그래함 전도단이 활약한 1959년까지 복음주의를 지킨 것은 주로 NSW침례교와 형제단교회(브래드런)이었다. 당시 복음주의는 이들 교회 안에서 꾸준한 성경공부를 통해 견딜 수 있었다. 당시 NSW침례교가 배출한 삼두마차 지도자 G.H. 몰링, C.J. 틴슬리, 존 리들리는 이러한 성경공부운동을 지도함으로써 복음주의 전체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호주 복음주의 지배적 영성이었던 케직운동에 찬동했다. 몰링과 리들리은 케직사경회 연사로 자주 등장했다. 1932년 11월 14일, 존 리들리는 버튼가 침례교회에서 “시드니 거리마다 ‘영원’을 외치고 싶다”고 부르짖었다. 성공회 전도회관에서 회심한 알코올 중독자 아서 스테이스는 그로부터 1967년, 죽기 전까지 30년간 ‘영원 eternity’이라는 아름다운 인쇄체 글자를 시드니 거리마다 썼고 이는 시드니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 침례교는 비교적 보수적이고 교육수준이 낮았고, 고등교육을 받은 목회자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몰링은 강해 설교가로서 말씀 사경회, 교파를 초월하여 200명까지 등록했던 목요성경학교, 영향력 있는 ‘호주침례교’라는 간행지를 통해서 말씀을 가르쳤다. 그러나 깊은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에 별로 조예가 깊지 못해서 1930년대 후반부터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도 죄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고 가르쳤고, 한 세대 후 침례교 안에 은사주의 운동이 침범할 여지를 남겨주고 말았다.

한편, 이 시기 멜번에서는 호주 역사상 가장 조직적이고 확고한 의지를 보인 평신도 복음주의 네트워크가 세워지고 있었다. 이들의 영적 뿌리는 1902년 멜번을 방문한 ‘토래이’나 1891년 ‘지롱사경회’, 1883년에 설립된 빅토리아 복음화 협회에서 찾아진다. 이 네트워크는 비전과 능력이 있는 복음주의자들이 깊은 교제 속에서 발전했고, 자발적인 초교파 기관을 통해 전도와 성경 가르침에만 집중하였다.

동시대에 가장 영향력있는 내쉬 목사는 멜번 성경연구원, 업웨이사경회, 시민성경공부반 등을 통해 평신도를 양육하는 데 전념했다.멜번 성경연구원는 선교사를 훈련했고, 시민성경공부반은 멜번 중심에서도 젊은이들을 그리스도께 일생을 헌신시키려는 비전에서 태어났다. 후자는 남성 200명의 모임으로까지 발전했고, 바로 노방전도에 배치되었다.

 
성령으로 세상에 다가가기

이 시기 침례교가 복음주의 함대의 선봉에 선 것은 교리적으로 근본주의를 수호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도리어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을 통해 개인 심령의 영성을 계발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말씀과 성령의 조합은 침례교의 특징이었다. 침례교 신학대학 몰링 교장은 이 점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모델이었다. 그는 ‘성령의 교리를 가르쳤을 뿐 아니라 성령의 교리대로 살았던 인물로, 현란한 눈속임이 아니라 오래도록 그리스도의 영이 마음 속에 내재함으로써 진정 그 실체를 이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당시 오순절파 내부는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1920년과 1921년에 두 명의 ‘거물’이 호주를 방문했다. 스미스 위글스워스는 한 때 감리교와 구세군의 전도자였던 인물로, 1907년 영국 서덜랜드 성공회 교회에서 성령세례를 경험하고 곧 치유사역을 시작했다. 위글스워스식 사역은 이후 호주 정통오순절교회의 교과서가 되었다.

A.C. 발데즈는 1925년 멜번에 도착하여, 선샤인으로 가야한다는 환상을 보았다. 몇 주만에 션샤인 홀에는 교파에 관계 없이 수백 명이 ‘세례’를 받고 치유받고 회심했다. 멜번에서 선샤인으로 가는 기차는 집회에 참석자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여행 중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이란 찬송을 불렀고 어떤 이들은 집회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차 안에서 회심하기도 했다. 선샤인 부흥의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가 사역하는 동안, 호주의 오순절운동은 전도단 중심에서 교회중심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1920-1930년대에는 기존 교파 안에서 오순절파의 제명 사례가 빈번해졌다.  C.H. 내쉬의 멜번성경연구원, 케직사경회, 1926년 세계근본주의협회 등이 대표적인 예다. 결국 오순절파는 교파로 축소되고 자체 교회를 형성하는데 집중했다. 1926년 프레드릭 반 아이크는 사도신앙전도단(Apostolic Faith Mission)이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이와 비슷한 사역을 하는 그룹들이 통합을 위해 1937년 시드니 레드펀에서 호주 하나님의 성회라는 교단을 조직했다.

주류기독교에 오순절파가 진입하게 된 원인 중에는 치유 능력이 있었다. 1923년 J.M. 힉슨은 성공회 평신도로 호주를 방문, ‘구원은 육체를 포함하여 인간 전체에 행해지는 신성한 사역’이라고 가르쳤다. 시드니에서 힉슨의 가르침을 추종한 이들은 교회 밖의 영향력에 개방적이었던 이들(특히 선교단체)과 성공회내 고교회파였다. 1926년부터 초교파적인 성 누가회 (Order of Saint Luke)를 막후에서 주도한 세인트 로렌스 크라이스트 교회의 성공회사제 존호프신부는 ‘손과 성유를 얹는’ 방법으로 ‘치유의식’을 거행함으로써 힉슨의 전통을 따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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