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피긴 박사의 호주 복음주의 기독교의 역사 (끝)

번역 | 홍은희ㆍ정의경/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10/31 [17:35]
호주 원주민의 부흥은 심각한 문화적, 사회적 위기에 대응하는 영적 해결책이기도 했다. 원주민들은 ‘총체적인 자존감 저하’ 때문에 고통을 겪어 왔다. 그러나 원주민 목사들은 토착어로 직접 찬양을 만들어 원주민의 영성을 표현했다.

또한 이 부흥은 기독교가 전통적인 원주민 규범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기 위해 왔음을 보여주는 여러 증거들을 보여준다. 부흥은 원주민들이 자기 정체성을 찾는 걸음이었다. 또한 부흥은 원주민들이 예속의 단계를 벗어나 자치로, 진정 독립된 원주민 교회로 나아가는 힘이 되었다.

1992년 6월 3일, 마보 대 퀸스랜드 주정부 재판에서 대법원은 백인 이주 당시 호주가 주인 없는 땅이란 상식을 거부하고, 토지에 대한 주민의 공동 재산권을 법적으로 인정했다. 주정부, 광산 및 목축업자들은 반발했지만, 부흥으로 자신감을 찾고 교회의 강한 지원을 받는 원주민들은 호주인들에게 진실과 정의를 회복하도록 도전하기 시작했다.

호주 원주민은 토지 권한 문제에 있어서 공격의 선봉에 서는데도 교회와 함께 했지만 흑인과 백인 사이의 화해와 과거사에 대한 보상을 구하도록 국민적 정서를 바꾸어 놓은 데도 함께 했다. 마보사건은 성령이 이루신 일이었다. 

 
맺는 말

근 이백여 년간 호주 복음주의 기독교는 성경에 따라 사회를 개혁하고 복음 선포를 통해 사회 구성원들을 신앙으로 이끌어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사역이 성령, 말씀, 세상에 대한 통합적인 복음주의를 유지하는데 따라, 복음주의 운동의 열매도 바뀌었음을 살펴보았다.

복음주의가 균형을 잡을 때, 안에서는 호주인의 영적 필요뿐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도 반응할 수 있었지만, 이를 벗어나면 세상을 부인하는 경건주의로 흘러 부흥이 아닌 (인위적인) 부흥운동이 자주 등장했다.

한때 세계적 반향을 일으킨 완전주의도, 결국 역설적으로 세상의 도전에는 무력한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통합적 복음주의 안에서는 말씀에 대한 절대적 헌신으로 인해 개인의 구원과 사회적 개혁이라는 예언자적 처방이 나타났으나, 그렇지 못할 때는 친구를 적으로 공격하는 무기가 되기도 했다. 성령과 말씀으로 통합된 복음주의 사회 운동은 생명력이 있었지만, 사회적 관심만 남을 때는 산만하고 내용을 놓치고 말았다.

호주는 복음주의 기독교가 다루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호주의 물질주의는 복음주의 영성에 대항했고, 세속성은 말씀과 그리스도의 주권을 부인했다. 사회적 개혁도 성경의 영향력 밖에서 시작될 때가 많았다. 많은 유혹에 둘러싸였던 호주 복음주의자들은 개인주의적 종교과 확신, 자선으로 통하는 체면 치레식 관용이라는 대안에 너무 쉽게 자주 굴복하곤 했다. 그러나 복음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된 호주인도 많았기 때문에 맘몬의 영역에도 복음주의가 스며든 때가 있었다.

호주 복음주의는 세 가지 영역에서 호주 사회와 문화를 형성하는데 긍정적인 기여를 한 것 같다. 첫째는 19세기 전반에 걸쳐 호주의 국가정체성이 형성되는데 지속적이고도 필수적인 공헌을 했다. 복음주의 운동은 명분만 옳다면 어떤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협력했다.

호주를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로 만드는데 초석이 된 정치적 자유주의와 철학적 실용주의는 누구보다도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열렬한 지원을 받았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 복음주의자들은 이 신생 국가를 형성한 식민지 의회와 협약을 이루게 되었다. 각 교파와 교회는 학교와 선교 단체, 교회, 주일 학교, 언론 및 그밖에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해 국민들에게 기독교 의식을 부여했지만, 공립학교 시스템 안에서도 국민들에게 일반적이고 실용적이며 시민적인 기독교 의식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따라온 세속화는 교회가 기독교 의식을 가르치는데 더 이상 국가에 의존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국가 역시 교육 및 복지 시스템을 보충 지원해 온 교회에 의존했다.

지난 40여 년간 사회 복지에 대한 교회의 영향은 변화가 많았다. 지금은 구제 활동을 위한 준비가 1930년대 대공황 때보다 더 잘 갖추어져 있다. 진보적 교회뿐 아니라 보수적 교회들도 속한 공동체에 연계될 필요를 잘 인식하고 있다. 이제 호주 보수 기독교인들은 예술적 지적인 추구를 속물처럼 여기지 않는다.

호주 역사를 보면 전형적인 ‘무례한 호주 남자’는 종교와 예술, 학문을 적대시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이제는 이러한 태도를 문제로 인식한다. 그러나 예술과 학문, 복지 분야들뿐 아니라, 19세기처럼 현재 호주 문화와 사회에 끼치는 복음주의의 영향력은 그리 뚜렷하지는 않다. 분명히 19세기는 이에 대한 많은 증거들이 있다.

그러나 이후 복음주의자들은 개인구원에 더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복음주의의 기반은 현격하게 협소해졌고 성령이나 말씀 한 분야에만 천착하는 입장을 보였다. 또 20세기 복음주의자는 전문목회자에 대한 관심은 커졌지만, 역사의 교훈이 말해주는 것처럼 성도들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보는 습관을 회복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복음주의가 호주 건국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두 번째 영역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나타내는 유일한 권위의 원천으로 주장해온 고집이다. 호주 역사를 봐도, 성경을 기반으로 한 강건한 신학이 복음주의 교회에서조차 사라졌던 때가 자주 일어났다. 성경을 기반으로 한 신학이 너무 약한 나머지, 기독교가 계급이나 문화 가치를 복음처럼 수용하도록 한 경우도 많았다.

가장 극명한 예로, 제2장에서 보았다시피 도덕에 대한 19세기 당시 지배적인 견해를 교회가 지지한 것을 들 수 있다. 복음은 도덕이 아니다. 또한 건전한 성경적 신학 없이는 호주 역사에서 복음주의는 예언자적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래도 성경만으로 호주 국민과 사회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을 구하고자 노력한 점은 카톨릭, 자유주의, 오순절계 교회에서 찾기 힘든 복음주의 교회들만의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호주 역사에 끼친 복음주의의 세 번째 주요 기여도는 영적인 부분이다. 영적 갈급함은 최근 오순절계 교회에서 해결을 추구해 온 부분이자, 호주 역사상 끊임없이 나타난 현상이기도 했다. 부흥에 대한 소원은 역사 전반에 걸쳐 언제나 분명했다. 부흥 자체는 호주인들이 놀라우리만치 자주 경험했으며, 원주민들이 경험한 부흥은 이 소수 계층에 희망을 주었다.

이 세 가지 영역에는 문제도 있었다. 세상이 관련되는 한, 호주 복음주의자들은 신학을 달리하는 이들과 협력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모습이 흔치 않았다. 복음주의자들은 말씀에 비중을 두되 건강한 복음주의에 필수적인 다른 요소(예를 들어, 영성 훈련이라든지 가난한 이에 대한 교회 사역에 대한 관심)를 배제하지 않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또한 부흥과 성령의 삶에 대한 건강을 추구하면서도, 이런 욕구가 과잉으로 치우칠 위험을 항상 걱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들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호주에서 복음주의 운동이 나갈 바를 지적하는 것일 수 있다.

먼저, 복음에서 비롯된 사역에 초대 복음주의자들이 전념했던 그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이러한 사역은 세상 개혁과 개인 구원에 관련된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가르치셨다시피,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 죽으셨기에,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무시하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

둘째로, 성경적 신학에 전적으로 의탁하지 않으면 본질을 잃어버린다는 긴장은 계속 가져야 하지만, 친구를 원수로 삼거나 복음주의 운동을 분열하고 파괴하는 식으로 가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진정한 복음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부흥을 위해 경건의 삶과 기도를 강화하되, 완전주의의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완전주의는 성령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는다면서 파괴적이고 궁극적으로 실망을 주는 부흥 운동의 조작된 주장을 펼치는 이단을 말한다.

호주에서 기독교가 200년을 지나면서, 복음주의 운동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균형에 필요한 세 가닥의 실타래는 서로 느슨하게 엮여있는 상태이다.

역사적으로 그토록 활기를 띠었던 이 통합적 복음주의 운동이 흩어져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 말씀 가닥을 지지하는 이들이 여러 적들(의식주의, 자유주의, 세속주의, 인본주의, 여성 운동, 은사주의, 신비주의, 교회 중심주의)에 대항하여 신앙을 지켜온 데에 만족한 나머지, 때로 양의탈을 쓴 늑대가 아닐까 하는 의심에서 동지들(성령 가닥)을 겨냥하고 심지어 자기네끼리도 싸운다.

호주 복음주의의 갈등은 같은 편 전우끼리의 전쟁인 경우가 자주 있었다. 성령 가닥에 속한 이들은 17세기와 18세기 유럽 경건주의자였던 선조들처럼 경쟁적 간증과 신학적 논쟁 속에서 지쳐, 더 이상 자신을 ‘복음주의자’로 불리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 그밖에 여성 운동과 자유주의에 속한 다른 많은 이들 역시 멈춰선 상태여서, 복음주의 운동을 이끄는 현재의 세력이 건설한 세상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해답은 통합적 복음주의의 세 요소(성령, 말씀, 세상) 중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는데 있지 않고, 세 요소의 중심부에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두는 것에 있다. 허버트 버터필드 교수의 역작, 기독교와 역사(Christianity and History)의 ‘그리스도를 붙잡으라. 그리고 나머지는 아무 것도 믿지 말라.’라는 구절을 기억해 봄 직하다.

필자는 담대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하므로 그저 결론 삼아 이렇게 말해보고자 한다.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으라. 그리고 나머지 스스로 이해한 것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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