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말씀이냐, 성령이냐? (1960-1994년) 2편
냉대로부터 이끌어낸 신학 신학 교육은 사회의 일반 교육 수준을 반영한다. 1960년대 당시 멘지스 수상이 고등교육을 강화하자, 신학 교육도 혜택을 입었다. 신학교육기관이 급증하고 다양해졌는데, 그 중에는 비전을 가진 목회자들이 주도하에 개별 교회에서 설립한 학교(오순절파식 접근), 명확한 신학적 교리에 집중하는 교파별 신학교활동(개혁파 개신교식 접근), 전통적인 사립 학교와 연합하여 교수진과 도서 자료 자원활용을 극대화하는 방법(교회 일치파식 접근), 대학교의 신학부(학문적 접근) 등이 있었다. 일반 평신도와 원거리 교육, 호주 원주민 등을 위한 전문적인 신학 훈련이 제공되기도 했다. 이 기간 중 신학교육에 새로운 바람을 주도한 것은 오순절파 계열이었다. 기본적으로 성공적인 사역을 하는 목사가 목회의 실제을 훈련시키는 도제식 시스템이었고, 여기에는 예배, 리더십, 교육, 청년, 상담, 음악 사역이 포함되었다. 주요 오순절파 학교 중, 타보 성경 학교는 배리 챈트 박사가 아들레이드에서 시작했다. 이 학교로 1990년대 초까지 성장을 거듭하여 퍼스, 멜번, 아들레이드, 시드니 네 곳에 캠퍼스를 세웠다. 1974년 클라크 테일러가 브리스번에 세운 크리스찬 아웃리치 센터(Christian Outreach Centre)는 정통 오순절파기관으로, 성경 대학과 크리스찬 헤리티지 컬리지(Christian Heritage College)로 확대되었고, 주정부의 인가도 받았다. 이 학교는 태평양 및 아시아 지역의 12개 나라에 신학 교육을 제공했고, 호주 신학 교육의 발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시기에 설립된 교파학교에는 1968년 3월 3일 개원한 아들레이드의 루터 신학원도 포함된다. 25년 동안 520명의 입학생 중 275명이 안수과정을 이수했다. 1977년부터 시작된 신학사 프로그램은 1993년까지 230명의 학사를 배출했다. 목회학 석사는 1990년에 시작되었고, 호주 루터 교회의 목회자 중 60퍼센트 이상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신학을 교회의 필요에 합치하면서도 학문적인 수준을 일으키려는 노력도 있었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개혁을 위해 마련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는 교회 일치운동의 발전을 가져왔다. 1966년 호주신학협회는 학문의 영역 안에서 신학문제를 푸는 운동을 시작했고, 여기엔 1967년부터 뉴질랜드도 참여했다. 협회는 자신의 학문적 기준을 선언문으로 출간했다. 1967년에 ANZATS(the Australian and New Zealand Association of Theological Schools)가 설립되었다. 멜번에서는 오먼드 컬리지(장로교)와 퀸스 컬리지(감리교), 멜번 조합교회 신학교 신학과로 구성된 연합신학교(United Theological College)가 만들어지고, 여기엔 1972년부터 로마카톨릭의 예수회 신학교도 포함됐다. 1970년대 말부터 시드니, 브리스번, 아들레이드, 퍼스에도 신학교육 연합기관이 설립되어 코스 인가와 신학 학위를 발급할 권한을 획득했다. 신학대학 설립과 학문적 추구 한 세기 전, 대학으로부터 교회를 분리시켰던 실수를 정정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신학교들은 NSW 고등교육위원회를 비롯한 각주의 해당 기관으로부터 개설 코스를 인정받기에 이른다. 1983년 12월 15일, 시드니 신학교(Sydney College of Divinity)가 NSW 고등교육위원회의 인가를 받았다. 여기에 참여한 6개의 학교에는 침례교신학교, 시드니카톨릭신학교, 처치오브크라이스트신학교, 세인트폴신학교, 유니온신학교, 연합교단신학교 등이 포함되었다. 1986년에는 세인트 앤드류 그리스 정교회 신학교와 1989년부터는 성공회계의 캔버라 세인트 마크 신학교가 가입했다. 브리즈번 신학교로는 세인트 프란시스 컬리지(국교회), 파이어스 7세 프로빈셜 신학원(카톨릭), 트리니티 컬리지(연합교단)가 있다. 퍼스, 아들레이드, 브리스번 컨소시엄의 경우는 지역 대학교(각각 머독, 플린더스, 그리피스)가 감독을 맡고 있다. 그러나 신학교육은 교파별로 해야한다는 기존 생각은 새로운 교육기관의 등장 덕분에 도전을 받게 되었다. 1964년 연방교육에 관한 마틴 보고서가 출간되었다. 보고서는 신학 교육에 대해 '비교리적 성격의 신학교육'을 제공할 것을 권고했다. 동시에 이 보고서는 호주 내 다른 형태의 고등 교육과 더불어 신학 교육을 논의함으로써, 신학도 일반의 수준 높은 교육기관을 통해 제공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 덕분에 대학교들은 종교학과를 개설하고, 목회자를 양성하면서도 신학을 학문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과정을 신학교와 공조하여 개설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멜번의 라트로브 대학교는 1977년부터 기독교사와 신학, 성경학에 관한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시드니 대학교에 새로 설립된 종교학과는 1992년 시드니 신학교연맹(Sydney College of Divinity)과 상호 인증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학생들이 더 광범위한 주제에 접근하도록 했고, 1993년에는 호주신학교연맹(Australian College of Theology)이 맥쿼리 대학교 및 웨스턴 시드니 대학교와 협약을 맺어 예술 및 신학의 공동 학위 과정을 제공했다. 이러한 발전은 신학교육이 대학교의 다른 과정과 동등하게 인정시켜주었다. 1980년대에는 평신도에 대한 신학 교육이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다. 물론, 평신도 교육에 대한 필요는 오랫동안 감지되고 있었고, 1940년대부터 무어신학교는 평신도 지도자를 훈련시키기 위해 저녁반 과정을 시작했었다. 이것이 발전하여 신학 인증 및 예비 신학 인증을 위한 통신 과정이 개설되었고 매년 2천 명 가량의 학생들이 등록했다. 1986년, 후에 노스 시드니 교구를 지낸 맥쿼리 대학교 내 로버트 멘지스 컬리지의 폴 바네트 학장은 크리스찬 스터디 스쿨을 시작하여 호주신학교연맹(Australian College of Theology)의 파트 타임 학생을 위한 저녁반 과정을 개설했다. 이 과정은 연간 100여 명의 학생들이 등록했다. 원거리 교육은 호주 내에서 교회가 농촌 지역민을 훈련하고 위임 후 농촌 지역 목회자를 훈련하기 위해 수십 년간 담당해 왔던 방식이다. 성공회 내에서는 종교교육부(the General Board of Religious Education)을 통해 호주 신학교연맹(the Australian College of Theology)와 연합하여 과정을 제공했다. 특수 신학 교육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그룹은 호주 원주민이다. 1974년 이후 이들은 다윈의 눙갈리냐 컬리지와 퀸스랜드 분교인 원튤립 비 뷰야 컬리지를 통해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설립 교장인 키스 콜이 다윈의 컬리지 캠퍼스로 이사한 지 정확히 9일 후 사이클론 트레이시 때문에 모든 학교 건물이 파괴되었고 처음부터 다시 건축을 시작해야 했다. 개혁 신학의 상승 이 시기에 가장 눈에 띄는 복음주의 특징 중 하나는 개혁 기독교의 재등장이었고, 이는 기존 칼빈신학에 대한 보다 비타협적인 열정으로 요약된다. 이를 통해 영국과 호주의 성공회는 보다 강한 개혁주의적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개혁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호주 개신교 목회자 연례 총회도 영국이나 미국과 마찬가지로 많은 참석 인원을 자랑한다. 1957년, 영국에서는 배너 오프 트루스 트러스트(Banner of Truth Trust)가 설립되어 청교도 지도자들의 신학 서적을 재출간하기 시작했고, 개신교신학을 강조하는 배너 오브 트루스(Banner of Truth)라는 잡지를 간행했다. 이를 통해 말씀을 상고하고 성령 사역을 순수하게 갈망하는 영어권 복음주의자들은 많은 도움을 받았다. 호주 침례교와 장로교, 국교회의 복음주의자들이 가진 갈급한 심령에 개혁주의계 서적의 영향은 빠르고도 강력했다. 타스매니아에서 시작된 흥분은 곧 빅토리아로 전파되었다. 1960년 2월, 칼빈주의계열 침례교 그룹이 타스마니아 개혁 성도회를 설립했는데, 창립 멤버 중 에릭 턴불은 몇 주 후 침례교총회에서 개혁주의 신학 전파를 중단하라고 요구하자 탈퇴했다. 같은 해, 론세스톤 근처에 있는 세계복음주의전도회훈련원(World Evangelisation Crusade Training College)의 J. 로리 링컨 교장과 학생 50명 중 30명은 자체적으로 새 학교를 세우고 제네바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유는 ‘칼뱅주의'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개혁주의 복음교회(Reformed Evangelical Church)가 론세스톤에 설립되었고, 호주의 배너 오브 트루스 트러스트의 첫 번째 공식 에이전트로 지정되었다. 1962년, 호주 개혁주의 교단(Reformed Church of Australia)은 네덜란드 출신의 칼뱅 학자인 아브라함 키퍼의 전통을 잇는 호주 최초의 학교를 세웠다. 1963년에는 개혁주의 복음교회는 칼빈주의를 따르는 군소장로교단인 동부 호주 장로교와 연합하여 멜번에 존 녹스 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 신학교와 동부 호주 장로교는 그리스도가 오직 선택된 자들을 위해서만 죽었으므로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할 필요가 있는 지 같은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느라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마찬가지로 소규모 하이칼빈주의자들은 호주 전역에 걸쳐 번성하면서 합병과 분리를 거듭했다. 즉, 1970년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시작된 웨스트민스터 장로교, 1974년에 창립된 호주 개혁 장로교, 1986년 시작된 호주 남부 장로교 등이 그것이다. 호주침례교단 빌리 그레함 전폭 지원 침례교 내의 개혁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들 갈등은 1959년에 이르러서야 표면으로 나타났다. 바로 직전에 호주 침례교는 유명한 침례교 전도자인 빌리 그래함 목사에 대해 통일된 지원을 제공했다. 그러나 1968년 빌리 그래함 목사가 2차 방문했을 때부터는 얘기가 달라졌다. 이때는 배너 오브 트루스 트러스트 회원 중에는 그래함 목사를 ‘부흥사’ 내지 ‘결신을 억지로 끌어내며 유도한다’며 비난하면서 반대하는 이들이 생겨났고 호주를 방문했던 미국의 근본주의자인 칼 매킨타이어는 그래함 목사를 자유주의와 타협한 인물로 비난했다. 빅토리아주의 케랑 침례 교회의 장로들은 그래함 목사에세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보냈다. “때때로 우리는 목사님이 근본 교리를 부인하는 자들과 함께하는 모습이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최대한의 지원을 받고 전도의 영역을 넓힌다는 명분 아래 신약 성경의 원리를 벗어나는 위험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목사님이 우아한 사교술이란 넓은 길과 성경이 가르치는 차별성의 고통스런 좁은 길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시드니 피터섐의 W. 브래드버리라는 사람도 빌리 그래함 복음 전도단에 다음과 같은 폭탄을 쏘았다. “저는 그저 전기 기술자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말씀하시는 빌리 그래함 목사와 함께 하는 시간을 누려왔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빌리 그래함처럼 이리 저리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내 판단으로, 그래함 목사는 신학의 입장이 혼란스러운, 확고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래함 목사가 중립주의자가 아닌 근본주의자가 될 때까지 기다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1968년의 침례교는 빌리 그래함 목사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68년 멜번 집회가 열리기 3개월 전, 158개의 침례교회가 등록했는데, 이 숫자는 감리교와 국교회 교회 바로 다음이자, 장로교회보다는 훨씬 많은 수였다. 애쉬필드 침례교회의 E. 키니어 여사가 보낸 다음 글을 보자. “토요일 밤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 저의 작은 앵무새 버지에 대해 목사님께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 중, ‘예수님은 날 사랑하시고, 저는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압니다.’라고 하셨지요. 저의 작은 앵무새는 이제 일곱 살인데, 말을 배운 이후부터 줄곧 말을 합니다. 하루 중 버지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예수님이 날 사랑하시네’입니다. 그러고 나서 다른 얘기를 할 때도 있습니다. 어떨 때는 ‘예수님이 날 사랑하시네’하고 노래를 부르려고도 합니다.” 키니어 여사의 편지가 보여주는 정서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자들의 압박 속에서 침례교도들이 빌리 그래함 목사를 지원하기가 점점 어려워졌고, 이것은 다른 교파도 그랬다. 이 점에서 그동안 복음주의계 안에 이뤄졌던 합의가 붕괴되기 시작했음을 확실이 알 수 있다. 보수적 복음주의의 재등장 앞에서 일부 개신교 교단들은 개혁주의적 특징을 유지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멜번 침례교의 경우, 카톨릭계의 예수회 신학교의 참여 문제 때문에 연합신학부에서 나와, 1975년에는 복음주의 신학 연합(Evangelical Theological Association)을 구성했다. 이를 통해 휘틀리 신학교는 그리스도 교회 신학교(Churches of Christ Theological Colleges)와 연합으로 신학 학사 과정을 제공했다. 1977년 호주연합교회 탄생 1977년 연합교회가 구성되면서, 남은 호주 장로교회들은 목회 현장에서 보수적 개혁신학의 굳건한 기반을 다지는 조치를 강화했다. 크로포드 밀러 교수가 은퇴하자, 시드니대학교의 세인트 앤드류 컬리지에 있었던 장로교 신학교(Sydney Theological Hall)는 처음에는 애쉬필드로 갔다가 후에는 버우드로 옮겨졌다. 당시 상당수의 장로교 학생들은 무어 신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버우드로 옮긴 장로교 신학교는 J.A. 데이비스 목사가 이끌었고, 다작의 저서가이자 왕성한 활동력으로 퀸스랜드 장로교를 이끌었던 나이젤 리 박사나, 덕망 높은 칼뱅주의자로 1980년대 말까지 신학교 학장직을 역임한 멜번의 로버트 스완튼 목사 등이 대표적인 개혁주의 지도자들이었다. 1985년 시드니의 스탠모어 침례교회를 담임한 제임스 호그 목사는 '승리냐 비극이냐’(Triumph or Tragedy)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시드니 침례교 신학교(Baptist Theological College)가 시드니 신학교(Sydney College of Divinity)에 참여하는데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호그 목사는 카톨릭이 최대 협력자로 참여한 이 연합체에 침례교단이 참여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침례교단은 침례교 신학교와 호그 목사 양쪽 모두에게 입장을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신학교 측과 침례교단 실행위원회는 ‘타협 없는 협력’(Co-operation without Compromise)이라는 팸플릿을 내놓았고, 이에 호그 목사는 ‘교회연합운동: 동의할 수 없는 심각한 이유’(Ecumenism: A Serious Cause for Dissent)라는 글로 대응했다. 1986년 2월 22일에 있었던 총회에서, 연합 측은 일종의 안전 장치(예를 들어 ‘강의 교류를 하지 않음 등)와 함께 시드니 신학교연맹(Sydney College of Divinity)에 계속 참여하자는 안을 343대 329의 표결로 통과시켰다. 개혁 신앙 간행지였던 배너 오브 트루스(Banner of Truth)는 이 결과에 주목하면서, ‘논란은 결코 종식된 것이 아니며 일부 인사들은 통탄을 금하지 못했고, 어떤 이들은 스펄전 목사의 “죽은 듯이 고요한 것은 우리의 적일지도 모른다. 우리를 돕는 것은 폭풍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떠올렸다.’라고 썼다. 그러나 결국 개혁주의 세력의 압력은 너무나 커서 1988년, 침례교 신학교는 시드니 신학교 연맹(Sydney College of Divinity)으로부터 탈퇴하고 보다 보수적인 호주 신학교연맹(Australian College of Theology)에 참여하였다. 더구나, 1980년대는 성경의 무오류성에 대한 NSW 침례교도 간의 첨예한 논쟁이 일어나면서 상당수 목회자들이 빅토리아로 건너가 그곳 교회를 섬기고 복음주의에 대한 새로운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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