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3) 소생되는 교회들 참다운 부흥은 지역교회를 소생시키고 강력하게 만든다. 교회의 소생은 4가지 방면에서 드러났다. 1) 교회 출석자가 증가하고, 2) 신학생이 늘어나며 3) 선교사가 증가되고 4) 성서 유니온 지부의 숫자가 증가했던 것이다. 대회 이후 각 교회의 교인 수가 증가하는 풍성한 은혜가 있었다. 역사가들은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이후 호주교회는 1956년과 1961년 통계가 보여주듯 높은 증가를 보였다고 지적한다. 성공회와 침례교인 숫자는 1961년과 1966년 사이에도 건강한 증가를 유지했다. 아마도 대회가 이들 교파 안에서 복음전도의 역량을 키웠다고 하겠다. 감리교 역시 1961년은 최고의 해였다. 빌리그래함 대회로부터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교단이 있다고 한다면 침례교일 것이다. 그래함 자신이 침례교인이었고 전통적으로 침례교는 전도 캠페인을 강조했다. 실제로 대회에서 침례교 결심자 비율이 다른 교단의 평균보다 5배 높은 숫자였다. 2퍼센트를 차지하는 침례교인 비중에도 불구하고, 결심자의 11.6 퍼센트가 그쪽에 속해 있었다.이 숫자는 10.7 퍼센트의 장로교인 중 결심자의 숫자와 같은 비율이었다. 시드니대회에서는 침례교 혼자서 거의 30 퍼센트의 일대일 봉사|전도요원을 제공했다. 또한 신학생들과 선교사의 숫자는 대회 결과 극적인 성장을 보였다. 1969년 아들레이드 성서학교는 118.25%의 학생지원성장률을 보였다. 이는 그들이 1959년 대회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9년 160명의 멜본 성서학교 학생 중 반 이상이 1959년 대회의 산물이었다. 1960년 무어칼리지에 등록한 44명의 신입생은 학교 역사상 가장 많은 숫자였고 1961년 104명의 총 등록학생 숫자는 근래 들어 최고점이었다. 시드니의 디코니스하우스 (성공회내 여성사역자 교육기관) 또한 대회 이후 이내 62명의 신학생이 등록하는 감격을 누렸다. 전도대회는 성경읽기에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호주의 성서유니온 회원도 1958년 3월 5만 8,000명에서 1959년 11월 10만 4,000명으로 껑충 뛰어 올랐다. 시드니대회 수 주간 동안 183개의 성경공부 그룹이 시내 중심지에 생겼고 그 중 아더 딘 목사가 주관했던 그룹은 수십년에 걸쳐 지속되었다. 이 부흥을 통해 그 때까지 개종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1959년 호주와 뉴질랜드에 걸쳐 열린 써든크로스 전도대회의 15주 행사기간 동안 325만 인구이 참석했는데, 이는 당시 호주 전체와 뉴질랜드 인구의 1/4에 해당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대회에 한 번 이상 참석을 했지만, 참석한 사람 중 15만 명이 예수를 영접하라는 빌리 그래함의 초청에 응답했다. 이 중 13만 명이 호주인들이었는데 이는 인구의 1.24%를 차지한다. 복음설교를 들었던 사람들 가운데 이보다 더 큰 군중이 없었다. 이 점에서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성공적인 복음 캠페인이었다. 주교 컬은 놀라움을 갖고 이렇게 썼다. “나는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그리고 사람들이 이런 미숙한 설교를 통하여 변한다는 것을 다시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멜본대회 참석자 총계는 2만 6,440명의 지원자를 포함해서 71만 9,000명인데 이는 3.7%의 응답 비율이었다. 시드니 대회 참석자가 98만 명이었는데 이 중 5만 6,780명이 지원자였고 5.8%의 응답 비율을 보였다. 다른 도시에서 있었던 대회는 복음전도자들과 함께 연합하여 이루어졌으며 마지막에는 빌리 그래함의 설교가 있었다. 퍼스에서 10만 6,800명의 참석자 가운데 5천 396명의 지원자 (5.1%), 아들레이드에서 25만 3,000명 참석자 중 1만 965명의 지원자 (4.7%), 브리즈번에서 29만 1,000명 참석자 중 10만 661명의 지원자 (3.7%)가 있었다. 교회 인구에도 즉시 영향을 미쳤다. 시드니대회의 두 번째 주간에 예배 출석자의 증가는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래함은 이러한 엄청난 반응에 놀랐다. “저의 사역에서 이처럼 영적 갈급함이 클 줄은 몰랐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목회자들은 매일같이 삶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을 보고 했다. 가정이 새롭게 되었고 온 가족이 그리스도께 헌신하게 되었다. 사회악의 감소 과거 위대한 부흥은 사회의 윤리적 기준을 높였다. 때로는 범죄와 음행이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1959년 전도대회에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회가 범죄숫자에 영향을 준 증거를 본다면 이것이 부흥을 정의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일반적으로 5년 주기로 모집되는 통계들을 통해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눈에 음주를 빼고 모든 범죄가 1950년에 급격하게 늘었다는 통계가 나온다. 이 때문는 청소년 범죄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자주 들리고, 실제적으로 많은 도덕적 탈선이 목격되었다. 이 우려가 빌리 그래함이 왔을 때 호주인들이 부흥을 놓고 기도하게 한 이유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범죄가 더 높아졌다. 대회는 사회적 기준에 영향을 주지 못한 것으로 되었고 그래서 이것은 부흥이 아니다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시드니대회의 마지막 모임 이후 주정부의 A.E 디븐헴 장관은 ‘폭력배들이 소총을 포기했다. 좀도둑들이 연장를 버렸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게재했고 “빌리 그래함 대회가 시드니에서 범죄를 50% 감소시킨 것으로 추정한다”라고 말했다. 이 주장과 함께 이런 이야기들이 뒤따랐다. 금고털이 강도가 그의 절도 장비를 일대일 전도요원에게 넘겨주어 어리둥절하게 만들었고 무장강도가 무장해제 했으며 그리고 사업자들의 부채상환이 늘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시드니의 홍등가인 킹스크로스에서 교회 참석자도 최고도로 달하고 있었다. 성공회 교인이었던 디븐헴 장관은 모든 대회마다 참석했다. 그의 일의 성격상 그는 사람들과 마당에서 면담을 하곤 했다. 그는 그들과 친밀하게 토론한 것을 바탕으로 그들의 영적 상태를 탐구했다. 그 결과 빌리 그래함은 시드니의 영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많은 숨겨져 있던 의식이 깨어났다. 한 젊은 여성은 그녀가 속임수로 학위를 취득했다고 대학에 고백했다. 한 은행원이 적은 액수지만 은행의 돈을 횡령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해고당할 것을 기대했는데 그러기는커녕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은행직원도 대회에 나가서 개종하게 되었다. 이런 보고들이 범죄통계를 더 자세히 보도록 하게 한다. 호주 전 지역에서 범죄자들의 숫자가 1920년과 1950년 사이에 두 배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1950년 1959년 사이에 인구가 오직 4분의 1 증가했던 반면 범죄 숫자는 두 배가 되었다. 그러나 1960년, 1961년, 그리고 1962년 유죄 판결자들의 숫자가 증가세를 멈쳤다. 그러나 범죄율은 1960년대 중반과 후반에 다시 급격하게 올라갔다. 이것은 빌리 그래함 대회를 통해 사회범죄들을 멈추는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혼외 출산과 알콜 중독은 당시 중요한 사회 문제였다. 1950년 말과 1960년대의 영적부흥은 이부분에도 영향을 미쳤다. 1940년대에는 혼전 출생률이 낮았고, 1950년초에는 역사상 가장 낮은 3.9%를 기록했다. 그러나 1950년 중반기와 후반기에 무섭게 올라가 1960년대 성적 자유방임주의를 예고했다. 1955년과 1965년 사이 매년 1954년 숫자보다 배로 치솟았으나, 의외로 가장 낮은 성장율(0.06%)이 1960년에 나타났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빌리 그래함 대회가 현존하는 부패를 되돌리기보다는, 더욱 부패해져 가는 것을 중지시켰다는 사실이다. 알콜 소비량으로 돌아가 보자. 통계청 자료는 그 흐름과 반대로 1960~1961년 사이의 알콜 소비량이 1958~1959년보다 10%가 낮았다고 했다. 빌리 그래함 대회와 동시에 호주 사회에서 10%의 맥주 감소량이 있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1959년 대회가 어떻게 성공적이었다고 설명하는가? 역사적으로 성공은 단편적으로 평가할 문제가 아니다. 복합적인 요인들이 대회의 최종적인 영향을 설명해 준다. 세계 냉전의 위협 앞에서 사회는 도덕적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기 시작했을 때, 그래함의 메시지에서 도전과 희망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열었다. 선물들, 무대 그리고 빌리그래함의 훌륭한 조직과 그의 팀들이 성공에 기여했다. 훌륭한 평신도들이 수십 년 동안 교회단체들에서 익숙하게 섬겼왔던 심리상태가 멜본대회를 성공하게 한 핵심이 되었다. 알란 워커에 의해 1950년대 감리교가 다시 부흥기를 맛본 것도 이와 상응하는 것이었다. 이 중 현격히 큰 집단은 복음주의 성공회였다. 빌리 그래함은 하워드 몰의 케익에 아이싱을 발랐다. 이것은 좋은 재료를 듬쁙 사용한 질이 좋은 케익이었다. 원래 멜본의 지도자 S.B 바비지와 리온 모리스, 시드니의 컬과 론 그리고 다른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건설적이었다. 복음주의 성공회 성직자들은 영혼의 열망에 열성적이었다. 그들은 복음을 체험했다. 그리고 그들은 1950년대의 많은 효과적인 교구사역의 성공을 맛보았다. 남성과 여성 평신도들은 능력이 있었고 존귀했다. 카톨릭교회처럼 성공회 교회는 부흥을 잘 즐기지 못한다. 그러나 수많은 성공회 교인들이 이를 갈급해 하기 시작할 때 1954년 영국에서 있었던 것처럼 1959년 호주에서도 무엇이 일어났다. 그래함은 호주에 있는 동안 이 모든 것을 보았다. 이것이 다음번 대각성이 호주에서 시작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하였다. 1959년 호주에 부흥이 일어났는가? 그렇다. 이것은 부흥이었다. 그것도 대단한 것이었다. 믿지 않는자들을 향하여 복음이 나가고 설교자의 긍정적 개성이 반영되고 그래서 과거의 칙칙했던 부흥과는 달라 보였던 것이다. 회고해 보면 지극히 선명했던 것은 1959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는 새로운 시대의 탁월했던 성취의 징조라기보다는 호주의 복음적 통합의 최고의 성취였다. 대회 가운데 서로 아주 단단하게 묶여져 있던 것들이 풀려졌다.〠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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