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말씀과 성령 (2부)
칼빈주의신학의 부흥 이 시기 동안 계속된 근대주의 논쟁은 복음주의 전체에 해를 입혔다. 자유주의가 보수주의 교파에 미친 영향 때문에 1911년부터 1938년까지 멜본 침례신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W.H. 홀스워드이 은퇴하자 후임 문제로 큰 갈등이 일어났다. 이 논쟁으로 불거진 후유증은 향후 수년간 침례교 내에서 해결되지 못했다. 1933년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영문판이 등장했다. 바르트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모두를 공격했다. 사무엘 앵거스의 자유주의신학의 영향으로 헤매던 호주 개신교도 중 상당수가 바르트라는 구조선을 통해 잠시나마 복음주의쪽으로 돌아섰다. 복음주의자들은 바르트의 가르침을 대부분 환영했다. 바르트는 신앙을 문화, 역사, 이성, 경험, 기성 교회, 정치 권력 등으로부터 구하고자 했고, 인간을 철저히 낮추고 하나님을 높였다. 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에 대항하는 무기로 바르트를 열심히 사용했지만, 성경 말씀이 사회 참여와 유리되는 대목에서는 거부감을 보였다. 동시에 바르트주의에 대한 성경적 답변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칼뱅주의(개혁주의)가 복음주의 안에 재등장하게 되었다. 칼뱅주의의 회생증거는 1942년 Re- formed Theological Review 학술지다. 당시 대학교 내 학생기독운동(SCM)은 바르트신학을 전적으로 수용했지만, 1940년대 기독학생회(IVF)를 통해 능력있는 개혁주의 학자들이 등장하여, 칼뱅주의적 복음주의의 개화기를 열어간다. 1951년에는 호주에서 IVF를 창립한 하워드 기네스가 시드니대 선교집회에서 강연을 했는데, 전도집회 사상 위대한 대학교사역으로 평가 받게 되었다. 1950년대에 이르러 자유주의는 쇠퇴하고 성경신학이 재탄생했고, 복음주의적 신학이 다시 살아났다. 이러한 학문적 부흥을 통해 근대 호주복음주의가 만들어졌다. 1950년대 전반에 IVF를 이끈 지도자는 펜실베니아 태생 찰스 트라우트먼이며, 빌리 그래함 전도 대회를 통해 많은 회심을 이끌었다. 그는 성서유니온(Scripture Union)과 IVF 사이의 견고한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1867년 영국에서 설립된 성서유니온은 호주에서 매년 해안전도집회(Beach Mission)를 주최하여 많은 젊은이를 그리스도로 인도했다. 다양한 신학교의 등장도 복음주의사상전에 새무기를 제공했다. 1963년까지 호주에는 56개 신학교가 설립되었고, 대표적인 신학학위관리기관인 멜본신학대학(MDC)와 호주신학대학(ACT)의 기준이 상향되었다. 멜본리들리신학교에는 바비지 학장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교수들이 모였다. 이 중 리온 모리스와 프랭크 앤더슨은 학문과 복음주의 신앙을 결합시켰다. 세상 변혁의 전략 신약학자였던 모리스는 1964년부터 30년간 리들리 학장을 역임하면서 40여 권이 넘는 신학서적을 통해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의미를 연구했다. 구약언어전문가 앤더슨은 이후 퀸스랜드대 종교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시드니 침례교도들은 1960년까지 몰링 아래서 태평성세를 누렸다. 1932년 다섯 명의 일본인 어부들이 칼레돈베이에서 피살되고, 사건 수사로 파견된 경찰관 역시 창에 찔려 숨졌다. 경찰은 토벌계획을 세웠지만 선교사들은 직접 원주민을 방문하여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을 맞이한 것은 창이 아니라 환대였다. 일본인 피살은 그들이 여성들을 추행하다 발생한 사건이었고, 다기아라는 인물은 경찰이 자신의 젊은 아내를 희롱해서 격분한 나머지 창으로 찔렀다고 주장했다. 선교사들은 다윈으로 가서 재판을 받으면 사면될 것으로 설득했지만, 막상 재판에서 주민들은 20년형, 다기아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다행히 대법원에서 뒤집어졌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원주민관련 재판 절차에 변화가 일어났다. 동시에 정부는 분리정책 대신 같은 호주 국민으로서 대우하며 동화정책을 시작했다. 1959년 주요 기독선교단체들은 기존의 모든 보호 구역을 원주민들이 그대로 사용, 소유하도록 촉구했다. 멜본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C.H. 내쉬를 중심으로 복음주의적 평신도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내쉬는 학자였으므로 복음주의라란 이름을 붙였다고 뭐든지 따라가지 않도록 가르치며, 소위 ‘할리우드적 복음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내쉬의 제자들은 성경, 기도, 복음에 대한 비전으로 훈련되어 제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여러 복음주의 교육 기관을 이끌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45년 이후 Interdenominational Missionary Fellowship을 설립되고, 이후 더 광범위한 빅토리아 복음주의 연맹(Evangelical Alliance of Victoria)이 결성되었다. 세계 복음화가 모든 신자들의 의무라는 사실은 두 선교 그룹의 기본 방침에 있어서 뼈대에 해당했다. 이들은 1930년대 중반의 부흥을 경험했고 1943년의 업웨이사경회와 1959년의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를 통해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이것은 1970년의 뉴기니와 1973년의 보르네오 부흥으로 이어졌다. 이들 지도자 상당수는 감리교도였으나 감리교내 자유주의를 배격하면서도 사회정의와 성령 충만으로 부흥을 간절히 소원했다. 이들은 업웨이사경회를 중심으로 ‘경건의 시간’과 성경공부, 그리고 열심으로 기도했다. 성령의 사역 1930년대와 1940년대 호주에서 여러 부흥이 일어났다. 당시에는 뛰어난 부흥사가 따로 활동하지 않았던 때였기에, 성령만을 의지한 부흥이 더 부각됐다. 퀸스랜드의 움바이와 투움바, NSW 북부의 킹스클리프, 빅토리아의 닐, 남호주의 광산지역에서 부흥이 일어났다. 한편, 1933년 동아프리카 부흥의 결과로 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이 타격을 입고 1950년대와 1960년대 이후에 이 지역에 독립국가 건설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 호주 기독교도 이 부흥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제프 빙햄목사로, 말씀, 성령, 현실 참여라는 복음주의 조화를 잘 보여 주는 예였다. 주일마다 그의 밀러스 포인트 홀리 트리니티 교회는 성도로 가득 채워졌다. 동역하던 목사들과 함께 철야 기도회가 진행되고, 부흥의 확산을 위해 파키스탄 선교 여행을 주관했다. 시드니 목회자들은 그의 지도로 케직사경회의 영향을 받은 영성과 개혁신학을 같이 추구하는 단체를 조직했다. 이를 통해 부흥의 불길이 시드니를 불태우기 시작했고, 이들이 주관한 사경회는 전례 없이 죄의 고백과 기도가 휩쓸었다. 출석 성도가 늘어남에 따라 주류 교회의 신도수가 1950년대부터 급증하여 1960년대에는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TV나 스포츠 활동이 미미했던 1950년대는 주일학교의 규모도 상당했고,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교회건축물들이 세워진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멜본 성공회는 복음주의 교구들이 자유주의적 고교회(카톨릭교회적 의식을 강조하는 교회)로 바뀌어나갔고, 시드니에서 여러 목사를 파송했지만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1953년, 감리교의 앨런 워커를 중심으로 전국복음화운동(Mission to the Nation)이 시작했다. 1947년 인구 조사에서, 국교회는 성공회와 카톨릭에 이어 호주의 세 번째로 큰 기독교종파가 되고 장로교까지 앞질렀다. 1958년 앨런 워커는 시드니중앙감리교선교회(Sydney Central Methodist Mission 웨슬리미션의 전신)의 감독이 되어 ‘복음과 사회정의를 같이 찾는 균형있는 복음’을 추구했다. 2차대전 후 ‘미국화 현상’과 더불어 여행이 쉬워짐에 따라 미국의 종교적 영향력이 커져갔다. 호주정부는 기존의 주류 교파에 대한 숨은 지원들을 철회하면서, 특히 주류 성공회의 영향력은 약화되어 갔다. 전후 호주의 생활 방식이 덜 영국적으로 바뀌면서, 근본주의적 기독교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주류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다원주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사회로 더 빨리 변해갔다. 특히 이것은 은사주의운동에 더 맞는 기독교환경을 조성한다. 덕분에 성령과 말씀의 조화는 다음 세대에서는 철저히 분리되기 시작한다.〠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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