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우드 이민 수용소를 다녀오다
 
김환기/크리스찬리뷰

호주는 1951년 ‘UN 난민헌정’과 ‘1967년 Protocol’에 서명하여 매년 최소한 1만 3천여 명의 난민(refugee)을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에 이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난민을 많이 받아들이는 국가이다.

 

난민이란 1951년 ‘UN 난민헌정’과 ‘1967 Protocol’에 의하면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 집단의 멤버, 정치적인 의견’의 다섯 가지 중 한 가지라도 관련되어 자국에서 살 수 없는 사람을 ‘난민’이라고 부른다.

 

난민은 난민 비자를 받은 사람이다. 난민 비자를 신청한 사람을 ‘난민 신청자’(asylum seeker)라고 한다. 난민신청은 호주 안과 밖에서 할 수 있다. 호주 안에서 난민을 신청한 사람을 ‘on shore 난민신청자’이고, 호주 밖에서 난민을 신청한 사람은 ‘off shore 난민신청자’이다. 빌라우드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on shore 난민신청자’이다.

 

며칠 전 빌라우드 빌라우드 이민 수용소(이하 수용소)에 다녀왔다. 수용소 사역을 시작한지 15년이 넘었다. 지금도 빌라우드 chaplain으로 되어 있다. 3주 전에 센트럴 코스트에서 사역하는 그라익(Graig)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대면 예배뿐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복음을 전하고 있다. 어느 날 수용소에 있는 사람에게서 그에게 연락이 왔다. 마약과 연관되어 빌라우드에 수용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1살 때 부모님과 함께 영국에서 호주로 이민와 50년을 살았지만 시민권을 받지 않았다. 영주권과 시민권의 차이가 거의 없지만 범죄가 발생하면 달라진다. 호주법에 의하면 1년 이상의 형을 받은 영주권자는 추방될 수 있다.

 

그는 마약과 관련된 범죄로 4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빌라우드 수용소로 이송되어 추방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국경이 봉쇄되면서 9개월 째 빌라우드에 감금되어 있다. 빌라우드 수용소의 수용 인원은 550명이 조금 넘는다. 현재는 비행기가 뜨지 않아 수용소가 차고 넘치고 있다.

 

빌라우드 수용소는 원래 이민이나 난민 온 사람들이 잠시 머무는 숙소였다. 후에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용소로 용도를 변경하였다. 건물이 너무 오래되어 철거하고 새로 지었다. 건물을 신축한 후 예전과 같이 자유롭게 방문할 수 없게 되었다. 이민성에 개인 계좌를 열어야 하고, 면회 24시간 전에 신청을 하여 허가를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다.

 

빌라우드 수용소를 관리하는 기관은 이민성이 아니라 영국에 본부를 둔 써코(Serco)라는 하청업체이다. 2016년 4월부터 써코는 이민성을 대신하여 빌라우드 수용소를 관리하고 있다.

 

수용소의 환경 개선을 위한 지역자문단 CCG (Community Consultative Group)이 있다. 이민성 직원, Serco 직원 그리고 수용인(client)을 돕는 ‘비영리단체’(NGO) 대표들이 함께 모여, 수용인들의 처우개선과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정책적인 제안을 하거나 논의하는 모임이다. 정기적으로 모임이 있었지만 요즘에는 모이지 않는다.

 

코로나 기간에는 면회가 일체 불허되었다. 코로나의 규제가 완화되면서 면회는 허락되었지만, 면회 조건은 강화되었다. 면회 5일 전에 신청을 해야 하고, 개인적인 면회만 허락되며, 면회 시간도 1시간이다.

 

그는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나를 보고 무척 기뻐했다.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는데 누군가 찾아왔다는 그 자체가 기쁜 것 같았다. 그는 마음속에 품고 있던 억울한 이야기를 나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듣고 있노라니 등 뒤에서 간수가 면회 시간이 5분 남았다고 한다. 그는 당황해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니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수용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내일이다. 4년간 감옥에 있을 때는 시간이 흐르면 출소할 시간이 가까워진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수용소에서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기에 하루하루가 불안하다고 한다.

 

인간은 내일이 없어 오늘에 절망하고, 내일을 몰라 오늘을 불안해한다. 인간이 자살을 하는 이유는 오늘의 삶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내일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살은 죽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살고는 싶지만, 더 이상 이런 식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는 마지막 표현이다. 〠

 

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구세군라이드교회

▲ 김환기     © 크리스찬리뷰

copyright ⓒ 크리스찬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입력: 2021/04/26 [15:56]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배너
배너
배너
포토 포토 포토
인생길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