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7/31 [11:1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공간으로 완전한 나라다. 가난도 없고 눈물도 없고 고통도 죽음도 없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다. 기쁨과 평강과 희락과 사랑이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이 넘실대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다. 그래서 우리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다.

그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이 이 땅으로 가져오셨다. 미래의 나라를 현재 속으로 가져오셨다. 영원한 나라를 시간 속으로 가져오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의 일상과 매우 가까이에 있다. 때로는 우리의 삶과 하나님의 나라가 서로 교차하기도 한다. 언젠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날,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듯이 우리의 삶과 하나님의 나라는 일치할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전에도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을 누리고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현실의 삶이 지독히도 고통스럽고 눈물겹도록 힘이 들어도, 천국을 누릴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산에 올라가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을 보시더니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애초에 무리들을 보신 곳이 산이 아니라 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들은 평지다. 편안한 곳이다. 가진 자들의 땅이다. 그곳으로부터 예수님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곳은 가파르고 험난하고 불편한 곳이다. 가진 것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오를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산에 오르려면 몸이 가벼워야 한다. 세상의 욕망이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려던 사람들이 마지못해 산을 오르지만 산 중턱에서 죄다 포기했을 것이다. 또 들판에 미련을 두고 온 사람들도 중도에 탈락했을 것이다. 편안한 삶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아예 산쪽으로는 한 걸음도 떼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산으로 오르셨을까? 허다한 무리들이 있는 들에 머물고 있음에도 왜 그들을 떠나 산으로 오르셨나? 무리들로부터 제자들을 구별하기 위함이셨다.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오르는 자들은 들판에 미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자기의 것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주님만이 영원한 진리라고 믿고 세상에는 관심을 버린 사람들이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편안한 삶을 버린 사람들이다. 그렇게 주님을 따라 산에 올라온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제자’라고 불러주셨다.

그리고 산에 올라온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입을 열어 친히 가르침을 주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그 허다한 무리들 가운데, 제자들을 구별하시고는, 그들에게만 친히 입을 열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해주셨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복 있는 사람들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이 세상의 복과는 다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천국을 소유하는 복이다. 천국을 소유한 자만이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 그래서 천국을 소유한 그들이 정말 행복한 사람, 복이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첫 번째로 복이 있는 사람을 “심령이 가난 한 자”라고 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구일까? 내 안에 있는 욕망, 욕심, 이기심 등을 비워낸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일까?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욕심도 없고 이기심도 없는 사람,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평생을 무소유의 삶을 외치고 지향하셨던 고 법정 스님이 이 시대에 대표적인 심령이 가난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무소유, 무욕, 자기 비움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무소유의 삶을 사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라면,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도 천국을 소유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천국을 소유하기는커녕, 천국을 볼 수도 없고 천국에 닿을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내 욕심을 비우고 내 욕망을 비우고 내 마음을  비워내는 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구이겠는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다. 아무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우리말 ‘심령’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뉴마, 성령을 가리킨다. 그리고 가난한 자의 본래 의미는 빈곤한 자, 상실한 자, 구걸하는 자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성령이 가난한 자, 성령이 빈곤한 자, 성령의 은혜를 상실한 자를 가리킨다. 성령이 고갈되어서 성령을 구걸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이 생기가 바로 성령이다. 하나님이 흙덩이에 불과한 사람에게 성령의 바람을 후~ 하고 불어넣으시자, 그 흙덩이가 생령,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때부터 사람은 성령의 호흡으로 살아갈 수가 있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바로 이 생기가 사라진 자다. 성령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성령의 호흡이 멈추어버린 인생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수 있는 영적 자산이 전혀 없는 사람, 영적으로 텅 빈 심령을 가진 사람, 즉 영적으로 죽어가는 사람이다.



피할 곳이 하나님 밖에 없는 사람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심령이 가난한 자를 복이 있다고 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주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살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하나님이 외에는 텅 비어버린 심령을 채울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생기가 사라져 버린 심령에 성령의 새 바람을 불어넣으시는 분이 오직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오직 자기에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 하나님의 자비만을 의지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내게는 아무 것도 없어서 하나님의 자비만을 의지하는 자, 그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다. 너무도 부족해서 하나님 앞에서 눈을 들지도 못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던 세리와 같은 자, 그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험한 이 세상에서 피할 곳이 하나님 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어서 그저 가슴만 치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의지하고 싶어도 의지할 데라고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자, 그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정말 하나님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 그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눅 1:53). 하나님 앞에 스스로 부자라고 여기는 자, 하나님 없이도 자기 자신의 능력과 물질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자, 그 부자들을 하나님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신다. 그러나 주린 자, 하나님 앞에서 정말 주리고 목마른 자들, 하나님이 없이는 한순간도 인간답게 살 수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신다.

초대교회는 심령이 부자였던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가난하고 무식했던 갈릴리의 어부들, 인간 사회에서 거절당하던 세리와 창기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던 제자들을 통해, 초대 교회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교회가 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복이 있는 사람들이었겠는가! 심령은 비록 가난했지만, 그들은 천국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천국은 은혜다. 천국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주님의 은혜로 오는 것이다. 천국은 내가 비운다고 해서 소유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천국을 소유할 자격이 전혀 없다. 심령이 가난한 자, 그 불쌍하고 비천한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가 천국이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던 자에게 그래서 도무지 행복해 질 수 없던 자에게, 주님이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심령이 가난한 사람, 심령이 가난한 교회가 되자. 그때에 이 땅의 소유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복 있는 사람, 복 있는 교회가 될 것이다.〠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blog.daum.net/goodseedchurch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